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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Jul 19. 2024

427과 724

무더위에 지친 하루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햇살도 마주하기 힘들어 헉헉거리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 끝에서 무더위에 얼굴이 익은 건지 낮술 한 사발 드셨는지 얼굴이 홍당무가 된 중년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괜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시빗거리가 될까 봐 다른 곳을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렸다.


어느새 가까이 온 아저씨는 “아줌마, 동전 한 닢 줘요.” 한다. 돌아본 순간 줄줄 흐르는 땀과 텁텁한 술 냄새까지 소주를 마신 건지 막걸리를 마신건지. 아휴 역한 냄새 마주 보기도 불편하건만 맡겨둔 것 달라는 듯 너무도 당당한 말투였다. 그러나  한 닢 ‘줘’로 끝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집에 연락해야 하는데 전화할 돈이 없다."라고 불쌍한 척을 한다. 속으론 또 술 사 먹고 싶은 것 아닐까 의심스럽지만 지갑에서 동전을 찾았다. 현금을 잘 쓰지 않아 귀한 동전이지만 마침 삼백 원이 있었다


 그 남자는 동전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몇 발자국 옮긴 후 가만히 서 있었다. 전화하러 언제 가나 지켜봐도 가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연 하늘색 공중전화부스가 있었지만 끝내 전화는 하지 않았다. 집에 전화한다던 말도 헛말이었다. 그 아저씨는 버스가 오자 휙 가 버린다. 아니 뭐지. 어디에 한방 띵 부딪친 듯한 묘한 이 기분.


잠시 후 시내버스 한 대가 정류장으로 들어온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427이다. 버스가 정차하자 얼른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달리고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세찬 바람은 휙휙 귀싸대기를 때린다. 머리카락 휘날리며 시원함을 즐기는 사이 벌써 삼거리까지 왔다. 아, 금방 집에 도착하겠구나 그러는데 삼거리에서 버스가 좌회전을 한다. 아니 왜?


우리 집은 우측방향이고 427은 분명 오른쪽으로 가는데 이 버스는 좌측으로 간다. 왜 이러지 참 이상하다. 왼쪽으로 달리는 버스가 이상했지만 무슨 일인가 하는 사이 금방 한 정류장을 가버린다. 또 달리고 달린다. 날씨가 너무 더우니 별일도 다 있다 버스기사가 정신 나갔나 왜 이러지.


두 정류장쯤 갔을 때 버스 벽에 붙은 버스노선 안내를 봤다. 이럴 수가, 분명히 427을 탔는데 “724번 버스노선 안내”라니. 아니 미쳤어. 버스가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가. 그때까지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벌건 대낮에 허깨비한테 홀린 기분이었다. 술 취한 아저씨한테 뒤통수 맞은 느낌에 버스까지. 분명히 눈으로 보고 탔는데 왜 이런 일이 오늘은 뭐에 홀린듯한 날이다.


‘아저씨 427번이 왜 이렇게 가요. 오늘부터 노선이 바뀌었어요?'라고 묻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공개적으로 창피는 당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지만 넋 놓고 종점까지 갈 수는 없으니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일단은 창고형 마트 앞에서 내리기로 한다.


시원한 곳에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터덜터덜 마트 안으로 들어가며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조기치매 치매전조증상인가. 제일 무서워 피하고 싶은 치매가 떠오른다. 아니겠지 그늘 없는 뜨거운 햇살아래서 헉헉거리다 급한 마음에 724를 427로 거꾸로 읽었겠지. 거꾸로 읽으나 바로 읽으나 “우영우” 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깨져버린 판이니 내친김에 아이쇼핑도 하고 반찬거리와 시원한 수박도 한 덩이 샀다. 양손 무겁게 들고 낑낑거리며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환승입니다.” 버스요금 안 받겠다는 만인의 미스김 목소리가 반갑다. 차비 안 내고 공짜로 간다는 게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버스 환승제도 누가 만들었는지 은근히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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