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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가람 Jul 20. 2018

저 남자는 아직 말을 끝맺지 않았다

일시불로 질러버린 세계여행 @영국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완벽한 빅벤(Big Ben)!


나는 템스(Thames)강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아 하염없이 빅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풍경이 아름다웠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카메라 셔터 소리마저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았다. 날씨는 또 어떻고! 샤워를 막 하고 나와서 아직 젖어 있던 머리카락을 강바람이 말려 주었다. ‘이제 외국인이 나에게 말만 걸어 주면 여행자로서 완벽한 하루가 완성되는 건데’ 생각하던 그 순간.


포르투갈에서 왔다는 한 남자가 내게 길을 물어 보았다. 여행자라기보다는 인도의 수행자 같은 몰골이었다. 그의 복장은 색 맞춤 따위는 무시했고, 수염 역시 자유분방하게 자라 있었다. 그는 내 지도를 보며 본인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러더니 나에게로 시선을 옮긴 뒤, 갑자기 말을 건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네 눈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세상에서 본 눈 중에서 가장…….”


위 대화를 읽고 ‘본인 자랑을 하려나 보군’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부류다. 급한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저 남자는 아직 말을 끝맺지 않았다.


테니스를 배워 볼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산뜻한 테니스복을 입고 샤라포바처럼 머리를 흩날리며 공을 주고받으면 기분도 상쾌하고, 살도 빠질 것 같고, 무엇보다 SNS에 올릴 간지도 날 것 같았다. 의욕은 또 충만해서 새벽 6시 수업으로 등록했다. 꽤 열심히 다녔다. 공도 잘 맞혔다. 그러나 선생님은 자꾸만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선생님이 지적한 나의 문제점은 성격이 너무 급하다는 것이었다. 공을 보고 뛰어오는 감각은 좋은데 공을 너무 일찍 맞혀버려 테니스를 야구로 만들어 버린다고. 자꾸만 테니스 공을 울타리 너머로 던져 버리는 나에게 선생님은 화를 냈다.


“공을 달걀이라고 생각하라니까! 그렇게 치면 깨져 버린다니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급한 성격에 문제의식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저 운동신경의 문제로만 치부했다.


첫 사회생활을 세일즈마케팅 부서에서 시작했다. 세일즈면 세일즈고 마케팅이면 마케팅이지 세일즈마케팅은 또 뭐람. 내가 일하게 된 곳은 이름 그대로 세일즈와 마케팅을 모두 하는 곳이었다. 오전에는 돌아다니며 영업을 뛰었고 오후에는 제안서를 작성했으며 저녁에는 술을 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들처럼 나도 반짝반짝했다. (물론 아무도 나에게 반짝인다고 말해주지 않았지만.) 제안서를 작성할 짬밥은 아니었기에 주로 미팅을 하러 다녔는데 인상이 좋다고 칭찬을 많이 들었다. 한번은 거래처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했더니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이쯤 되니 급한 성격이 자만을 키워 놓기 시작했다. 회사 사람들과 야외 카페에서 음료를 시키는데 홍차 라테가 있기에 ‘한번 먹어 봐야지’ 혼잣말을 하고 주문했다. 그런데 남자 종업원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고객님, 달콤하세요.”


내가 잘못 들었나? 다시 한 번 물어 보았다.


“방금 뭐라고 그러셨죠?”


“고객님, 달콤하시다고요.”


‘와하하하’ 웃으며 “어머 제가요? 감사합니다” 하는데 그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가 주어를 넣어 다시 말했다.


“고객님, 홍차 라테가 달콤하시다고요.”


그 후로 나의 급한 성격은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다. 끝까지 들은 후에 1초 정도 더 생각해 보고 대답하는 습관이 생겼다. 포르투갈에서 왔다는 남자가 말을 걸어올 때도 이를 잊지 않았다. 물론 처음으로 외국인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라 어떤 말을 할지 설렜다. 그러나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었다.


“네 눈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세상에서 본 눈 중에서 가장 작아.”


홍차 라테의 교훈은 역시 옳았다.



