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할아버지
어떤 슬픔은 뒤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한참을 찾아뵙지 못했던 할머니를, 설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요양원으로 찾아갔다. 유리벽 뒤 마스크를 쓴 손녀를 한참동안이나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를 보며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선 유리벽이 얄궂기만 했다.
가끔 어떤 친구들을 보면 '역시 할머니가 해준 음식이 최고다'라며 엄마가 해주신 음식은 그 맛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할머니와 매일같이 전화를 하며 친구같이 지낸다는 이도 있고, 할머니 냄새가 좋다며 유난히 힘든 날 밤이면 할머니 품에서 나는 냄새가 그립다는 이도 있엇다. 단 한번도 그 마음들에 공감해본것이 없었다. 한번도 그 마음들을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자라나며 할머니에 대해 들은 이야기들은 어려운 옛날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을 너무나도 엄하게 키워내셨다는것과 어린시절 일본에서 자라신 이유로 일본어를 잘 하신다는 것. 욕심이 많으셔서 외출이 잦지 않아도 늘 새 옷을 갖고싶어하시는 분이라는 것 정도다. 딱 그 정도였다. 어린시절 명절에 할머니댁에 가면 늘 '언제 밥먹고 내가 좋아하는 외가로 가나'하는 생각뿐이었고, 언제나 나보다는 오빠를 더 찾으시던 모습 뿐이었다. 그런 나의 할머니가 유리벽 뒤에서 너무나 오랜만에 찾아간 손녀를 알아보시는데에 한참이 걸리셨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반갑게 웃어주셨다. 연세가 많으심에도 그래도, 정말 건강해 보이셨다.
그렇게 할머니를 뵙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문득, 몇 해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지금에 와서야 떠올려보니, 몇 되지 않는 나의 어린시절 속 행복한 순간 속에는 외할아버지가 계셨다.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일년에 두어번 명절마다 찾아간 외가댁에서 할아버지의 방문을 연 순간들과, 그때의 설렘이 지금까지도 느껴지는것에 감사하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나를 보시는 순간들마다 늘 환하게 웃어주시며 당신의 온 사랑으로 나를 안아주셨다. 언제 가도 아직 어린 손녀처럼, 아기처럼 그렇게 반겨주셨다.
시간이 한참 지나, 할아버지가 주무시던중 침대에서 떨어져 골반뼈가 부러지셨고 검사도중 암이 발견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에도 생각보다 큰 슬픔이라던지 그런것들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속이 상하고, 그럼에도 곧 괜찮아지실 것 처럼 느껴졌다.
가족들과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뵈러 갔을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그렇게 예뻐하시던 손녀손자도 알아보질 못하셨고, 당신의 막내딸인 나의 엄마도 잘 알아보질 못하셨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일어나시지도 못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세상이 망한것 처럼, 사람이 가득한 시장 한 바닥에서 엄마의 손을 놓쳐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울었다. 얼마안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철없던 당신의 손녀는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던 연애의 행복에서 슬픔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런 외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뵙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문득 떠올라 가슴이 저려왔다. 슬펐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속에 늘, 그 자리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이제와 가슴이 저리도록 슬퍼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나의 외할아버지를 뒤늦게 슬퍼하는 어리석은 손녀를, 언젠가 만나게될 그날에도 함박 웃음으로 반겨주시겠지.
어떤 슬픔은 이처럼, 뒤늦게 찾아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