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순이
고양이는 무섭다. 까만색은 더 싫다. 그런 내게 까만 고양이가 나타났다. 대문 아래 틈새로 얼굴을 내밀던 그때는 네가 새까만 고양이라는 걸 몰랐다. 나를 향해 달려오던 쥐새끼 같이 작고 까만 요크셔테리아에 놀란 후로 나는 까만색 동물은 다 무섭고 싫다. 고양이든 강아지든 쥐새끼든.
눈알을 굴리며 사방을 살피던 너는 뽀시락 소리에도 깜짝 놀라 달아났었지. 몇 차례 경계하면서도 한발 한발 대문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제는 내 집인 양 주인행세하는구나. 새끼까지 줄줄이 데리고 들어오는 너의 당당함이 부담스럽다. 나는 먹이를 주고 너는 받아먹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는 그때 그 자리. 뭐가 불만인지 한치의 곁도 내주지 않는 까칠한 너를 만난 지 벌써 이 년째.
새끼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배가 불러지고 있는 너를 보며 암컷의 비애를 느낀다. 무거운 몸으로 먹이를 찾아다니다 허탕치고 돌아서도 너는 당연하다 이것이 야생이다 할지 모르지만. 씨만 찍 뿌리고 모른척하는 수컷 그놈이 얄밉다. 무책임한 녀석 같으니라니.
무방비 상태인 야생에서 누굴 탓하며 누구에게 보호받길 바라겠니 깜순아. 너의 생애가 다하는 그날까지 먹이 찾아다니고 새끼 낳아 기르는 그 생활이 계속되겠지. 가볍게 뛰어올랐던 담장을 반쯤 오르다 툭 떨어지는 무거운 너를 보니 마음이 짠하다.
새끼 낳고 또 낳고 배부른 몸으로 어떻게든 살아주는 너를 보며 생각한다. 어느 혈통을 타고나느냐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건 인간이나 동물이나 비슷하구나.
너도 좋은 품종 좋은 혈통으로 잘 태어났으면 수백만 원 비싼 몸값자랑하며 안방에서 집사를 부리며 살 텐데. 야생에서 나고 자란 너는 줄줄이 새끼 낳아 키우며 먹이 찾아다니느라 고생이구나. 쉴 여유도 없이 배는 불러지고 그런 너를 보니 애처롭다.
먼저 난 새끼는 어미보다 배가 더 부르다. 혼자 눈치 보며 드나들던 집에 이젠 배부른 새끼에 어린 새끼 들까지 뒤를 따른다. 철없는 새끼는 엄마 믿고 다리 쭉 뻗고 세상 편하게 널브러졌다. 그만큼 이 집이 익숙하다는 건가. 층층이 새끼를 몰고 다니는 넌 언제 배 불뚝이에서 벗어나 쉴 수 있으려나.
애처로워서 돼지두루치기 한 접시를 깜순이 밥그릇에 부어 주었다. 맛나게 먹은 깜순이는 새끼들에게 밥그릇을 내주었다. 남은 건 서로 나눠 먹었다. 짭짜리 한 그것 맛있다고 먹은 양이는 물을 얼마나 많이 먹게 될까. 그날로 배부른 깜순이는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염분을 많이 먹으면 수명이 단축된다. 야생은 더 그렇지.” 사실일까. 혹시 그럼 너는 어디?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