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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반찬 다이어리 Dec 17. 2022

2.김치로만 살아온 얼갈이의 변신, 얼갈이샐러드

아주 가끔은 나도 가녀리고 애교많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신입사원 시절 회사에서 단체로 산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등산을 원래 싫어하는 나로서는 피하고 싶었지만 조직의 일원이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따라야했다.

그 산이 어디였는지 누구와 함께 갔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머리속에 사진처럼 생생하게 각인되어 뿌리뽑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유독 이 회사에는 예쁘고 가녀린 여자들이 많았는데 슬슬 오르막길을 오르던 찰나였다.

경사진 각도의 바위를 딛고 올라가야만 정상으로 향하는 길로 갈 수 있었고, 그런대로 삼삼오오 모여서 순조롭게 가는 듯 보였다.

등산 속도가 느려 뒤쳐진 내 앞에도 바로 그 경사진 바위가 나타났다.

나는 한발로 내딛어 중심을 잡고 나머지 발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서 비틀비틀 거리다가 다시 바위 뒤로 물러나야했다.

그런데 내가 올라가려던 그때 비슷한 속도로 뒤쳐진 한명의 여자가 또 있었다.

내가 봐도 너무 예뻐서 빛이 나는 외모에 지나가던 거지라도 다가와서 도와줄 것 같은 가녀리고 아름다운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난 오르막길에 그 바위를 만나서 왜그렇게 혼자 뒤뚱거리며 힘들었는지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남자 몇명들이 그 아름답고 가녀린 여자와 일부러 속도를 맞추면서 걸어오고 있었고, 그녀에게 말도 건네가며 서로 호인인양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고 있었다.

바위 앞에 다가왔을 때 그 남자들은 아름다운 그녀의 앞뒤로 포진하여 손을 잡아주고 다리도 들어올려주며 안전한 착지가 될 때까지 그녀에게 온 집중을 다하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경쟁하던 남자들이 그 순간만큼은 팀이 되어 그녀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노심초사 하는 모습으로 정확히 단합되었다.


그리하여 난 혼자가 된 것이다.

내가 아무리 뒤뚱대며 그 바위를 내딛지 못해 낙오가 된다해도 누구 하나 손뻗는 이는 없었다.

막상 그녀는 등산 속도만 조금 느렸을 뿐, 오히려 균형감각이 꽤 괜찮아 중심도 잘 잡는 것 같아 보였다.


“저기요. 등산은 그분보다 내가 더 못하는거 같은데요.“


멀어져 가는 그들 무리의 등뒤를 바라 보며, 나는 터져나오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어떻게든 위험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온전히 내게 집중하면서 올라가야만 했고,

그렇게 나는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기도 전에 냉혹한 세상을 맛보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몸이 무겁지 않았고 나름 나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상황을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허나 산전수전 겪은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들이 일부러 나를 외면하려고 계산해서 한 행동이 아니라, 굉장히 원초적인 본능에서 발현된 반사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행동임을 알게되었다.

그저 (외모가)연약하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집중을 한 것 뿐이었음을.

아이들도 예쁘고 상냥한 선생님을 본능적으로 좋아하고 따르듯이 말이다.


그래서 아주 아주 가끔은 나도 그런 인생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기는 한다.

그러나 성향상 누군가의 일방적이고 적극적인 보호는 사실 부담스럽고, 원치않는 사람으로부터의 관심도 꽤나 피곤한 일이라 느끼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생긴대로) 살게 되었는데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한때 나의 말투가 다소 격정적이고 진솔(?)하여 조금 부담이 되던 시절,

얌전하고 가녀린 여자의 목소리톤으로 바꿔서 사람들한테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어울려. 생긴대로 살아."


종종 나는 예쁘고 가녀린 후배들을 보면 농담삼아 얘기했다.

"오늘 퇴근하면 부모님한테 감사하다고 말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 맑고 귀여운 얼굴을 보고 나는 혼자 키득거렸다.

"그냥 그런 줄 알어."


