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모닝글로리의 습격_공심채 볶음
농작물은 키우는 것도 어렵지만, 어떤 작물을 키울 것인지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다.
봄이 되어 어디에서나 볼 법한 흔한 농작물을 기본으로 몇개 선택하고 나면, 뒤이어 뭔가 좀 특별하고 맛있는 농작물도 키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대체로 누구나 농사짓는 흔한 채소들 위주로만 판매되기 떄문에, 어떤 여행지에서나 해외에서 먹어봤던 특이한 것들을 떠올린다 해도 구하기가 힘들다.
기본적으로는 우리나라 기후나 토양의 문제가 있겠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야채나 과일의 종류가 어느정도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날 우리는 별 기대없이 그 지역에서 제일 큰 중앙시장에 들렀다.
나는 농사를 시작하면서 채소 종류에 따라 심는 시기도 각각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과일이야 계절적 구분이 비교적 뚜렷하고 일부 시즌에만 나오는 채소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흔한 농작물도 이른 봄, 늦봄, 초여름 뭐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심는 지는 몰랐었다.
늦봄 즈음 모종시장으로 향한 우리는 그 시기에 심어야 되는 씨앗과 모종을 구경할 수 있었다.
상추를 기본으로 흔한 작물들 몇가지를 고른 후, 혹시라도 뭔가 더 특이한게 없나 여러 가게를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녔다.
꼭 사고 싶은 것은 바질과 같은 허브류였다.
나는 동그란 바질잎 모양을 떠올리며 가게 구석구석을 훑었고, 그 잎사귀와 비슷한 걸 찾기 위해 바삐 눈을 굴렸다.
세네번째 들렀던 가게에서 드디어 바질을 발견하고는 정말 기쁘고 놀라웠다.
와 시골 시장에서 바질을 판다니. 그것 뿐인가. 로즈마리랑 심지어 루꼴라도 있었다.
우와 이게 왠일?! 루꼴라가 이 시골 시장에??
정말 놀라웠다. 식재료의 글로벌화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한 2주 가량 더 지났던 것 같다.
이미 허브류는 다 사서 마음이 좀 여유로워졌기에 그냥 구경 삼아 시장 한바퀴를 둘러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가게에서 식물 모양이 좀 특이하게 생긴 모종이 보이길래 별다른 생각없이 사장님한테 물어보았다.
"이건 뭐에요?"
"아 이건 공심채에요."
헉 공심채?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건가.
동남아에 갔을 때 맛있게 먹었던 그 모닝글로리 볶음. 정녕 그거라고?
우리는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바로 공심채 여섯 뿌리의 모종을 구입하고는 신나게 농막으로 달려갔다.
흥분한 마음이 채 가라앉기 전에 텃밭의 흙을 적당히 정리하고는 일정 간격을 두고 공심채 여섯 뿌리를 심었다.
마지막으로 물을 흠뻑 주고는 이제 잘 자랄 일(먹을 일)만 남았구나 생각하니 참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1주가 지나고 2주가 흘렀다.
그런데 이 공심채란 녀석들은 처음 사왔을 때의 잎사귀 크기랑 별반 다르지 않았고, 비실대며 예상보다 성장속도가 더뎠다.
사실 공심채를 식물의 원판 그 자체로 본 적도 없어서 어느정도 커야 먹을 수 있는지도 가늠이 잘 안되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먹을 수 없다는 느낌은 들었다.
습한 공기가 온 동네를 에워싸던 어느 날,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우리는 농막으로 향했다.
무엇이던 기대하고 있던 시기를 지나면 관심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바라던 때에 맞춰 성장하지 못해 기대 밖으로 밀려난 공심채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유롭게 활활 생명력을 과시하며 이파리를 괴물처럼 키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무성해질 수가 있나? 식물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와 그나저나 이제 드디어 먹을 수 있다는 거잖아!"
우리는 신나서 모닝글로리를 수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그새 땅바닥에 뿌리를 엄청 뻗어서 거의 밀림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게 아닌가.
뭐 먹을 수만 있다면 이 녀석들 머리채 뽑아버리는 것 쯤이야.
수확하는 순간 줄기가 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고는 왜 공심채인지 명확하게 알게됐다.
"아~ 이래서 공심채구나!"
공심채는 그 뒤로 무서울 정도로 자라더니 옆 라인의 농작물 영역까지 침범할 정도로 무성하게 뻗어나갔다.
이제는 공심채를 보면 공포가 몰려올 정도였다.
제발 그만 좀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공심채는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저 혼자 미친듯이 춤추듯 잎사귀를 나풀대며 점차 괴물처럼 자라났다.
심지어 다른 농작물에는 주기적으로 물을 듬뿍 줬지만 공심채는 일부러 물도 주지 않았는데 말이다.
와 이걸 어떻게 다 먹지.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될수 있으면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나눠주자 싶어 수확한 공심채를 열심히 포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쿠팡 물류 알바라도 뛰는 사람처럼 공심채 잎사귀를 정리하고 신문지에 말고 비닐로 감는 포장작업을 반복적으로 해댔다.
실제로 포장 알바를 하면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해 여름엔 물류회사 직원처럼 포장 반복작업을 많이 했더랬다.
그렇게 그 여름을 공심채, 모닝글로리를 포장하고 서울로 경기도로 친구들에게 날라주면서 보내느라 다 보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심지어 아는 언니는 그렇게 좋아하던 공심채를 거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희귀한 모닝글로리를 지겹게 느끼게 될 줄이야.
아마존 밀림처럼 자란 공심채를 하도 보니 나도 질릴대로 질려버려서 나눠주기만 하고 해먹지를 않았는데, 그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공포의 모닝글로리를 돌돌 말린 신문지에서 꺼냈다.
"오늘은 꼭 너를 해먹고 말리라."
이런저런 레시피를 보고 내 스타일에 맞게 조합한 후 공심채 볶음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름에 마늘과 고추향이 배도록 볶다가, 마늘이 노랗게 되면 공심채 줄기 부분을 먼저 넣고 잎사귀를 넣어 볶는다. 그리고 양념으로는 까나리액젓과 굴소스나 간장으로 간을 보면서 마무리 해주면 된다.
나는 거기에 돼지고기랑 바질도 있으니 덮밥처럼 해먹으면 맛있겠다 싶어, 머리 속에 구상해둔 레시피대로 요리를 했다.
이 요리엔 마늘이 생명이니 옆집 어르신이 직접 농사지은 생마늘도 찹찹 썰어 넣어 볶았다.
"와. 그래 이맛이었지!"
순간 몇년 전 베트남에서 먹었던 마늘향 짙은 짭쪼름한 모닝글로리 볶음이 떠올랐고, 나는 어느새 꼬꼬마 테이블에 놓여있는 사이공 비어를 한잔 들이키며 호치민의 한 작은 식당으로 이동해 있었다.
후덥지근한 날씨로 한낮에 흘린 땀을 공심채의 짭쪼름한 양념이 염분 보충을 해주며 다시 에너지를 끌어올려주는 듯 했다.
참 익숙한 향이면서도 계속 끌리는 맛이로다.
대한민국 땅에서 자란 공심채로 만들어도 동남아 맛을 느낄 수 있다니.
음식은 여행에 대한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올해에도 나는 공심채를 심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반드시 두 뿌리만!
★ 사진 및 일러스트 : 직접 찍고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