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휑했던 창문에 커튼을 달았다. 지난가을까지 창문에 걸려 있던 건 말이 커튼이지 구멍이 숭숭 난 레이스여서 햇빛을 가리거나 찬 기운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겨울이 다가오자 조금 더 제대로 된 것, 그러니까 적어도 구멍은 나지 않은 커튼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었다. 레이스는 걷어냈지만 당장 마땅한 걸 찾을 수 없어 그대로 겨울을 난 참이었다.
내가 지내는 방은 이층이고 창밖으로는 야트막한 산의 경사면이 보이는 곳이라 사실 시선을 가리기 위한 커튼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레이스를 걷은 직후 느꼈던 시원스러움은 겨울에 들어서자 허전함으로 바뀌었다. 마땅한 커튼감이 없어 미루고 있던 차에 오래 묵은 바느질 바구니에서 큼지막한 천 한 장을 찾아냈을 때 계절은 어느새 겨울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 그건 성기게 짠 리넨으로 원래 주방용 행주였으나 그렇게 사용하기에는 아무래도 사치스럽게 느껴져 바구니에 넣어두고 잊고 있던 것이었다. 계절이 두 번이나 지나도록 커튼 봉만 달려있던 창문에 옷을 입혔다. 창문은 위에서부터 반 너머 가려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밝아오는 아침을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다. 이른 아침 작은 숲의 고요와 평온은 창문이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창밖으로는 계절이 지나갔다. 창문은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움직이는 풍경화가 되고, 오후에는 긴 햇살을 들여 방안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무심코 방문을 열 때마다 방안 가득 일렁이는 햇살에 놀랐던 순간들을 그러나 이제는 만날 수 없다. 주방용 행주 한 장이 그 모든 것을 사라져 버리게 한 것이었다. 창밖은 비스듬하게 경사진 곳으로 나무들이 제법 들어찬 곳이어서 새들이 창 안에 있는 나를 구경한다면 모를까 누구라도 창문을 통해 방안을 들여다보기는 어려울 터였다. 아무도 훔쳐보지 않는 창문에 커튼을 달아 숲으로 향하는 시야를 가려버린 셈이 되었다.
겨울에 산기슭의 주택은 추워서 난방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집 전체를 훈훈하게 유지하려면 상당한 난방비 부담을 각오해야 한다. 커튼을 달지 않고 지냈던 지난겨울에 아래층은 냉기만 겨우 가실 정도로밖에 난방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집안일을 최소한으로 줄여 재빨리 해치우고 이층의 작은 방에 틀어박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침대 옆 작은 책상 앞에 놓인 붉은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바라보곤 했는데 밤에는 창밖 풍경 대신 내가 앉아있는 책상의 끄트머리가 어둠 속으로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방 안에서 홀로 창밖을 바라보는 일은 어느새 오후의 의식이 되어 늦가을에서 겨울로 갈수록 조금씩 변해가는 숲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산에 눈이 내려 쌓이면 숲이 더욱 선명해졌다. 눈은 내리면서 숲 전체를 감싸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숲에 숨은 나무들을 하나씩 불러내 홀로 서게 했다. 잎을 떨군 키 큰 나무들은 밑동까지 훤히 드러내고 눈을 반겼다. 창문에서 숲 언저리까지는 스무 걸음 남짓으로 매우 가까웠으므로 나뭇가지에 눈이 쌓이거나 쌓인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지가 부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 눈이 베일처럼 흩날리면 한겨울 눈에 덮인 잡목 숲은 초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간혹 먹이를 찾아 내려온 고라니가 보였고 때로는 제법 큰 새들이 날아올랐다.
오랫동안 나 홀로 즐기던 그림 같은 창문으로 손님이 찾아온 건 얼마 전부터였다. 오후 네 시 전후에 창밖을 내다보면 모두 열두 개의 칸으로 나뉜 격자 창문의 위에서 세 번째, 왼쪽에서 첫 번째 칸에 정물처럼 개가 앉아있었다. 새로 이사 온 윗집에 사는 아이들로 어느 날은 하얀 개, 어느 날은 검은 개였다. 개들은 마치 한창 공연 중인 야외극장의 관람석에라도 앉아있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멀리 있는 뭔가를 바라보거나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가끔 내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창으로 다가가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짖거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놀라지 않고 다만 바라 볼뿐이었다. 우리는 둘 다 오후의 평안에 만족스러워 서로를 방해하거나 도발하지 않았다. 읽던 책이나 뜨개질 감으로 돌아온 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개들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겨울 숲을 놓아두고 저녁 준비를 하러 일어났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뜨개질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격자 창문 속 열두 개의 직사각형들에 대각선을 그어놓고 도형들이 만든 직선을 이어 한 번도 떼지 않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따라가거나 직소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사각형마다 들어있는 풍경을 이리저리 옮겨 보기도 했다. 산다는 건 숲으로 난 창문의 작은 사각형 열두 개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일 같았다. 나는 갖고 싶은 것, 버려야 할 것,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로 사각형을 채우다가 비우고 다시 채웠다. 그 겨울에 창문은 내게 일종의 측정기 같은 것이어서 열두 개의 사각형이 수월하게 채워지면 세계가 질서와 균형과 조화로 가득해서 삶이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불순물이라고는 섞이지 않은 순수함이 나를 고양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날은 열두 개의 사각형을 채울 수 없었다. 일상은 지나치게 고요했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럴 때 나는 심심하고 멍한 사람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근거리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평화롭다는 것이 곧 행복한 건 아니었다. 창문의 격자를 통해 바라보이는 풍경은 아름답고 고요할 뿐이었다.
그런 창문에 커튼을 달았던 것이다. 이제 내 눈에 보이는 사각형은 열두 개가 아니라 세 개였다. 나머지 사각형들은 커튼으로 가려졌다. 얇은 리넨 한 장으로 산은 멀리 물러났고 이제 나는 열두 개가 아니라 커튼 아래로 보이는 세 개의 사각형만 채우면 되었다. 그건 싱거울 정도로 손쉽고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일이었다. 욕망도 갈증도 거의 언제나 세 개 이상이었으니까. 나는 차츰 창밖의 세상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그건 위험한 일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마른 나뭇잎 아래서 새싹이 하나 둘 올라오면서 산의 경사면이 보이는 방에 머무는 시간도 점점 짧아졌다. 겨울이 끝나간다는 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만 보는 건 그 정도면 충분했다. 바라보기만 했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풍경이 되는 일이 좋은 시절이 온 것이다. 커튼을 젖히고 바라본 창밖은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