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어떤 풍경을 마주하며 살고 싶나요?
나는 사람들이 선택한 삶보다, 그 삶에서 짓는 표정에서 힌트를 얻는다.
짝은 쉴 때 종종 다큐를 본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편안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자극과 동기를 얻게 된다며. 하루는 함께 보고 싶은 다큐가 있다고 하여 보니, 영국 웨일스의 그린벨트에서 오프그리드의 삶을 사는 부부의 이야기였다. 성실히 공부하여 수의사가 된 부부, 바라던 걸 이루었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도심의 삶. 무얼 위해 쫓기듯 사는 건지 혼란스러울 즈음 건강까지 적신호가 들어오자, 다 내려놓고 이 삶을 선택했다고 한다.
감동이 밀려오는 대자연의 풍경 속, 폐차 몇 대로 만들어진 집 한 채. 동화 속 이야기 같다. 세탁기 통을 직접 손으로 돌려 빨래하고, 음식물 쓰레기로 가스를 만든다. 토끼를 길러 잔디를 깎는다. 아이들에게 토끼를 왜 기르느냐 묻자, 식용이라고 말한다. 모든 게 자연스럽다.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걸, 경험으로 얻은 실용적인 방법을 커뮤니티에 나누고 교육도 한다. 나더러 똑같이 살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결코 아니다. 나중 일은 모르겠지만.
다큐를 통해 다양한 삶의 형태를 엿볼 수 있어 좋지만, 그보다 더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람들의 표정이다. 본인이 마주한 삶 앞에서 짓는 표정. 희로애락이 뒤섞인 그 위로 무언가 충만한 감정이 환하게 드러나는 표정을 본다. 살고 있다는 느낌, 생동감, 생명력. 뭐 이런 걸 느끼게 되는 것 같다. 행복감에 눈물짓는 남편의 모습, 서로를 꼭 안아주는 부부를 보면서 나에게도 코끝이 찡하게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따라 그려보게 된다. 울퉁불퉁 모난 아픔을 두고 홀가분하게 날아오르는 모습 같은 것을. 그리고는 짝의 손을 잡는다. 나는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일찍 자야 해.’라 말하고, 짝은 ‘너나 잘해.’라 말한다. 그렇게 키득 거리다가 잠이 든 밤이 있었다.
사람과 공간이 마땅히 어울리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
서른 이후로는 부쩍 어떻게 살까에 관한 생각을 자주 해왔다. 그 생각은 어디서 살아야 할까로 이어졌다. 삶에 대한 태도만큼이나 삶을 둘러싼 환경도 중요하기에 내가 살 곳은 '나를 살게 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숨통이 트이는 곳, 아늑함을 주는 곳, 좋아하는 풍경이 눈에 소복이 담기는 곳. 짝과 함께 본 다큐에서처럼 사는 이들의 표정이 살아 숨 쉬는 곳. 사람과 공간이 마땅히 어울리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의 집은 어떤 곳이 될까?
자연스레 도심을 벗어나 자연 가까운 곳으로 관심이 기울었다. 이미 지어진 아파트보다 직접 짓는 집이 좋았다. 아무래도 유년기를 산꼭대기 과수원에서 보내고 청소년기도 자연에 둘러싸인 시골 주택에서 지냈던 경험이 큰 듯하다. 과수원에는 코끼리만큼 크고 두꺼비를 닮은 바위가 있었는데, 어렸을 적 자주 그곳에 올라갔다. 햇볕에 달궈져 따끈따끈한 두꺼비 바위 등에 업혀 자던 낮잠은 꿀맛이었고, 하얀 배꽃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장면도 무척 예뻤다. 그렇다고 마냥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바위 아래에서 독사를 마주해 까무러치게 놀란 적도, 아버지 전지가위에 그 녀석 목이 댕강 잘려나가는 걸 본 것도, 그와 비슷한 장르의 상상 가능한 일들이 참 많이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 커서 짝과 데이트를 할라치면 늘 초록이 많은 곳을 찾아가곤 했다.
전원에 살면 주택 살림살이에 손 가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쉬러 가서 일만 하다 온다는 말, 에너지 절감은커녕 냉난방비가 장난 아니게 나온다는 말, 보금자리를 지키고자 벌레들과의 사투를 벌여야 한다는 말, 그렇게 전원살이 했다가 폭삭 늙어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가까이에 살고 싶다 하니 너무 낭만을 좇는 거 아니냐는 말도, 땅에 두 발 딛고 살라는 조언도 들어본 적 있다.
뭐 어때. 할 일이 많다면 천성이 게으른 내가 부지런히 몸을 움직일 수 있어서 좋고, 손 닿는 것들이 모두 소중해질 것이다. 흙의 감촉이며 비 내음이 좋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정말 정말 정말 좋을 것이다. 도시에 비해 여러모로 불편한 부분이 있어도 그 불편함이 여백처럼 여겨지리라. 모든 선택에는 장단점이 있겠지만 전원살이는 내게 장점이 단점을 충분히 덮을 만큼 컸다.
사실 시골 불편해서 어찌 사느냐 하지만, 시골 사는 부모님은 뭐든 넘쳐나 시끄럽고 정신없는 도시에서 어찌 사냐며 서울 오시면 이틀을 채 못 머무르고 내려가신다. 어디든 발붙이면 살게 되고 살면 적응하게 되는 게 사람 사는 일 아닐까. 그러나 적응하는 것과 정드는 것은 달라서, 사람마다 정 붙이고 오래도록 사는 곳이 제각기 다른 것 아닐까. 나는 서울에 제법 잘 적응했다고 생각하지만 언젠가 이곳을 떠나 살리라는 막연한 꿈도 함께 품고 살았다. 서로 닮아간 건지 닮은 우리가 만난 건지, 짝과 내가 그리는 이미지는 흡사했다. 마음을 모아 우리가 정 붙일 곳을 찾아 나설 때였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으면 꿈은 꿈으로 남는 법이다. 2021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 우리의 집짓기 꿈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집을 짓고 싶다면 땅부터 보러 가자 했지만 바쁜 일상을 핑계로 두어 달을 머뭇거렸다. 몰라서 두려웠다. 잘한 선택일지에 대한 염려보다 미지에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렇게 꿈을 꿈으로 둔 채 2022년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는 똑같은 겨울이라도 연말과 달리 봄의 기운을 품고 있다. 몸도 마음도 들썩이는 와중에, 눈 녹듯 겨울이 흘렀다. 조바심이 났다. 땅의 모양과 해 드는 자리를 훤히 보려면 땅은 겨울에 봐야 한다기에 이때 아니면 못 간다 싶어서 수첩과 펜 하나 달랑 챙겨 2월 초, 첫 임장을 떠났다. 계절이 마감 역할을 톡톡히 하며 우리 등을 떠밀어 준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