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 알고리즘의 노예에서 '군자(君子)'의 자유로.
사소한 점심 메뉴부터 인생의 행로를 바꾸는 중대한 결단까지, 결국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의 총합이 '나'라는 존재를 규정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지만,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명제는 유효한가? 우리는 지금 물질적으로는 단군 이래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양극화가 극심하다고는 하나, 최저 소득계층의 절대적 삶의 수준조차 과거의 보릿고개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묘한 정신적 빈곤과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린다. 이 빈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욕망할 자유'의 상실이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묻기도 전에, 다크패턴(Dark Pattern)으로 무장한 인터넷 사이트와 발전된 AI 알고리즘, 결핍을 끊임없이 창출해 내는 SNS의 '상대성의 저울' 위에 올려진다. 이 시스템은 교묘하게 우리를 타인이 원하는 방향, 자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한다. 내 욕망이라 믿었던 것이 실은 알고리즘이 주입한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할 때, 우리는 풍요 속의 빈껍데기가 된다.
이 시점에서 2,500년 전 공자의 <논어>를 다시 펼쳐 드는 목적은, 사회에 뒤쳐진 채 트렌드를 거부하고 허울 좋은 당위나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이 거대한 '유도된 욕망'의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나를 잃지 않고 진정한 주체로 설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해법을 찾기 위함이다.
근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소인(小人)'으로 전제하고 설계되었다. 여기서 소인이란 자신의 이익(利)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존재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막기 위해, 혹은 권력자의 타락을 막기 위해 현대의 법과 제도는 인간의 행동을 제어하고 금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소인의 질서‘다. "너는 가만히 두면 탐욕을 부리고 남을 해칠 것이니, 이것을 하지 말라"는 억압과 금지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물론 이 시스템은 사회의 붕괴를 막는 안전장치로서 훌륭하게 기능해 왔다. 최악의 지도자가 나와도 사회가 망하지 않도록 하는 '방어적 기제'인 셈이다.
하지만 이 질서 속에서 개인은 수동적 존재로 머문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처벌받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한다는 식의 욕망만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삶'으로 포장된다. 규율에만 맞춰 타율적으로 통제되는 삶은 안전할지는 몰라도, 주체적이지 않다. 이는 인간을 '잠재적 범죄자' 혹은 '통제되어야 할 욕망 덩어리'로 격하시키는 시선이다.
공자는 "소인은 물과 같아서 아래로 흐른다(하달, 下達)"고 했다. 현대 사회에서 이 '아래'는 바로 알고리즘이 이끄는 방향이다. SNS는 현대판 '소인 양성소'다. 타인의 화려한 삶을 24시간 전시하는 피드는 끊임없이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한다. "남들은 다 저걸 하는데, 너는 왜 안 해?"라는 무언의 압박은 나의 고유한 기호(嗜好)를 삭제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선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경계했던 '위인지학(爲人之學,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와 삶)'의 전형이다.
현재 우리가 겪는 불행은 물질적 결핍 때문이 아니다. 나의 선택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라는 무의식적 자각, 즉 '자기 소외'에서 온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상품을 사고, 유행하는 여행지를 가고, 남들만큼의 아파트를 욕망하느라 현재의 나를 갈아 넣는 삶. 이것은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없고, 그 끝에 행복이 준비되어있지도 않다. ‘적어도 블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자기 위안으로 무장된, 가장 세련된 형태의 복종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알고리즘의 감옥을 탈출할 열쇠는 무엇인가? 공자는 이를 '군자(君子)'라는 인간상을 통해 제시한다. 흔히 군자를 고리타분한 도덕군자로 오해하지만, 이는 오히려 어떠한 규율과 당위보다 앞서서 "스스로의 선택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자유인"을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극기복례(克己復禮)'다. 과거에는 이것이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고 사회 규범에 복종하라는 억압적 논리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현대적, 그리고 심층적 관점에서 '극기(克己)'는 '외부에 휘둘리는 가짜 자아(아집, 알고리즘이 주입한 욕망)를 이겨내는 것'이다.
스마트폰 화면 속 타인의 삶을 보며 솟구치는 질투, 불안, 모방 욕망. 이 자동 반사적인 감정의 고리를 끊어내는 힘이 바로 극기다. "저것은 저 사람의 행복일 뿐, 나의 행복은 아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용기, 알고리즘이 '이것을 사야 행복해진다'라고 유혹할 때 "나는 이미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단단함. 이것이 현대적 의미의 군자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우리가 욕망할 자유를 되찾는다는 것은 곧, 현재의 풍요를 내 방식대로 정의할 권리를 갖는다는 뜻이다. 공자는 '빈일락(가난해도 즐겁다)'과 '부이호례(부유해도 예를 좋아한다)'를 말했다.
빈일락의 현대적 의미는 단순히 가난을 즐기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가진 물질적 조건이 남들보다 부족할지라도(상대적 빈곤), 나의 내면이 충만하여 외부의 비교질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다. SNS의 '좋아요' 수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나만의 소박한 취향과 삶의 기준을 즐길 줄 아는 '정신적 귀족'의 태도다.
부이호례는 내가 가진 풍요(돈, 시간, 재능)를 오직 나의 탐욕을 채우거나 남에게 과시하는 데 쓰지 않는 것이다. 대신 타인과 공존하는 아름다운 질서(禮)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선택이다.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야 할까.
이 두 가지 태도의 공통점은 '선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비굴해지지 않고, 돈이 많다고 해서 교만해지지 않는다. 상황에 종속되지 않고 상황을 부리는 주체,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대인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는 AI의 등장, 기후 위기, 경제적 양극화 등 극도의 불확실성 시대를 살고 있다. 소인의 질서(법과 규제)만으로는 이 복잡한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법은 지나간 시대의 축적일 뿐, 미래의 우리 삶을 설계하고 고양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래의 불안 때문에 현재를 저당 잡히고, 과거의 아집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며, 타인의 시선 때문에 가짜 욕망을 좇으며 ‘필연적 소인’으로 사회에 표류하고 있다.
진정한 자유는 선택지의 개수가 늘어나는 데 있지 않다. 수만 가지 배달 음식 메뉴 중에서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상위 1% 맛집'을 고르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는 선택이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우리는 실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성공으로 향하는 나만의 길을 창출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란 실패를 담보하더라도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줄 아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 알고리즘과 SNS가 우리를 끊임없이 '평균의 삶',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으로 몰아갈 때, 우리는 멈춰 서서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원하도록 설계된 것인가?"
소인의 질서가 금지와 유혹으로 우리를 통제하려 한다면, 대인의 질서는 자각과 선택으로 우리를 해방시킨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위기지학, 爲己之學). 그리하여 현재의 내가 온전히 지금 하고 싶은 선택을 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이 기묘한 풍요와 빈곤의 역설 속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을 지키는 유일한 길, 즉 '욕망할 자유'의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