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맞이 꽉찬 1년차가 되었다.
20여년간의 직장생활로 인해 노예의식에 침식당한 나는 그 전엔 사표를 쓰면 굶어죽는 줄만 알았다.
회사밖의 세상이 궁금하긴 했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다른 일거리를 알아본다거나 취미를 개발한다거나 하는 일은 사실상 어려웠다.
보통 하나에 몰입하면 다른 하나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조직이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 나는 그런 낯짝을 가진 인물이 못되기 때문에 결국 이래저래 직장생활을 이어나갔고, 덕분에 조직 내에서 배운 것도 많았다.
그 길고 긴 직장생활의 끈을 끊지 못하고 원형의 굴레 안에서 뱅글뱅글 돌고 돌다가 어느 날 잠깐 멈춰서서 나 자신을 보았다.
직장이라는 쳇바퀴의 굴레 끝에 한발로 걸치고 서 있던 그 순간, 위태로웠지만 조금은 바깥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진짜 인간적으로 이정도 직장생활 했으면 나 이제 그만둬도 되잖아!
울분이 터저나왔다.
그간 직장에서는 나 스스로 충분히 할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오래 다닌 회사라 섭섭하겠구나" 했지만, 정말이지 아쉬움이나 미련이 모래알 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그간의 나를 돌이켜 보건대, 충분한 고민을 하고 무언가를 결심하고 나면 뒤를 돌아보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사표를 집어던지고 나는 제일 먼저 "인간정리"를 했다.
연락처 목록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찍어누르며 삭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육고기를 두고 화려한 칼부림을 하는 백정이 된듯 불필요한 전화번호들을 고기 썰듯 숭덩 숭덩 잘라댔다.
잘려나간 그 목록들은 고기 한덩이의 양과 비스무리해 보일 정도로 꽤 많았다.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 전화번호, 어쩔 수 없이 업무때문에 연락해야만 했던 불편한 사람들,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제왕적인 존재로 군림하려는 사람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아직도 1990년대에 머물러있는 사람들.
이게 뭐라고 복수라도 한 것처럼 쾌감이 일었다.
"소심한 직장인 같으니라고"
그리하여 나의 전화번호 목록은 꽤 심플하게 정리되었다.
군더더기 없는 연락처 목록을 보자니 실로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1년이 되었다.
최근 1년간 돈은 못벌어도 머리속은 늘 돈 버는 사람과 버금가게 바삐 돌아갔다.
바쁜 직장생활로 잃어버린 나 자신을 탐구하는데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도 그리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몸은 여유로웠지만 이제 진짜 내가 나를 먹여살려야한다는 긴장감이 마냥 널부러지지 못하게 했다.
주변에서 "그리 오래 일했으면 진짜 좀 쉬어라" 라고 했지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것이었지 정말로 푹 쉬고 싶은건 아니었다.
그간 여러 일이 많았지만, 올해를 돌이켜보면 나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었다.
회사라는 소속이 없어진 이후로 누군가에게 나를 설명하기가 참 애매하고 복잡했다.
그래서 내가 누구고 어떤 걸 좋아하는 사람인지 알아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도전했고, 지금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방향을 정하고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반대로 그간 회사라는 소속으로 나를 숨기기 쉬웠다면, 이제는 그냥 나 자체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긴장감을 감돌게 한다.
올해 가장 큰 기쁨을 준 일들을 떠올려본다.
인스타 이벤트에서 떡볶이 밀키트에 당첨된 일, 네이버 블로그 챌린지에서 5만 포인트를 받은 일,
그리고 브런치작가에 합격한 일!
이제는 구구절절 나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브런치 작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게 되어 참 기쁘고 효율적이다.
회사원이었던 나의 신분이 무소속에서 다시 디자이너 겸 작가로 재정의되는 이 연말, 자연스럽게 지인들과의 모임도 생겨나고 덕분에 나는 그 모임들을 피하지 않고 편안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인들을 집에 초대하여 냉장고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내던 겨울 텃밭 채소를 활용해 파티음식을 준비했다.
대체적으로 그분들은 기름지지 않고 가벼운 음식들을 선호하는 편인데다, 상차림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예쁜 메인 음식 하나는 내놔야 분위기가 사는 편이라 샐러드는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장철이 시작되던 11월말쯤 옆집 농가의 김선생님이 직접 기르신 배추를 선물로 주셨기에 그걸 활용해 샐러드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날씨가 추우니 생으로 만드는 것 보다는 배추를 쪄서 온기를 좀 유지하면서도 내츄럴한 맛을 그대로 내보이면 어떨까 싶었다.
직접 기른 채소들은 대체적으로 특별한 무언가를 가미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맛이 좋은 편이다.
거칠고 넓은 배추의 겉잎은 떼어내 우거지로 얼리고, 연노란 색의 맑은 배추 속잎은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야채는 찌거나 볶으면 부피가 상당히 줄어들기 때문에 감안하고 좀 크게 썰어야 한다.
네모지게 썰은 배춧잎을 찜기에 쪄낸 후, 크고 넓직한 접시에 배춧잎을 올리고 소금과 올리브오일을 뿌려 뒤적뒤적 섞어준다.
그 전에 실험적으로 배추찜 샐러드를 몇번 해봤기 때문에, 오늘은 이태리 스타일로 발사믹 글레이즈를 접시 모양대로 삥 둘러 새콤달콤한 풍미를 살려주기로 했다.
결과는?
대한민국 땅에서 자란 토종 배추의 은근한 단맛과 쪄낸 야채의 슴슴한 향이 입안에 퍼지는 동안, 이태리 출신 새콤달콤한 발사믹 소스가 혀를 톡톡 건드리며 입맛을 자극시켜줬다.
한국 토종 배추가 이태리로 출장을 가서 새로운 인생을 맛보고는 눌러 앉는 느낌이랄까.
"어머! 배추랑 발사믹 소스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생각보다 정말 맛있는데!!"
막상 초대받은 손님들보다 내가 더 배추찜 샐러드 맛에 화들짝 놀라, 맛있지 않냐며 동의를 구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와 정말 이 천재적인 발상, 어쩌면 좋단 말인가.
혹시나해서 뿌려본 발사믹 소스가 이렇게도 배추와 잘 어울리다니.
보상없이 외롭게 나 자신과 싸워온 올 1년간의 피로와 고단함이 잊혀질 정도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맛이었다.
오늘도 나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렇듯 자유롭게 머리 속 생각을 꺼내 실제로 펼쳐보는 작업.
어쩌면 그게 앞으로 내가 갈 길이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정말 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니까.
그날 우리는 배추찜 샐러드를 나눠먹으면서 캄캄한 밤이 되도록 그간의 자기 얘기를 때론 반성하듯, 때론 다짐하는 눈빛을 담아 서로에게 고백하듯 털어내었다.
★사진 및 일러스트 : 직접 찍고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