한편 농막에는 늦가을에 씨를 뿌린 얼갈이가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잘 자라서 뿌듯한 마음과 동시에 너무 자라면 이걸 어떻게 써먹지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얼갈이 하면 김치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추처럼 보이지만 너무 많이 자란 얼갈이의 모습

그런데 얼갈이는 꼭 김치로밖에 못해먹나?

가끔은 나도 여린 여자로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이 있는데, 얼갈이라고 꼭 김치로만 단조롭게 살란 법은 없지!

된장찌개에 넣어서 먹는 레시피도 있긴 했지만 그다지 큰 변화는 아니었다.

얼갈이도 분명 김치 외에 쓰임이 더 있을텐데 그 매력이나 재능을 못알아보고 있는 건 아닐까.


농사를 지어보면 수확의 기쁨도 있지만 반대로 어떻게든 해먹어야 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아까운 농작물을 폐기하기 전에 필사적으로 레시피를 연구하게 된다.

특히나 레시피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얼갈이를 보자니, 다른 캐릭터로 살아보지 못한 나의 숨겨진 열망이 떠올라서인지 더욱 자유롭게 머리를 굴렸다.


이제 슬슬 추워지고 있고 겨울엔 수확되는 채소도 별로 없으니, 샐러드나 해볼까 싶어 의식의 흐름대로 도전해봤다.

처음엔 얼갈이김치로 고정된 편견이 쉽게 깨지지 않아 드레싱으로도 참기름을 썼다.

얼갈이에 서양식 드레싱 소스는 왠지 조합이 잘 상상되지 않아서였다.


그날은 때마침 김장김치가 있어 돼지 앞다리살로 수육을 삶았다.

그런데 김장김치의 간이 세니 얼갈이 샐러드로 중간중간 입가심을 해주면 좋겠다 싶었다.

사실상 얼갈이 레시피로 보자면 상당히 파괴적인 시도이기 때문에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과연 어울릴까도 싶었지만 그냥 내다버리는거 보단 낫지 않을까 해서 만들었는데,

한입 깨물어서 먹어보니 얼갈이 자체가 상당히 샐러드용으로 잘 어울리는 맛과 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얼갈이 자체의 특유한 풋내가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맛과 향이 튀지 않고 은은해서 함께 먹는 음식과도 꽤나 조화로웠다.

"우와 이거 굉장한데?"

가끔 내멋대로 굴려낸 아이디어로 만든 레시피가 이렇게 괜찮았을 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한번 검증을 거치고나니 그뒤로는 더 대담한 레시피로 변화를 줄 수가 있었다.

얼갈이를 기본으로 넣고, 아보카도와 식물성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병아리콩을 조합하여 서양식 샐러드를 만들어봤다.

그리고 심심할 수 있는 이 샐러드에 매콤하게 튀는 양파를 썰어 넣었고,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 레몬즙 그리고 꿀을 살짝 섞어 전체적으로 뒤적뒤적 해주었다.

얼갈이의 자연스런 풀내음과 본연의 삼삼한 맛이 조용하게 중심을 잡아주고, 크리미한 아보카도와 알싸한 양파가 빈틈을 개성있게 채워주면서 심심한 맛을 확 끌어올려 주었다.


"화아~ 맛있다! 겨울에도 이렇게 신선하고 풍부한 샐러드를 먹을 수 있다니!"


예상치 못한 얼갈이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적어도 우리둘의 입맛에는 상당히 괜찮았기에, 그 뒤로 우리는 올 겨울 샐러드는 얼갈이라고 결론지었다.


만약 얼갈이에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샐러드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김치로만 살아와서 지겨웠을법한 얼갈이에게 전혀 다른 레시피를 시도해 새로운 맛을 발견하게 되니, 정말 뿌듯하고 기뻤다.


"그래. 가끔은 남이 하지 않은 방법으로 용감하게 변화를 줘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몰라."


얼갈이의 변신을 보며 20년간의 회사원 생활을 때려치운 지금의 나를 떠올린다.

해보지도 않은 낯선 일러스트 디자인계에 입문하여 때론 힘들고 외롭기도 하지만, 이렇게 계속 가다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르기에.

                       ★ 사진 및 일러스트 : 직접 찍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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