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선 이미 탈브라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방탄소년단 RM의 영어 비법으로 미국 유명 시트콤 "프렌즈"가 언급될 정도로, 미국 시트콤 "프렌즈"는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미국 드라마로 공부하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드라마였다. 우리나라의 순풍 산부인과 시트콤 급의 오래된 드라마랄까.
단순 "오래됐다"란 이유 때문에 "촌스러울 거 같다"란 편견은 머릿 속에 자동으로 박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그 이유로 프렌즈가 영어 공부에 좋고, 또 그 자체가 너무나 재밌다는 것을 지겨울만큼 들었지만 그것을 볼 생각은 전혀 1도 없었다. 옛날에는 "미드"라는 개념 조차도 낯설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미드가 별로 없었으니 '프렌즈'가 유명했던게 아닌가. 지금 넷플릭스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독창적인 주제로, 세련되게 찍은 드라마가 얼마나 많은데 '프렌즈'를 찾는단 말인가.
딱 6개월전, 나와 주 1일 전화영어 하는 미국 친구가 "1화는 재미없을 수 있는데 좀 참고 보다보면 내 말을 이해할거야" 하고 간곡히 부탁하고, 그 외 친구도 "요즘도 가끔 심심하면 프렌즈 에피소드 봐" 라거나 혹은 어떤 친구는 "미국 넷플릭스에선 판권 계약 문제때문에 넷플릭스에서 사라졌어!! 난 정말 슬퍼!! 근데 너넨 볼 수 있는 거야? 부러워!" 라며 엄청나게 어필하길래 정말 우연히 넷플릭스 알고리즘에 뜨는 걸 재생해서 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분명 내가 고등학생 때 영어 공부하려고 억지로 본 그 프렌즈가 아닌 거 같았다. 살짝 4차원끼가 있는 피비의 유머에 "낄낄낄" 웃고 있었고 최애 캐릭터 "챈들러"의 그 특유 시니컬한 유머에 한밤 중에 혼자서 소리 내면서 빵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영어 실력이 늘어나면서 미국식 유머에 완전히 적응되어서 웃긴건지, 아니면 지금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 유머가 이해되기 시작한건지 솔직히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촌스러울 거 같다고 생각했던 프렌즈는 그 어느 드라마보다 말장난(?)과 엉뚱한 상황들이 많고 무엇보다 20분내외라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매일매일 자기 전에 1편씩 보기에 정말 좋았다. (혹시 나와 비슷하게 중고등학생때 프렌즈를 몇 번 보고 1도 재미를 못찾았던 사람들이라면, 지금 다시 한번 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내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들 들어는 봤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별로 없다는 "프렌즈"가 재밌었다 라는 것을 알리는 게 아니다. 어제 프렌즈 시즌 3 에피소드를 보는데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시트콤 속 엉뚱한 캐릭터로 유명한 피비 (4차원) 인데 그녀가 누가봐도 적나라하게 탈브라 상태에 옷을 입고 나온 것이다. 즉, 일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누드색이어서 아래의 유두 (젖꼭지)의 형태가 적나라게 드러나있었다. 우리나라의 시트콤이었다면 그것 자체가 에피소드가 되어서 아예 주제가 되었을 법한데 "프렌즈"에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였다. 그녀는 그저 친구들이 있는 카페에 들러서 오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공유하는 그런 평범한 장면이었다. 마치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그 장면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이는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에서 조금씩 불어온 페미니즘 및 탈브라(노브라) 운동을 연상시켰다. 고백하자면, 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렇게 티내고 다녀야 하는가" 의 생각을 가진 측이었다. 탈브라족을 존중하지만, 굳이 요란하게 드러낼 필요는 없다 라는 것. 물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Movement)는 기존 질서의 불편한 질서를 바꾸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요란스럽게 진행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흔히 스스로 '계몽'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치 않은 것에 익숙하게 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겐 그러한 운동이 불편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가 길에서 한국인과 같이 있는 외국인을 볼 때 별다른 의도 없이 시선이 그 곳이 가는 것 처럼 말이다. 이젠 우린 대놓고 "외국인이닷" 하고 손가락질을 하진 않는다. 그것이 자칫 무례한 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우리는 지금은 외국인에게 눈길이 가더라도 별 생각없이 지나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탈브라" 운동 역시 마찬가지라 본다. 지금은 익숙하지 않다. 같은 여성으로서 브라에서 탈출하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안다. 대부분 여성들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브라끈을 풀고 헐렁한 옷을 입지 않는가. 다만, 그러한 행위는 나만 있는 사적인 공간에서만 행해져왔기 때문에 공공의 장소에서 보이면 시선이 갈 수 밖에 없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가슴'을 성적인 것으로 여겨왔던 남성의 시선엔 더욱 그렇다. (물론 그러한 것을 신경쓰지 않고 우리의 편안함을 위해 하자는 것이 탈브라 운동의 포인트이지만) 즉, '탈브라'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전까지 발생하는 노이즈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탈브라를 지지하건 안하건 간에 25년도 더 된 미국 드라마에서 '탈브라'를 한 주인공 여성이 아무렇지 않게 나와 '탈브라'와 전혀 관계 없는 이야기를 하며 그것에 대해 개의치 않는 그녀의 친구들의 모습은 놀라웠다. 우리 사회에선 꽤 최근 개념으로 대두되는 "페미니즘" 및 "탈브라"가 25년도 더 된 미국 시트콤에선 이미 아무것도 아닌, 그냥 일상으로 비춰지었기 때문이다. 물론 페미니즘의 역사가 근대유럽부터 시작해 미국의 68세대까지 훨씬 이전에 서구에서 시작된 것은 알고있다. 하지만 흔히들 '페미니즘 관련 역사'하면 '여성의 참정권' 및 '불평등'을 떠올리지, 탈브라를 떠올리진 않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탈브라는 꽤 최신의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2000년대 후반대에 들어서야 나타난 개념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온지 25년도 더 된 <프렌즈>에 피비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노브라를 티내며 자신이 할 얘기를 카페에서 하는 걸 보고 놀란 거 같다. 물론 피비가 극 중에서 살짝 '4차원' 캐릭터인 것을 감안해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다. 다른 친구들도 "I don't care" 마인드이지만 피비는 거기서 더 한발짝 나간 그런 캐릭터이다. 속된 말로 "개썅마이웨이" 를 걷는 캐릭터랄까.
내가 외국인들이랑 한국인 성향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하나 있다. "self conscious" 인데 사전적 정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이다. 흔히 말해 우리는 '눈치가 빠른 것'이 미덕인 나라이고, 체면 문화가 조선 시대 부터 자리 잡았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만 남의 시선이 두려워서 못하는 것이 많다. 이것은 비단 노브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화장하는 것이 예의와 미덕으로 여겨지고, 좋은 몸매를 위해 본인의 욕구를 포기할 것을 끊임없이 종용하는 것. 혹은, 남들의 시선이 의식되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억누른 채 현상 유지를 하는 경우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우린 언제까지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할까. 그리고 우린 언제까지 '나와 다름'을 아무 생각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러한 측면에서 "피비"는 시대를 초월한 캐릭터가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녀의 한 차원 높은 하이개그들은 종종 "대놓고 직설을 시원하게 못하고 에둘러 말하는 사람들"을 풍자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사회 속 '위선자(hypocrite)' 에 가장 대치되는 캐릭터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피비가 지금 이 시기에 있었다면 가장 빛을 발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단순 아웃사이더로 치부되는 사차원 캐릭터가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