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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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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May 15. 2020

연희동 그 할아버지

 5,18에 즈음하여

아저씨 이 길은 왜 막아놨어요?

연희동 우리 동네에서도 고급 주택이 많은 골목. 그 골목에서도 유난히 돋보이는 청기와집 앞에서 아이들이 멈추어 섰다. 사복입고 경비초소 앞에 서있던 전경 아저씨가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이 길은 외부인들이 통행할 수 없음을 알린다.

대부분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라서 청기와 집 앞 부근은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성역과도 같은 곳이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짐짓 모른 척 엄한 길을 막고 있는 전경 아저씨에게 의미 없는 항의를 하고 있다. 


1980년,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난 날, 사실 우리는 그 소식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첫아이를 임신한 딸의 해산달이 다가오자  친정어머니는 새로 태어날 갓난아이의 이불과 기저귀를 준비해주느라 서울 우리 집으로 오셨다.

며칠 후. 친정집으로 돌아가시는 어머니를 배웅하기 위해 용산역으로 나갔나는 그곳에서 전라도로 가는 모든 열차의 운행이 금지되었다는 걸 알았다.


''이게 무슨 난리라냐 호남선 전라선이 둘 다 꽉 막혔어야''


6.25 전쟁을 경험하신 어머니는 난리에 대해서 너무나 민감하셨다. 왜 경부선기차는 그대로인데 전라도 기차만 끊겼는지... 한강 다리가 끊겨 고향을 가지 못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안절부절못하셨다.

 안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다. 전라도 광주에 북한 간첩들이 침투했다더라, 광주에서 데모가 일어났다더라 우리 군인들이 내려갔다더라..., 등 죽어도 집에 가서 죽겠다는 어머니가 어떻게 전주까지 가셨는지. 그 후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고향 가는 길은 두고두고 무용담이 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광주의 상황은 언론보다 소문을 듣고 더 자세히 알았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고향집으로 내려 간 어머니는 광주에 사는 나의 외삼촌을 통해 다른 소문보다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전해 주셨다. 광주 이야기를 할 때면 곁에서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광주 큰일 났어야 사람이 죽고 경찰서 무기고가 털리고 아주머니들이 주먹밥을 해서 나르고...,


 여기까지는 후에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보고 들은 소식과 같다.


''군인들이 총을 쏘고 난리가 났단다. 총알이 여기저기 날아다녀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디야. ''

보지 않아도 그 말씀을 하실 때 어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 광주 망월동 묘역에 참배할 일이 있었다. 가을이었고 하늘은 무척 높았다. 전시관에 비치된  어린아이와 여학생, 임산부의 사진을 보고 가슴이 답답했다. 슬픈데 눈물이 나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

그때 문득 바라본 하늘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칼날처럼 시퍼런 한 맺힌 하늘빛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가정의 달인 오월에 끼어있는 5.18 민주항쟁 기념일은 마냥 즐거운 날들 중에서 잠시 숙연해지는 날이다.

각 학교에서는 오월 한 달 동안 많은 행사를 치른다. 특히  5.18 기념재단에서는 전국에 있는 학생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백일장 대회를 여는데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해마다 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아이들은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겪었던 억울한 고통이 한 지역 시민들의 분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전 국민의 공통된 마음이라는 글을 쓰는 동안 조금이라도 알게 될 것이고 나는 전국대회에 학생들을 입선시킨 유능한 선생이라는 프로필을 얻게 될 것이다.


이날은 백일장 준비를 위해서  5.18 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부터 그 결과까지 알려 주는 시간을 갖기로 다. 그리고 더욱 생생한 글을 쓰기 위해 이곳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살고 있는 자택을 찾은 것이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섞인  일곱 명의 학생들과 함께였다.


왜 우리 동네 길인데 못 가게 해요?

경찰이 지켜주고 있어요?

 길로 가면 벌금을 내나요?


네이버 지식인도 모르는 질문을 나에게 쏟아붓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면서 뒤늦게 울분하는 아이들이 어떤 눈으로 역사를 바라볼까 생각했다.


벌써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의 일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오늘 광주 법원에서는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했던 조비오 신부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죄목으로 전두환 씨를 송환했다. 이른 아침 연희동 자택을 나서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혔다.


보통의 할아버지였다.

세월은 누구나 평등하게 물들인다.


통장에 잔고가 29만 원 밖에 없으니 너희들 맘대로 하라던 막무가내,  돈 없으니 네가 대신 내주라고 했던 어처구니없는 노인네가 아니라 그냥 늙은 연희동 할아버지였다.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해가 갈수록 더욱 그날의 아픔이 청정한데 정작 그 사람은 저렇게 늙어버렸다.

참회할 시간마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오후에 법정에서 내내 졸다가 포명령을 내린 사람은 절대 자신이 아니라는 대답만 하고 돌아왔다는 기사를 읽었다.


세상이 주는 두 개의 기회가 있다

늙음, 모두 벗어버리고 내려놓을 나이. 내 영혼을 가볍게 하여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나이.

죽음, 모든 게 용서되는 것.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용서는 선물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기회는 세트로 묶여있기 때문에 모두 내려놓지 않은 이에게는 참다운 죽음의 기회도 잃게 된다


역사의 강물은 쉬지 않고 흐른다.

흘러간 역사 속에는 작은 거인도 있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도 있고 치욕을 못 이겨 울부짖던 도 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진실을 말할 용기조차 없어 그냥 늙어버린 사람을 역사는 어떤 평가할까,


강한 척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늙고 초라해져 버린 연희동 그 할아버지는 오늘도 높은 담장 안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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