멕시코 스타일 세비체 (ceviche)
첫 만남부터 나에게 과달라하라 도시 오리엔테이션을 제대로 시켜준 한 커플과 다시 만나게 된 건 4일 후였다. 이들은 나를 낡은 자동차에 태우고 다짜고짜 어디론가 향했다. 내가 일전에 지나가는 말로 과달라하라 미술 전시회 가볼 만한 곳이 있을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이를 기억한 커플은 나를 과달라하라 예술 박물관인 MUSA(Museo de las Artes)로 데려갔다.
과달라하라 대학교 소유의 박물관으로 무료 개방인데 상시 전시 및 기획 전시 등이 열린다. 이 대학교 출신이기도 한 이 커플은 자기들도 주기적으로 특별전시회 감상하러 종종 온다고. 컨템퍼러리 아트 위주 전시로 복잡한 역사 이해 없이도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전시가 많은 곳이었다. 이후, 멕시코 벽화 예술가 오로스코의 천장 벽화 걸작이 있는 까바냐스 박물관(Museo Cabañas)에 도착했는데, 천장 벽화를 제대로 보라며 아예 누울 수 있는 벤치가 마련되어 있다.
멕시코는 '혁명'을 주제로 한 벽화 예술로 유명한 대표적인 국가다. 멕시코 3대 벽화예술가로 1)디에고 리베라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도 유명하다) 2)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3)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를 손꼽는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는 과달라하라 도시가 있는 할리스코 주 출신으로 인간의 고통과 혁명을 어둡게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디에고 리베라가 채도가 쨍한 색감을 사용해 혁명과 민중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면,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는 채도가 낮고 다소 무게가 있는 게 특징이다. 멕시코 벽화 예술은 유럽의 고전 미술풍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평소 예술에 관심이 없더라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난 그저 맛집을 물어봤을 뿐인데
박물관과 미술관은 체력 소모가 안될 거 같은 활동이지만, 2~3시간만 작품들을 꼼꼼하게 보면서 돌아다니면 피로도는 야외에서 5~7시간 걷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멕시코의 역동적인 예술작품들을 감상만 했을 뿐인데 마치 내가 그 역동성에 휘말린 듯, 허기가 졌다.
어디 앉아서 시원한 음료에 간단한 음식이 먹고 싶어 친구 커플에게 "근처 맛집 가는 거 어때? 슬슬 배고픈데"라고 제안하니 이들이 살짝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일단 주차된 차를 찾으러 함께 갔다. 나 몰래 자기네들끼리 작게 속삭이더니, 대뜸 "우리가 사는 집으로 가자"라고 제안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여행할 때 현지인 집에 초대되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그들이 별 망설이지 않고, 집으로 초대하길래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줄 알았는데, 웬걸. 고속도로를 타더니 1시간을 한참 달리고 나서야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새로운 마을에 왔다는 설렘보단 우리 집보다 훨씬 먼 이곳에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 막막했다. 내가 살고 있는 에어비앤비는 과달라하라 시내 중심에서도 약 1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이들의 집에선 2시간 거리이다. 만약 이들이 나를 우리 집까지 다시 데려다준다면 왕복만 4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시간은 벌써 5시인데, 어느 세월에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여자 L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밥 먹고 너네 집까지 태워다 줄게"
홈메이드 세비체
친구의 집은 커다란 뒷마당이 딸린 2층 주택이었다. 허름한 차를 끌고 다녀서 경제 사정이 그리 좋을 거란 생각을 못했는데, 저택의 규모가 꽤 크고 잘 가꿔져 있어서 놀랐다. 이들은 "이 동네는 시골이라 집들이 다 커"하면서 너스레를 떨었지만, 잔디가 곱게 깔린 뒷마당은 미니 운동회를 해도 될 만큼 넓었다. 친구는 검은 고양이 2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들이 작정하고 숨으면 찾는데 하루종일 걸린다고.
정원에 하얀 테이블을 펴고 우린 집 앞 슈퍼에서 사 온 맥주부터 따랐다. 하루종일 전시 관람하느라 지친 몸에 차가운 맥주는 활력을 준다. 내가 맥주를 정신없이 마시는 사이 이들은 패밀리 피자 사이즈보다 더 큰 접시를 들고 와 테이블 가운데에 턱 하고 내려놓았다.
아낌없이 넣은 새우들과 잘게 썬 오이, 고수, 토마토 등이 가득 담겨 있다. 이들은 라임주스에 버무려져 있는 상태였는데 멕시코 스타일의 세비체였다. 친구의 어머니가 그 전날, 한가득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접시가 넓고 깊어, 10인분은 족히 될 양에 입이 떡 벌어졌다.
세비체(Ceviche)는 중남미 국가 중 페루의 대표 음식으로 유명하다. 익히지 않은 흰 살 생선 혹은 새우를 라임주스, 소금 등에 재워두면 산 성분에 의해 단백질이 익는 원리로 즐기는 음식이다. 생선회에 비유되긴 하지만, 세비체는 라임이나 레몬주스로 반드시 절여야 한다. 이들에게 레몬과 라임주스 없이 그냥 싱싱한 생선회를 먹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페루에서 세비체가 기원됐지만, 이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져, 각 국가 스타일로 변형된다. 페루 세비체는 국물을 떠먹을 수 있을 정도 라임주스가 풍부하게 나오는 것이 특징인 것에 반해 멕시코는 해산물 샐러드에 가까운 비주얼이었다. 전날 라임주스에 밤새 재워둔 새우는 먹음직스럽게 익고 채소 구석구석 상큼한 라임주스가 배어 있다.
이 세비체를 단독으로 먹어도 좋지만, 타코국이니, 또르띠야를 꺼내 세비체를 원하는 만큼 올리고 여기에 큼직한 아보카도를 넣은 후 싸 먹는다. 라임주스에 절여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시큼함은 온데간데없고 상큼한 야채와 오동통한 새우, 부드러운 아보카도 지방, 부드럽고 고소한 옥수수 또르띠야까지.
그때 먹은 세비체를 상상만 해도 파블로프의 개 마냥 침이 절로 고일 정도 세비체의 맛은 훌륭했다. 새우를 이렇게 많이 먹어도 될까? 란 걱정이 들었을 정도로 새우로 입을 가득 채워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마음껏 퍼먹어도 그릇은 바닥을 보이기는커녕, 새우와 야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시 비어있던 자리들을 메웠다. 새우와 또르띠야, 아보카도의 조합으로 4~5번 먹으니 금세 포만감이 들어 더 못 먹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푹푹 찌는 한국의 요즘 같은 날, 딱 먹기 좋았던 그날 다 먹지 못한 세비체가 유독 아른거린다.
브런치 여행맛집 꾸준한 픽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