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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가람 Jul 06. 2018

일시불로 질러버린 세계여행

프롤로그



다이어트를 하려고 십오 킬로그램을 감량한 친구에게 팁을 물어보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너는 안 돼.”


“왜?”


“변하는 거, 못하잖아.”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대학교 일학년 첫 시험 기간, 대학생의 미덕은 학사 경고에 있는 게 아니냐며 동기들과 술만 퍼마시고 놀았다. 나는 앞장서서 소리쳤다.


“학창 시절 성적에 벌벌 떨던 모범생의 삶을 불태워버리자!”


그러나 막상 시험 전날이 되니 덜컥 걱정이 앞섰다. 밤새도록 공부해서 간신히 학사 경고는 면했으나 부끄러웠다. 사람이 한번 마음을 먹었으면 응당 학사 경고를 먹어야지. 지레 겁먹고 밤새우는 꼴이라니. 시험이 끝나고 촌티를 벗으려 고민하다 겨우 떠올린 게 클럽을 다니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는 언니가 간다기에 졸졸 따라갔다. 멋지게 몸을 흔들고 싶었으나 손발이 따로 놀았다.


“언니 어떡해야 해요?”


언니가 혀 꼬인 목소리로 답했다.


“여기서능,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안눈 사람이 젤루 멋쨍이야!”


아, 애석하게도 나는 남의 눈이 신경 쓰였다. 클럽 다니는 일을 그만두었다.



나에게 변화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한 번에 오케이 된 기획서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또 매번 내기만 하면 퇴짜 맞는 보고서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승인만 받으면 두 경우 모두 성공 신화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하나는 승승장구 인생으로, 또 하나는 역전의 명수로. 그런데 내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재미없는 오르막길이었다. 그저 적령기를 놓치지 않으려 아등바등했다. 대학 가라는 시기에 대학에 진학했고, 취업할 시기에 회사에 입사했다. 결혼할 시기가 왔을 때 식을 올렸다. 그 나이에 주어진 ‘숙제’만이 목표였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으레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렇게 이어 가던 내 일상이 한순간 깨졌다. 친정의 사업 실패. 불경기로 인해 투자금을 한 푼도 건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는 모든 힘을 다해 친정을 도왔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애초에 그 일은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직장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친정의 상황은 간신히 수습됐다. 하지만 그와 함께 나에겐 ‘시큰둥’ 병이 찾아왔다. ‘열심히 살아도 한순간에 모든 게 날아가버리는군.’ ‘그렇다면 인생에서 남는 건 무엇이지.’ 따위의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나는 그저 열심히 돈을 벌고 계획을 세우기에 바빴다. 맛있는 것을먹고 자동차를 사고 적금 들어 집도 사고……. 그러나 이제는 시큰둥했다. 한 끼 식사로 코스 요리를 먹든, 누구나 슬쩍 돌아볼 만한 비싼 차를 끌고 다니든, 내 소유의 커다란 집이 생기든. 그까짓 게 뭐라고. 앞으로 어떤 ‘숙제’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다 시큰둥할 뿐.


이번에는 정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뒀다. 대신 서점으로 출퇴근했다. 한동안 책 한 권 못 읽던 일상을 보상받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우연히 세계일주 여행기를 모아 놓은 코너와 마주쳤다. 나도 세계일주가 꿈이었지……. 서점이 문 닫을 때까지 여행기를 읽었다. 여행자들은 용감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결정을 오롯이 책임졌다. 지금까지내 삶은 어딘가에 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학교, 가정, 직장이라는 울타리. 그것을 벗어나면 나는 어떤 모습이 될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 여행자들의 루트를 따라 함께 이동하다 보니 어느 순간인가 나는 여행 경비를 계산하고 있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천하무적’이라는 퇴직금을 지닌 백수가 아닌가! 그래서 질러봤다.


“나 세계일주 가고 싶어.”


남편은 순간 혼미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그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했다. 다만 여행지에서의 안전이 문제였다. 간만에 들어왔던 생기가 빠져나가려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났을까? 남편이 다시 말을 꺼냈다. 최대한 안전하게 계획을 세워보라고, 조금이라도 허술하면 동의해줄 수 없다고. 그뒤로는 속전속결이었다. 내가 이렇게 추진력 있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닥치는 대로 여행 정보를 수집했다. 수십 번 계획을 세우고 수정을 반복하며 밤을 새웠다. 남편에게 여행 계획을 공유하는 날, 마치 첫 발표를 앞둔 신입 사원처럼 덜덜 떨기까지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가 짠 여행 계획은 완벽하지 않았다. 남편의 마음에 든 것도 아니었을 테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느꼈다. 이 여행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향을 미약하게나마 바꾸는 순간이 될 것을. 그리고 절대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인생의 즐거움을 번번이 할부로 누렸다.


좋아하는 책은 하루에 다 읽기 싫어서 읽었던 페이지를 반복해서 보았다. 가장 사고 싶은 가방은 ‘나중에, 나중에’를 외치다 유행이 지났다.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했다. 그래, 나도 한번쯤 질러봐야지. 마지막까지 맴돌던 죄책감마저 비웠다. 그리고 곧바로 퇴직금을 몽땅 털어 세계일주 티켓을 끊었다.


난생처음, 일시불로.






“당장 취소하는 게 좋을 거야. 도피도 습관이 되거든.”


“너 내일 모레 서른이야. 돌아와서 직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정신 차려. 남편은 혼자 자유를 만끽할 걸?”


“정말 이기적이다.”


대부분 내 선택을 응원해주었지만 가끔 비난의 목소리도 들렸다. 나는우유부단한 사람이다. 토론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이쪽 말도 저쪽 말도 옳은 것 같았다. 비난을 받을 때도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지만 놀랍도록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도피가 습관이 되든, 내가 백수가 되든 무슨 상관인가. 내가 이기적인 사람처럼 보이는 게 뭐 어떤가.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은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더이상 그런 것들은 신경 쓰지 않겠다. 이제 나는 여행자가 될 몸이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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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 예고편] 

#02 이게 바로 자유의 맛이지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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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혼자 떠나도 괜찮을까?] by 황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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