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불로 질러버린 세계여행 @영국
“너는 주부다, 이거지. 그런데……. 남편은 어디 있어?”
첫 여행지에서 들은 뒤에도 여행 내내 지겹도록 따라다녔던 질문. 기혼 남성이 혼자 여행을 다닐 때도 이런 질문 세례를 받을까. 회사를 그만두고 밤새워 계획한 뒤에 떠날 수 있었던 세계일주. 무수히 많은 시간을 고민하며 내린 결정은 한두 마디 질문으로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입국심사관은 직업란에
‘Housewife’라고 적은
내 입국신고서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결혼했어?”
“남편은?”
나는 처음 만난 불편함 앞에서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남편은 일 때문에 늦어. 우리는 독일에서 만나기로 했어.”
독일로 나가는 티켓을 보여주며 말하자, 요리조리 여권을 펄럭이며 살펴보던 입국심사관이 마침내 도장을 찍는다. 나는 그렇게 여행의 첫발을 디뎠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도착한 숙소에서 식사와 물을 주문했다. 그런데 종업원의 착오로 화이트 와인이 왔다.
아, 진짜……. 술을 주면 난 그저 마셔야지.
나를 이해해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스스로 격려하는 마음으로 축배를 들었다.
런던의 첫인상은 어딘가 모르게 불쾌함. 관광객들로 붐비는 도시가 못마땅한 것마냥 현지인들은 불친절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항의하니 직원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소리친다.
“나와! 나온다고!”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교육을 받고 자란 나에게 영국식 영어는 낯설었다. 우중충한 날씨 덕분에 DSLR 카메라로 찍어도 그럴듯한 풍경이 나오지 않았다. 음식은 비싸기만 하고 묘하게 거슬리는 향 때문에 몇 입 삼키지도 못했다. 한 마디로 최악. 영국은 여행하기에 그리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다만 첫 여행지였기 때문에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금세 기진맥진해서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익숙한 냄새가 스쳐 지나간다. 담배 냄새. 대학생이 됐을 때, 결심한 게 하나 있다. 담배를 꼭 피워보겠다는 것. 학창 시절 가출 한 번 못한 모범생의 소심한 일탈 결심이랄까. 맛은 잘 몰랐다. 그저 내가 어른이 된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서 술을 잔뜩 마셨을 때, 한두 번씩 내 입에서 담배 연기가 나가는 꼴을 구경하곤 했다.
그날도 친구들과 술을 왕창 마시고 길거리 한쪽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 혼자 여자였다. 서른 살 남짓한 남자가 지나가며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한 마디 던졌다.
“어디서 재수 없게 길거리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지×이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렸고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내 친구들과 그 남자의 일행들이 엉켜 서로 말리고 서로 사과하고 끝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옆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던 친구들은 나를 타박했다.
그냥 네가 좀 참지.
누나 또 사고 쳤어요?
너 정말 왜 그래?
내가 받은 부당한 대우를 위로해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게 서러워 집에 가며 엉엉 울었다. 그 자식이 나한테 먼저 시비 걸었는데! 그러나 또 다시 그런 일을 겪을 용기는 없어서 그 후로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애초에 담배는 내게 중독이 아니라 그저 유희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이 가득했다. 담배를 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가게에서 담배를 한 갑 구매하는 단계까지는 성공했으나 라이터를 사는 것을 깜빡 잊었다. 머쓱하게 서 있자 옆에 있던 흑인 여자가 다가와서 라이터를 빌려주었다.
'이게 바로 자유의 맛이지.'
담배를 몇 모금 피우자 어지럽고 기침이 나온다.
그래도 좋았다.
이제야 해방감을 느낀다.
슬슬 런던이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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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 예고편]
#03 저 남자는 아직 말을 끝맺지 않았다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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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혼자 떠나도 괜찮을까?] by 황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