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롯하게 May 17. 2017

우리들은 언제나 죽어가고 있음에도.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횡단보도에 섰다. 반대편에는 유치원생 혹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나이쯤으로 보이는 아이와 아이의 손을 붙잡은 엄마가 보였다. 아이는 자꾸만 장난을 친다. 신호등은 아직 붉은 색을 띄고 있고 도로 위로 차들이 겁 없이 지나다니는데에도 두려움 따위는 모르는 것 처럼, 본인이 차에 치였을때 일어나는 일들은 본인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위험한 차도로 자꾸만 발을 뻗는다. 그러면 옆에서 손을 붙들고 있던 아이의 엄마는 큰일이 난다며 가만히 있으라며 아이를 다그친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엄마의 손을 잡은채 계속해서 위험한 장난을 한다.




나이가 어린 아이일 때부터 삶과 죽음에 대해 알고 죽음을 피해 몸을 사리며 살아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나도 피곤하고 먹먹해질테니까.

차에 치인다면 그것도 낮지 않은 속력으로 달려오는 차에 치인다면 그 차가 급정거를 했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생사를 오가게 될 수 있다. 물론이다. 일단 차에 치이면 붕-하고 떠서 약 2m쯤 운이 나쁘다면 3-4m쯤은 날아가고 곧장 중력의 힘을 받아 자동차 바퀴들이 까맣게 태워놓은 딱딱하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차에 치인 충격만큼이나 거대한 충격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한다. 사지가 부러질지 모른다. 정말 운이 나쁘다면 머리나 척추도 손상될 것이다. 그러면 곧장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119와 경찰을 부르고 아스팔트에 던져진 몸의 주인은 당신의 몸에서 나온 피로 아스팔트를 물들이거나 자신의 몸 안쪽을 온통 피로 채우게 될 것이다. 만약 아스팔트에 던져진 그가 아이의 엄마였더라면 아이와 남편과 그녀의 부모의 남은 생이 아파질 것이고 만약 그가 작은 아이였더라면 그 작은 아이의 부모는 평생 아이를 가슴에 묻지도 안지도 못한채 공허하고 허무한 삶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그러니까 삶과 죽음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는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해본적도 겪어본적도 들어본적도 심지어는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기에 자꾸만 위험한 도로로 다리를 뻗는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나이가 어린 아이일 때부터 삶과 죽음에 대해 알고 죽음을 피해 몸을 사리며 살아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나도 피곤하고 먹먹해질테니까.




아이일때의 무모하고 순수한 시간들은 왜 주어지는 것일까.

자꾸만 장난을 치는 아이와 그의 손을 붙잡고 있는 아이의 엄마 뒤로 지나가는 한 여자가 보였다. 아주 평범함 여자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저 여자는 분명 자신이 차에 치이면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겠지. 상처가 작던 크던 자신이 다치거나 매우 아프다는 것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뿐일까.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을 하고, 심한 경우 큰 수술까지 받아야 한다면 그녀는 병원에 지불해야할 병원비와 입원비를 생각할거다. 보험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생각할 것이고 입원하고 수술을 받는동안 비워둬야할 자신이 속한 직장내 자신의 자리에 물음표를 던질 것이며 자신을 걱정할 부모님과 다른 가족들을 떠올릴 것이다. 아이였던 시간을 지나 학생을 지나 다시 한번 그렇게 시간이 점점 흐르고, 많은 일들을 겪어내고 지나고나면 하게되는 여러 생각들은 왜 이토록 시간이 지나야만 아는 것일까. 아이일때의 무모하고 순수한 시간들은 왜 주어지는 것일까.



다시 말하자면 죽음을 피해다니며 살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결국 죽지 않기위해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을 피해다니며 살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굶어죽지 않기위해 취업을 해야하는데 취업을 하기 위해서 해야하는 수 많은 것들로 살아있는 우리들의 시간을 채우고, 인류의 보존과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연애를 하는데 그게 또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생판 모르는 남과의 만남부터 시작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감정의 노동을 수 도 없이 벌여놓아야 한다. 내가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횡단보도의 작은 아이를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아이일때는 저토록 무모한 것일까. 어찌 저토록 모든 것들이 좋게만 보이는 것일까. 우리들은 언제나 죽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고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