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울뻔한 이야기(27개월)
두 돌이 지나도록 엄마 아빠랑 떨어진 적이 없는데 2박 3일 동안 할머니와 지내야 한다. 처음으로 엄마아빠와 떨어져 있어야 하니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잘 있겠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비행기는 떠났다. 우리는 날아갈 날개도 없는데 조용히 잘 살아보자.
아침부터 먹고 놀고 자고 쉬고 별 짓 다 해가며 하루가 저물었다. 저녁밥까지 먹었으니 조용히 잠만 잘 자면 오늘 하루는 안녕이다. 이제 우리 양치하고 목욕할까? 좋다고 깡충깡충 욕실로 따라오는 아이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지금 이 시간까지 별문제 없이 잘 지냈으니 고마울 뿐이다.
목욕만 끝나면 코 잠잘 시간이다 야호. 목욕도 간단하게 하자. 샤워기 물 온도를 적당할 정도로 맞추었다. 자 이제 목욕하자. 옷을 홀랑 다 벗긴 아이 등에 샤워기 물을 뿌리자 아이가 기겁을 한다. 깜짝 놀라 샤워기 물을 잠그고 “으앙” 비명을 지르는 아이 등을 바라본 순간.
‘아이고 큰일 났구나 이일을 어쩌지, 어쩌지.
손녀 그 여린 등이 벌겋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금방 물집이라도 부풀어 오를 것 같은 비상사태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되지. 그 연한 피부가 화상을 입었다. 기절하겠다.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하나 당황스럽다. 아이를 끌어안고 응급실로 가야 하나 어쩌나 고민이 열두 바가지다.
뜨거움에 놀란 아이는 '앙앙앙앙' 죽겠다고 운다. 울어서 해결된다면 할머니도 목청 높여 더 크게 울어버리고 싶다. 아이고오. 애 잘 보고 이 무슨 꼴인가. 아이 본 공 없다더니 큰일만 냈다.
어른이라도 그 상황이면 깜짝 놀라 욕이라도 한방 내질렀을 것이다. 가끔 샤워기 물이 생각보다 뜨겁거나 차갑게 나와서 깜짝 놀랄 때가 있기는 한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깜짝 놀라 우는 아이와 가슴을 맞대어 끌어안고 안정시키는 동안 울음은 거쳤지만 빨갛게 익은 그 여린 등을 보니 너무 속상해서 할머니가 미쳐버릴 것 같다. 바보바보 바보, 할미가 바보다. 할미의 경험 부족으로 아이 고생만 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고 죄스러워 둘이 껴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목욕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아이만 바라보고 앉았다. 옷을 입힐 수도 없고 미안해서 눈을 맞출 수도 없다. 정말 물집이 볼록볼록 생긴다면 어쩌나 무조건 응급실로 갈 요량으로 아이 상태를 살피며 제발, 그 정도는 아니기를.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 등에 하얀 얼룩이 생긴다. 깜짝 놀라 빨갛게 울던 피부도 이제 조금씩 깨어나는 모양이다. 어찌나 고마운지 어디에서 금광을 발견한 것보다 더 반갑다. 아 다행이다. 응급실은 안 가도 되겠구나.
안도의 숨을 쉬며 지켜본다. 두 시간이 지나니 피부는 거의 본색으로 돌아왔다. 후유, 숨 한번 크게 쉬며 그만하길 다행이다. 죄 없는 일이었으니 그 정도 경고로 끝나는구나.
명심 명심 또 명심!
아이 목욕은 무조건 온도 맞춰 물을 받아 놓고 시키자. 실수하기 전에 미리 깨달았으면 이런 고생도 안 할 텐데. 간 떨어질뻔했다는 말이 딱 이럴 때를 두고 한말일까. 간이 콩알만 해져서 덜렁거릴 것도 없었다.
손녀를 조용히 잠재우고 나니 온몸의 힘이 쫙 빠지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기진맥진 쓰러질 것 같다. 이럴 땐 어떤 상노동보다도 아이 보는 일이 최고로 힘들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결합된 육아, 고생한 보람도 없이 죄인이 될 뻔했다.
우리는 앙앙 소리 지르며 바들바들 떨고 죽을 고생을 하며 겨우 되살아났지만, 비행기 타고 날아간 네 아빠 엄마는 이런 사정 저런 사정 아무것도 모르고 오랜만의 휴가를 잘 보내고 있겠지. 우리 이 일은 절대로 말하지 말자. 꼭꼭 약속해.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혼자 약속하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손녀는 아직도 말을 잘 못하기에 엄마 아빠에게 일러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잘한다면 할머니가 어쩌고 저쩌고 당한 그대로 다 말할 텐데. 이럴 때는 말 늦은 덕을 보는 것 같다. 할머니 입만 꼭 다물면 되니까. 하여간 오늘은 십년감수 한 날이다.
생고생했으니 밤새도록 한 번도 깨지 말고 푹 자거라. 덕분에 할머니도 기진 맥진한 상태로 죽은 듯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