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먹는 걸 좋아했다.
엄마가 밥을 해놓으시면 삼남매 중 유일하게 그 밥을 찾아먹는 건 나 뿐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변 아저씨들을 통해 온갖 몸에 좋다는 음식을 접하면서 나의 몸은 비대해졌고,
한 때 반짝했던 미모(?)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전신거울을 피해 손거울로 최대한 작은 면적만 거울에 비추며 생활하던 나는 길거리에서 통유리 거울이라도 마주치면 움찔 놀라 슬슬 뒷걸음질 쳤다.
그럼에도 나의 먹성과 식탐은 그칠 줄 몰랐고, 그 생활이 만족스러우면서도 불만족스러웠다.
어느날 친한 친구가 나의 뚱뚱해진 모습을 보고 너무 속상해서 눈물을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
지독한 나는 그럼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먹는 걸 탐하는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
알콜과 기름진 음식으로 온몸을 배불리고난 한참 뒤에야 나는 비로소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대로는 안되겠어."
20년간 다닌 회사에 별안간 사표를 냈다.
어디가 병들거나 몸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더 늙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몸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 무렵 일찍부터 전원생활을 꿈꾸던 남편은 거의 7년간 차근차근 계획해서 농막을 설치하고 텃밭을 꾸미고 있었다.
나도 그 큰 계획에 동참은 했지만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던 터라, 남편의 텃밭과 농사일에 숟가락만 살포시 얹는 상황이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그는 회색빛 그저 그런 농막 컨테이너가 아닌, 비싼 비용을 치르고 예쁜 카페같은 농막을 구입했고 그 안에 하나하나 살림을 들여놨다.
나는 처음에 농막이 뭔지도 몰랐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의 간이 쉼터란 것도 남편을 통해 알게됐으니 참 무지했다.
회사를 그만둘 무렵 농막에서의 할 일도 많아졌다.
농작물을 키우기 위한 틀밭을 만들기 위해 시멘트를 반죽해서 벽돌을 쌓아올리고, 알지도 못하는 농작물의 씨앗을 뿌렸다.
벽돌을 쌓다니 내가 이런 노가다를 하게 될 줄이야.
시멘트도 반죽을 하네?
빵만 반죽하는 줄 알았던 나는 그 무렵 난생 처음 신기한 경험들을 했다.
그런데 씨를 땅에 뿌리기만 하면 저절로 자라는 줄 알았던 농작물은 영 소식이 없었다.
옆집 밭의 농작물은 잘만 자라는데 이유가 뭘까.
농작물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지만 아예 자라지 않고 썩어버리니까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어떻게든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에 유튜브와 여러 정보를 찾아서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경험이 많은 주변 농가 어르신의 지혜를 뛰어넘지 못했다.
우리는 좋은 이웃어른의 도움을 받아 농작물을 다시 재배하기 시작했고, 기대하지 않았던 어느 날
조금씩 성장해있는 열매들을 보았다.
정말로 신기하고 희열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온도가 올라가고 습해지는 시기가 오니 생장속도가 아침저녁으로 다르게 급진전되었다.
가끔은 직장에서 나를 괴롭히던 인간들을 생각하며 미친듯이 자라는 방울토마토 가지를 거침없이 잘라내기도 했다.
언젠가는 너무 집중해서 하는 바람에 남편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못듣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농사일 중에 가지치기를 제일 좋아하고 잘한다.
시기에 따라 수확되는 농작물은 달랐다.
키우기 제일 쉽다는 상추의 배신으로 우리는 맛도 보지 못했고, 대신 옥수수와 방울토마토 바질 루꼴라와 같은 허브의 탄생을 먼저 보았다.
이때부터 나의 먹성과 몸을 생각하는 본능이 잠을 깨고 서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끈기없는 내가 변함없이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건 먹는 일이야.”
그런데 사먹는 일상에서 이제는 내가 수확한 농작물을 직접 해먹는 일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덕분에 올해의 여름은 고공행진하는 물가를 체감하지 못했다.
오늘은 뭘 먹을까?
나의 식단은 어떤 채소가 자라고 무엇을 수확하는 지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은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와 향기가 뛰어난 바질을 수확했으니까 토마토 마리네이드 당첨이다.
오늘의 주인공, 보기만해도 먹음직스런 방울토마토를 준비한다.
그리고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양파도 자잘하게 챱챱 다져준다.
나는 모양이나 크기는 그렇게 신경쓰지 않고 맛에 집중하는 편이다.
요리의 기본! 야채 자체의 맛을 끌어올리려면 소금은 필수지!
소금을 치고 단짝인 후추를 뿌려 간을 한 다음, 걸쭉하고도 매큼한 향이 감도는 올리브유를 풍부하게 뿌려준다.
거기에 꿀도 살짝 넣어주고 조연같은 주연인 바질을 찢어 넣어주면 완성된다.
"하아 향긋해. 이 여름의 신선한 맛과 향!
"피곤하고 불쾌했던 크고 작은 일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야."
"그래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잘 먹으면 되는거야."
나는 이 신선한 향기로움을 좀더 음미하고자 눈을 살짝 감았다.
순간 나에 대해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고 서운한 소리를 했던 모 상사가 스치듯이 떠올랐지만, 향긋한 바질을 품고있는 상큼한 토마토를 입에 탁 터뜨리는 순간 그 서운함도 같이 알알이 터져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 어른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지 못하고 다소 권위적인 사람이었지만, 어찌 그 사람도 직장생활에 대한 고통과 슬픔이 없으랴.
인간은 다 부족하다.
북적이는 인간 집단사회를 떠나 텃밭을 가꾸면서 나는 의외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깊이가 더 많이 생겼다.
그리고 나에 대해 더 집중하며 애정을 주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환상적인 색과 향, 그리고 맛의 조합까지 천재적인 토마토 마리네이드는 그렇게 나의 오감을 깨워 건조해진 감성을 풍부하게 끌어올려주고 타인에 대한 이해도도 더 유연하게 만들어줬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땡큐 나의 텃밭산 토마토마리네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