아름답나? 신비롭나? 동양의 미? ⓒ황가람 [혼자 떠나도 괜찮을까?] 중에서







나는 쉽게 억울해진다. 깜박이는 신호등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신호가 오래도록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건너는 사람들의 꼬리를 용감하게 좇아 함께 건너면, 웬걸 신호가 금세 바뀌어 대기하던 차들의 경적 세례를 독차지한다.
옷 가게에 가면 지나가던 손님이 꼭 내 앞에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 는 옷들을 우르르 흘리고 지나간다. 차마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흐트러진 옷가지를 개고 있으면 점원이 와서 한마디 한다.


“아휴, 방금 전에 정리한 옷인데.”


그럼 마치 내가 옷들을 흘린 사람처럼 진땀을 빼며 옷가지를 개어 놓고(정작 옷 구경은 하지도 못한 채)빠져나온다. 어릴 때도 늘 그랬다. 동생과 나는 ‘누가 많이 어지르나’ 대회에 참가한 것마냥 번갈아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곤 했는데, 꼭 내가 더 어지른 날엔 부모님 심기가 이미 불편해 있다. 이런 날 동생은 뻔뻔해지고 나는 진땀을 뺀다. 엄마가 “저 청소기 누가 저렇게 부러뜨려 놓았어?” 물어보면 동생은 “누나가요!” 아주 당당히 외친다. 그런 날에는 부러진 청소기 몸체로 먼지 날리게 맞았다.


나는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매기는커녕, 갓을 벗어두고 지나갈 정도로 매사에 조심했다. 모국어를 쓰는 내 나라에서도 나에게는 억울한 일들이 벌어지곤 했는데, 모든 게 낯선 타국에서는 오죽할까.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했으며 내가 머물던 자리도 깨끗하게 정리했다. 지나갈 때 남을 치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커다란 몸을 최대한 구겨서 다녔다.


유럽은 공중화장실에서 돈을 받는다. 돈을 받으면 깨끗하게 운영될 것 같지만 이는 착각이다. 곳곳에 변기가 막혀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변기 옆 휴지통에 화장지를 버리는 시스템이 불결하다고 바뀌어야 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변기가 막혀 있는 꼴을 보면 그 생각이 싹 가실 것이다.


그날도 런던의 길거리를 돌다가 신호가 왔다. 화장실 입구에서 삼유로를 내고 그 비싼 화장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칸마다 모두 문이 닫혀 있었는데 빈 칸이 하나 보였다. 얼른 들어와서 보니 변기 뚜껑이 내려져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뚜껑을 올렸다. 변기는 막혀 참혹한 현장이었다.


방심했다. 화장실이 급해 내가 ‘쉽게 억울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순간 잊었다.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면 내가 변기를 막히게 만들었다고 누명을 쓸 것 같았다. 문틈을 통해 바깥 상황을 보니, 사람들은 이미 이 칸 뒤로 줄을 서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물을 내렸다.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변기 물이 흘러넘쳤다.

사람들은 발밑으로 지나는 
구정물을 향해
각자의 자국어로
놀람과 혐오감을 표했다. 



언어는 달라도 일차원적인 감정 표현은 쉽게 통역이 가능했다. 결국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입구에서 동전을 받던 관리인이 수리공을 데려왔다. 수리공은 이까짓 변기의 상황은 쉽게 제압할 만큼 두꺼운 팔 근육을 지니고 있었다. 그 근육을 보자마자 안심하여 변기 옆에 서서 무언가 말하려는 나를 그가 홱 밀친다. 당황했지만 다시 시도했다. 그 변기는 내가 만든 결과물이 아니며, 내가 한 짓이라고는 오직 변기의 손잡이를 누른 일뿐이라고 짧은 영어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알아들으려 하지 않고 아시아인을 모독하는 게 분명한 의성어를 내뱉는 데 힘을 쏟았다. 역시나 나는 이번에도 쉽게 억울해졌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프로 누명러’로서 그런 이들에게 맞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갈색 눈동자를 지녀서 고집 세 보이는, 치열이 고르지 않아 다혈질인, 열심히 키운 근육을 고작 야동이나 클릭하는 데 쓸 영국인 자식아!”



색안경이 많아질수록 제대로 보이는 건 줄어들죠 ⓒ황가람 [혼자 떠나도 괜찮을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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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예고편]

#04 아, 기혼과 비혼의 간극이란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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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혼자 떠나도 괜찮을까?] by 황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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