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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Aug 02. 2024

허리가 부러졌다

부엌칼의 반란


얼마 전 내 짝꿍이 퇴출당했다. 도마 위에서 신나게 칼춤을 추더니 허리가 부러졌다. 그 후로 오직 나만 바라보는 언니의 시선과 손길이 무섭다.


왜 나만 아침 점심 저녁때마다 중노동을 시키는 거야. 늦잠도 자고 끼니걱정 없이 외출도 하고 멀리 여행도 다니고 싶단 말이야. 아침 준비를 하기 위해 오이지 두 개를 도마 위에 나란히 올리는 저 언니는 또 나를 찾겠지. 옆자리에 늘씬하게 늘어진 빵칼과 작지만 야무진 과도는 걱정 없이 여유를 즐긴다. 나는 왜 아침 일찍부터 언니의 눈치를 살피며 투덜거리고 있는가. 나와 함께 일하던 짝꿍이 사라진 후로는 오직 나만 찾는다.


도마 위에 놓인 오이지를 쓱쓱 잘 쓸어 가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허리가 삐끗한다. 끝을 향해 힘을 다하던 중 앞대가리를 쳐들고 ㄴ자로 벌떡 일어서 버렸다. 그 순간 언니는 깜짝 놀라 일어선 앞머리를 꾹 누른다. 뼈대에 문제가 생긴 허리는 두 동강이 났다. 언니는 손을 놓고 어이없다는 듯 내려다본다. 부러진 몸통을 잡고 손잡이에 끼워보지만 잘 될 리가 없다. 묵묵히 잘 나가던 너까지 왜 이러는 거니?


숨겨진 뼈대가 이렇게 약할 줄 몰랐다며 언니는 재기능을 할 수 없는 나를 보며 한숨을 푹 쉰다. 가장 중요한 허리가 부러졌으니 아무 쓸모없는 폐기물이 되었다. 요새 것들은 때깔은 좋은데 왜 이렇게 약한지 쌍쌍으로 허리가 부러지다니… 신식 칼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우직해도 뚝심 있었던 무쇠칼을 생각한다. 무쇠칼은 이가 나가서 못쓰는 일은 있어도 허망하게 허리가 뚝 부러지지는 않았다.


회생할 수 없는 나의 마지막을 본 언니는 아이고, 이제 부엌에서 해방되라고 칼도 반란을 일으키네 이제 퇴장해야 되겠다.

“왜 무슨 일인데? “

부엌칼이 지난번처럼 허리가 부러져서 힘을 못쓰네 이제 부엌댁이 해방인가 봐

“그럼 칼을 새로 사면되지”

칼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부엌살이 이제 끝내야지 주방언니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러면 부엌댁을 바꾸라는 건가 부엌댁을 새로 구해야겠네.”

그 방법도 좋고 요즘은 남자 요리사가 더 많거든 남자로 바꾸라는 예고인가 봐.


마지막 힘이었던 너마저 죽어버렸으니 어쩌지. 무쇠칼을 추억하다가 괜히 심통이 난 언니는 도루코 면도칼에게 시비를 건다. 너는 왜 덜 자란 검은 수염만 절단 내는 거야. 네가 축축한 도마 위에서 한번 놀아 볼래? 아니 아니요. 도루코 부엌칼이란 거대한 칼, 그를 데려와 맘껏 쓰세요. 도루코 면도칼은 눈치 빠르게 순간을 피해 간다.


칼이면 다 칼인 줄 알았더니. 대장간 장인이 만든 무쇠 부엌칼이 비싼 이유가 있었다. 평생가도 허리가 짱짱한 무쇠 부엌칼을 그리워하며 조심스럽게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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