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짊어진 짐에서 함께 나누는 루틴으로
아내가 또 넘어졌다. 무릎이 까지고 손등에 상처가 났다. 아침 출근길에 늦을세라 서두르다 발을 헛디딘 것이다. 응급처치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평소 “천천히 다녀, 조심히 운전해”라고 말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일이 줄어들지 않는 분주함, 쉴 틈 없는 종종걸음이 늘 걱정스러웠다.
아내의 하루는 새벽 여섯 시부터 시작된다. 고3과 중3, 두 아이의 아침을 챙기기 위해 눈을 뜬다. 입맛 없는 아이들을 위해 영양 김밥, 유부초밥, 샌드위치, 샐러드 랩, 주먹밥까지 메뉴는 매일 달라진다. 저녁 식단까지 준비하고 부엌을 정리하면 어느새 한 시간이 사라진다. 씻고, 밥을 먹고, 화장까지 하려면 출근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아침을 거르거나 차 안에서 화장을 마치는 일이 다반사다. 안전 운전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직장에서 보낸 고단한 시간을 뒤로하고 퇴근하면, 아내는 다시 ‘집으로 출근’한다. 저녁 준비, 아이들 픽업, 집안일 정리까지 끝내야 겨우 숨을 돌린다. 정작 아내는 자신의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남이 해준 밥이 더 맛있다고 말한다. 밤 10시가 넘어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고, 주말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찬원의 노랫말 “365일 그대가 내 가슴에 살고 그대 향한 마음은 공휴일도 없어요”가 아내에게는 “365일 집안일과 가족 챙기느라 공휴일이 없어요”라는 탄식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사실 10년 전도 다르지 않았다. 주말부부로 지내던 시절,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첫째와 유치원생 둘째를 아내 혼자 돌봐야 했다. 해쓱해진 얼굴로 버티는 아내를 보며, 아이들 앞에서 약속했다. “엄마이자 직장인으로 고생하는 아내에게 ‘이름’을 찾아주겠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는 여전히 ‘엄마’, ‘직장 맘’이라는 이름 속에 갇혀 있다. 자신의 꿈은 꺼내지도 못한 채, “혼자 살고 싶다”는 말을 툭툭 던진다. 최근 유행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제주도로 떠나고 싶다던 말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오듯, 아내 역시 잠시라도 혼자만의 숨구멍이 필요하다는 절규였다.
나는 집안일을 ‘적당히’ 한다. 아내가 보기에 늘 20% 부족하다. 성격상 어질러져 있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아 한꺼번에 치우는 편이고, 주방에서는 주로 보조자에 머무른다. 그러나 아내는 이제 “메인이 되어 달라”라고 한다. 그 말이 어깨를 짓누르지만, 가장의 무게 또한 무겁다. 40대 후반, 눈은 침침하고 회복력은 떨어졌으며, 수입은 제자리걸음을 한다.
겉으로는 우아해 보여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발을 구르는 오리 같다. 얼마 전 읽은 구석기시대 소설 <슬> 속 주인공이 나와 겹쳐 보였다. 만삭인 아내와 자식을 지켜야 하는 그는 동족들과 떠나지 못하고, 홀로 사냥에 나섰다 실패해 돌아오지만 다친 다리를 고기 삼아 들고 돌아온다. 가족을 위해 치욕과 고통을 견뎌내는 모습이 지금의 가장과 닮았다. 그러나 가장은 왕이 되지 못한 채 무게만 짊어지는 존재라는 현실이 씁쓸했다.
살림 앞에서 이론과 지식은 무력하다. 아내는 설거지 하나에도 철학이 있다. 기름기 많은 그릇은 미리 닦아내고, 그릇은 빈도에 맞춰 정리하며, 반찬 그릇은 햇볕에 말려야 한다. 싱크대 주변과 바닥 물기를 닦아야 비로소 설거지가 끝난다.
아내는 생활의 고수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아내는 20년간 하루 4시간씩, 3만 시간에 가까운 살림 근육을 길러왔다. 반면 나는 간헐적으로 돕는 ‘손님’ 일뿐이다. 그래서 지금도 아내 옆에서 거들 때면 눈치를 살피며 긴장한다.
살림이라는 굴레는 아내에게 애증이다. 시험이 끝나면 해방감이라도 있지만, 집안일에는 종착지가 없다. 엄마라는 이유로 대충 넘길 수 없고, 변덕스러운 아이들에게 언제나 가슴을 내어준다. 그 모습은 때때로 도를 닦는 수도승처럼 보인다. 아내의 무게를 덜어주지 못한 채 ‘나는 노력한다’는 말로 위안 삼아온 내 모습이 부끄럽다.
3. 함께 루틴 ― 오래된 약속 지키는 길
나는 아침 루틴을 통해 삶이 달라짐을 경험했다. 눈을 뜨면 발끝 치기를 하고, 물 한 컵을 마신다. 성경 구절을 옮겨 적고 기도문을 쓰며 책에서 한 문장을 기록한다. 감사 일기로 마무리하면 하루의 밀도는 달라졌다. 그러나 그 루틴이 아내의 눈에는 ‘사치’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부부가 함께 성장해야 덜 싸운다”는 말처럼, 이제는 나 혼자만의 성장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하는 루틴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책상보다 부엌으로 먼저 가서 아침을 함께 준비하려 한다. 집안일도 주도적으로 나서서 아내의 짐을 덜고 싶다. 생색내는 작은 도움보다 가족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책임을 나누고 싶다. 아내의 간청처럼 요리를 배우고, 하루 30분이라도 아내가 오롯이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오래전에 아내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는 길이다.
가족을 위해, 건강을 위해 요리를 배우고 직접 해보라는 아내의 간청을 더는 미루지 않을 것이다. 역량 개발이나 독서 시간을 조금 줄여서라도 요리 영상을 참고하며 나만의 레시피를 늘려가겠다. 작은 변화가 모여 아내의 하루를 가볍게 하고, 가족 모두의 삶을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혼자만의 루틴에서 ‘함께하는 루틴’으로. 이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임무다. 아내의 일상이 단순한 고단함이 아니라, 새로운 활력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그것이 결국 우리 가족 모두의 행복으로 돌아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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