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붉은 지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 김작가 Jan 21. 2022

나의 낡은 스케이트

김연아 선수가 피겨의 여왕이 되기 훨씬 이전에 한 소녀가 빙판 위를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잘 닦여진 실내링크가 아닌 여름에는 연꽃이 만개한 호수였다가 겨울이면 꽁꽁 얼어 노천 스케이트장으로 변하는 얼음판 위에서 나름 주변의 시선 좀 받아봤던 소녀, 비록 지금은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은 못 하겠지만 그 실력이 어디 가겠냐며 40년 동안 고이 간직해 두었던 녹슨 스케이트를 꺼내어 보며 의기양양하게 집을 나섰다.


방학을 한 외손녀와 함께 목동에 있는 실내 아이스링크장으로 갔다.  

이곳은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함께 자주 왔던 곳이다. 특히 무더운 여름날의 아이스링크장은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한 여름이지만 반팔 티셔츠로는 어림없는 낮은 온도에서 몇 바퀴  트랙을 돌고 나면 땀이 돋을 새도 없이 식혀주는 시원한 빙판의 맛. 멀리 계곡으로 피서를 가지 않아도 한여름 더위를 잊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스케이트장 입구에서 직원에게

''노인 우대되나요?''라고 물어보려는데 오늘따라 그 말이 무척이나 쑥스러웠다. 오래전, 아이들과 이곳으로 스케이팅을 하러 온 젊은 내 모습이 여기저기 추억으로 남아있는데 노인이라니....,

굳이 신분증을 확인해 보는 직원이 오히려 고마웠다.


                                                                               

남편에게 스케이트를 선물 받은 건 결혼하고 첫 번째 맞는 겨울이었다. 그동안은 내 것이 아닌 빌려서 타는 정도였다. 내 스케이트가 생기면서 신혼 첫 해의 겨울이 즐거웠다.

우리신혼살림을 꾸민 동네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넓은 논에 물을 가두어서 만든 간이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비록 찬바람을 고스란히 안고 타야 하는 노천 스케이트장이지만 한겨울 동안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는 그만한 게 없었다.

주말이 되면 남편과 함께 자주 그곳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가곤 하였다.


스케이트를 타는 것도 좋았지만 논두렁 옆에 설치한 비닐하우스에서 끓여주는 떡 볶이와 가락국수, 어묵 국물이 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즐겨먹던 어물 국물에서 비린맛이 돌더니 갑자기 비위가 상했다. 첫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이 시작한 줄도 모른 채 얼음판 위에서 엉덩방아를 찧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다.


언젠가 우리가 스케이트를 탔던 그 장소를 지나가다 보니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고층빌딩이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상업단지변하여 있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세월은 논밭이었던 들판의 모습만 바꾸어 놓은 게 아니라 인간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기세 좋게 스케이트를 신고 빙상장으로 나갔다. 링크 안에는 방학을 맞이해서 신이 난 꼬마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빙상장 밖에 서 있는 엄마들은 대견함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으잉?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럴 리가 없는데..., 몇 발짝 지치지 못하고 바에 기대어 쉬고 말았다.

은 그 옛날 기억을 찾아 움직이고 있는데 마음이 자꾸만 만류한다.

'안돼, 한 번만 엉덩방아를 찧는다면 넌 이제 고관절이 나가게 될 거야'

'저 어린아이들 하고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감시카메라처럼 지켜보고 있는 엄마들의 눈빛 안 보여?'

몇 바퀴를 신나게 트랙을 돌고 온 손녀가 나에게로 왔다.

''할머니 왜 스케이트 안 타세요?''

''응 쉬는 중..., ''


실은 손녀와 함께 이곳 실내 스케이트장에 오기로 약속할 때부터 나는 은근히 멋지게 스케이트를 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낡은 스케이트를 보여주자 손녀는 젊은 시절 할머니가 스케이트를 타고 날아다녔다는 황당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곧이듣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의 뒤를 따라서 겨우 트랙한 바퀴 돌고 난 뒤. 마음이 염려하는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벌써 스케이트를 벗으려고 하냐는 남편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넘어질 것 같아''


그동안 방치해 둔 스케이트는 남편이 열심히 갈아준 덕에 아직도 윤이 반질반질 난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해둔 내 스케이트 실력은 제 빛을 찾지 못했다.


혼자서 푸드 테리아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어묵을 시켜 먹었다. 어묵 역시 쌩쌩 찬바람이 부는 밖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음식도 때와 장소가 있는 것처럼 운동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썰렁한 푸드 코너 한편에서 식어가는 어묵 국물을 바라보며 한때 나를 즐겁게 해 주었던 스케이트와 단출한 이별식을 했다.

 

저 안에 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많이 아프신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