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게 병이다
장마 중이라 호우가 내렸다가 해가 떴다가 날씨가 변덕도 많다. 기운 빠지기 좋은 후덥지근한 날씨에 새벽부터 땀 흘리며 일하러 간 남편을 생각하면 집에 있기도 미안하다. 너무 더워 입맛이 없다니 뭘 먹어야 입맛이 날까. 국수를 좋아하니 영양 듬뿍 콩국수를 만들자. 검정콩을 삶아 콩 국물을 만들어 냉장 보관한다.
찰랑한 콩물에 돌돌 말아 올린 하얀 국수로 중심을 잡고 그 위에 빨강 노랑 초록 삼색고명과 청양 고추로 매콤함을 더하고 통깨 솔솔 뿌리면 없던 입맛도 살아나겠지. 쌈장에 땡글땡글한 청양 고추 푹 찍어 한입 더 곁들이면 매콤한 맛에 생기가 돌 것이다. 상큼한 배추겉절이에 깍두기까지 곁들이면 환상의 콩국수 한 상에 잠자든 입맛도 깨어날 것이다.
겨울에는 춥다는 핑계 여름에는 덥다는 이유로 호떡 뒤집기 하던 몸을 일으켜 오이 사러 마트 간다는 이유로 박스 쇼핑 카트를 끌고 ‘집을 나선다. 이 카트를 끌고 장 보러 가기는 처음이다. 접으니까 납작하고 부피는 작아서 끌고 가기는 간편하다. '덜덜덜'소리가 귀에 거슬리지만 바퀴 없으면 끌고 갈 이유가 없다.
오전 10시인데도 몇 분 가지 않아 땀이 줄줄 흐른다. 왼손은 장바구니 끌고 오른손은 양산을 들었다. 줄줄 흐르는 땀은 눈을 깜빡거리게 한다. 누가 시켰으면 심통이 날 텐데. 스스로 나선 길이라 뭐 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즐겁게 간다. 정말 푹푹 찌는 뜨거운 날씨에 땀에 절은 눈알은 따갑다.
마트에 들어서니 이곳이 바로 쇼핑천국이다. 입구부터 화려하게 진열된 상품들 보기만 해도 즐겁다. 누구 눈치 볼 것도 없고 혼자 다니니 여유로워 세상 좋다. 무엇보다 시원해서 더 좋다.
술 매대 앞에서 마음이 흔들린다. 땀 흘린 남편을 위해 시원한 맥주 한 잔 어때. 잠시 천사의 마음이 나를 흔든다. “누구 마누라는 소주를 박스로 사다 준다.” 더라며 심히 부러워하는데 살까 말까. 기진맥진한 환자에게 포카리스웨트를 권했던 의사 말을 생각한다. 기력 충전을 위해 맥주보다는 포카리스웨트 댓 병 두 개를 담는다. 해로운 건 말려도 스스로 알아서 잘 챙기니까.
한우를 살까 삼겹살을 살까. 민물 장어, 바다 장어, 생물 오징어, 새우, 낙지, 전복, 토종닭 앞에서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이 더위를 이길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보양식이라고 먹어도 아랫배 기운이 쫙 빠지는 증세는 뭘 먹어야 이 여름을 기운차게 보내게 될지. 그늘에서도 맥없이 늘어지는 이 헛헛함을.
막상 자율계산대 앞에 서니 버벅거린다. 바코드가 잘 먹히지 않는다. 한우 꽃등심, 생물 오징어, 닭강정, 바나나, 사과, 오이, 청양고추, 불가리스, 포카리스웨트 등 직원 도움을 받아 계산은 끝났다. 요즘은 마트도 너 알아서 하세요. 자율계산대만 많다. 직원이 계산해 주는 곳은 현금이나 상품권만 취급한다고 팻말이 붙었다.
계산대를 통과해 접어둔 쇼핑카트를 펼치는데 바닥깔개가 똑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아무리 초보의 손이지만 쫙 펴지지도 않고 들쭉날쭉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이리저리 맞춰도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어설프다. 그냥 꾹꾹 눌러 약간 비스듬해도 무게로 누르면 되겠지 생각했다. 대충 주워 담아서 마트를 나오고 한참을 가도 괜찮았다. ‘아, 이러면 되는 거구나.’ 이렇게 해도 되는 줄 알았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양산을 펴는 순간 보행자 신호가 들어온다. 빨리 가려고 급한 발걸음을 옮기며 ‘털커덕' 하는 순간 카트의 밑바닥은 뒤틀어지고 물건은 도로에 널브러졌다. ‘이 일을 어쩌나.’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런 꼴을 당하긴 처음이다. 따로 담을 장바구니도 없고 흔해 빠진 비닐봉지도 하나 없다. 그냥 끌어안고 갈 수도 없고 난감하네.
신호 대기 중인 차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간다. 신호 바뀌기 전에 빨리 치워야 하는데 민망하고 부끄럽다. 내가 왜 이 더운 날에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며 물건을 옮겼다. 허물어진 장바구니의 실체 앞에서 물건 더 많이 샀으면 어쩔 뻔했나. 이만하길 다행이다. 그 순간 할머니들 전용인 줄 알았던 바퀴 달린 천 장바구니가 부럽다. 바닥을 끼우고 조립할 필요도 없고 얼마나 야무지고 탄탄할까. 당장 하나 살까 하다가 에이 다시는 혼자 장 보러 가나 봐라.
다시 조립을 시도해도 역시 제대로 끼워지지 않는다. 이것 하나 제대로 딱딱 맞추지 못하는 내손과 눈은 지금까지 뭘 보고 뭐 했나. 남의 남편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볼 텐데 이럴 때는 사람도 귀하다. 햇볕은 뜨겁고 남 보기 부끄럽고 대충 맞춰 물건을 또 담았다. 네 번이나 건너야 하는 도로를 생각하니 잘 갈 수 있을까 아득하다. 신호 끝나기 전에 건너가야 할 텐데 도로는 왜 이렇게도 넓은지 도로 중간에서 신호가 바뀔까 봐 마음 조리며 걷는다. 도로에서 또 일이 벌어지면 대책 없는 낭패다.
카트 끌고 편하게 갔다 오려다 어려운 상전을 모시고 새색시 걸음을 걷는다. 어디에 걸리거나 충격을 받으면 큰일이다. 이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장거리 경주하듯 어렵게 간다. 아휴!
저녁이 되어 땀 흘리며 일하고 들어온 남편에게 애환이 깃든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 폼나게 대접하고 콩국수가 되기까지 고생한 과정을 늘어놓았다. 상황 설명을 하고 난 후 저 장바구니 단단하게 고치던가 당장 내버리라고 죄 없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다. 모서리가 약간 깨져서 헐렁하기는 했지만, 그곳이 문제가 아니라 바닥 까는 걸 엉터리로 대충 깔았던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요렇게 끼우면 되거든 봐 탄탄하지.” 요럴 때는 어지간이 자상한 남자네. 알고 보니 별것도 아닌데 나는 왜 잘 못했을까? 끼워도 안 되던데 연습을 해보고 갈 걸 그랬나. 깨진 모서리가 헐렁헐렁해서 잘 안 맞는다고 판단하고 대충 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펼쳐본 김에 갈라진 곳은 본드로 붙이고 확실하게 고쳐 놓았다. 무식이 용감했던 저력으로 또다시 시도해 봐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