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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24. 2024

걷기의 즐거움

댈러웨이 부인

    [댈러웨이 부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머릿속에 뒤죽박죽 뭉쳐 있던 생각들은 그들이 걷고 있을 때 가장 잘 풀려나온다. 단 하루 동안 한 여자의 일생을 보여주기 위해 버지니아 울프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걷기’였다. 지나온 시간들을 신부의 베일처럼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행렬의 선두에 클라리사가 있다. 클라리사는 꽃을 사 오겠다고 나가서는 유월 아침 런던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행복이 금방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깝게 있다고 느꼈던, 그때 부어턴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들, 피터와 리처드가 어땠는가를 떠올린다. 손 안에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 아름다움에 몸을 떤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하는 살아가는 일의 기쁨, 지금 이곳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기적에 감사한다.  


    클라리사를 사랑했던 피터는 방금 인도에서 돌아왔다. 클라리사의 집에서 눈물을 보인 후 도망치듯이 뛰쳐나온 피터 역시 공원을 가로질러 걷는다.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영민하고 섬세했던 젊은 시절에 책을 쓰고 싶어 했던 이 남자는 지금 이혼 문제 때문에 인도에서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일자리를 부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책은 쓰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지거나 우울하지도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런 뻔한 진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늙는다는 것의 보상은 단지 이런 거야. 정열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강하지만, 그래도 – 마침내! - 삶에 최고의 맛을 더해 주는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지. 지난날의 경험을 손안에 놓고 천천히 돌려가며 빛에 비추어 보는 힘을. 고백하기 싫은 일이지만, 이렇게 쉰세 살쯤 되고 보니, 더 이상 사람들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인생 그 자체, 그 모든 순간, 지금 바로 이 순간, 햇볕 속에서 리전트 파크에 있는 순간만으로 충분했다. 아니 과분할 지경이었다.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피터는 젊었을 때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방금 전의 눈물과 격정에서 놀랄 만큼 빠르게 회복한다. 이루고자 했던 것에 실패했고,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외롭다. 다만 이제는 왜소하고 나약한 서로의 모습을 가리거나 못 본 척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젊은 날에 그랬던 것처럼 감정적이고, 끊임없이 주머니칼을 만지작거리는 버릇도 여전하다. 이제 더이상 클라리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마도 죽을 때까지 클라리사를 사랑할 것이고. 


    클라리사의 남편 리처드는 점심식사 자리에서 피터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는다. 리처드는 피터가 클라리사에게 거절당한 후 인도로 가버렸던 걸 기억하고 있다. '자기가 클라리사와 결혼한 것은 기적이었다고, 자기 인생 자체가 기적이었다'고 거듭 생각한다. 아내에게 줄 보석을 고르는 오랜 친구를 보면서 자신은 클라리사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클라리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기취향에 자신은 없었지만 뭔가 선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장미를 한 다발 산다. 가서 꽃을 내밀며 ‘솔직하고 분명하게’ 사랑한다고 말하겠노라고 마음먹는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리처드는 클라리사에게 사로잡혀 있다. '반백의 머리에 고집스럽고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공원을 가로질러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행복이란 이런 거지.”


    집은 어수선하고 클라리사는 파티 준비에 바쁘다. 게다가 아내는 딸인 엘리자베스가 미스 킬먼과 함께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리처드는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꽃만 내민다. 클라리사가 놀라며 어머나 예뻐요, 라고 말했을 때 그녀가 말하지 않은 그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게 행복이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대신 아내의 손을 잡으며 다시 한 번 이런 게 행복이지, 생각한다. 리처드는 딱 자기 몫만큼 살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역사 선생인 미스 킬먼과 엄마 사이에서 괴롭다. 파티를 잊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뒤로 한 채 미스 킬먼과 백화점에 간다. 도중에 미스 킬먼과 헤어져 버스를 탔지만 집에 가는 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냥 벗어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엄마에게서, 그리고 미스 킬먼에게서. 그래서 정류장에 막 도착한 버스에 무작정 올라탄 것이다. 버스의 위층에 앉아서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 강, 교회를 무심히 바라본다. 머릿속에서는 무수한 생각들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한다. 엄마는 왜 끊임없이 파티를 열까? 미스 킬먼은 왜 그렇게 엄마를 미워할까? 어떻게 살면 좋을까? 직업을 갖는 건 어떨까? 의사나 농부가 되면 좋지 않을까? 문득 파티에 참석하려면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걸 떠올린다. 달아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면 돌아가는 건 비슷한 만큼의 안도감을 준다. 그날 엘리자베스는 불안했지만 행복했다.


    버지니아울프에게 길거리를 걷는 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자아를 때때마다 바꾸어 보는 일이기도 했다.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즐겁고 강렬한 경험이었고 그는 이 경험을 [댈러웨이 부인]의 등장인물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골보다는 도시를 좋아했다. [댈러웨이 부인]을 쓰던 1924년 5월의 일기에서도 런던에 있는 즐거움을 종종 언급했다. 도시의 활기가 자신을 받쳐주고, 사람들을 자유롭고 편하게 만날 수 있으며, 날쌔게 들락거릴 수가 있어서 좋았다고 말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걸었던 거리를 버지니아 울프는 얼마나 자주 걸었을까? 걸으면서 그녀가 떠올린 생각들이 무엇이었을까? 그 길을 걸으면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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