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는 이 익숙한 목소리에 뭐라도 반응해야 할 것 같은 중압감에 억지로 고개를 꺾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제발 아니기를..’
그새 뒤로 바짝 붙은 그의 목소리가 건널목을 건너 가까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 황과장 이제 퇴근하나봐.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거야?”
미리는 통화하고 있던 전화기를 팔 아래로 떨어뜨리고 예상했던 그 얼굴에 대고 꾸벅 인사를 했다.
“금형님. 잠시만요. 제가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
“아 부장님. 아 아뇨. 컨디션이 좀 안좋아서 집으로 가려구요. 부장님은 어디 가시나봐요?”
“응. 오래간만에 동창들 좀 만나서 한잔 하기로 했어. 친구놈이 얼마 전에 명퇴를 하게되서 말야. 거참. 우리의 말로는 다 비슷하게 돌아가니까 이거 남 일 같지가 않네.”
사무실에서 보는 고부장은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는데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그가 인간같이 느껴졌다.
‘사무실에서나 좀 인간적으로 대해주면 좋으련만. 아참.’
미리는 아까 전화하다 끊겼던 금형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금형님. 직장 상사를 길거리에서 마주쳐가지구요. 평소엔 사무실에서 냉담하고 엄청 갈구는 상산데 친구가 회사에서 짤렸다고 위로하러 간다고 하더라구요. 저 사람한테도 그런 면이 있다니 좀 의외인거 있죠.”
“허허. 그러게요. 미리님이 그 정도로 얘기하는 걸 보면 그렇게 좋은 상사는 아닌가 봐요. 언젠가는 윗사람도 아래 직원들한테 평가받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좀 좋게 행동할텐데요.”
금형의 따뜻한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는 퇴근 길 미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녹여주었다.
“아. 금형님 이번 주 토요일 두시에 시간 되요? 저희 같이 뮤지컬 공연 봐요.”
“오. 정말요? 좋아요. 아까 그래서 뮤지컬 물어본 거 였군요. 이거 제가 보여드려야 되는데 미안하고 감사해서 어쩌죠? 미리님.”
미리는 금형에게 말하고나서 묵혔던 체증이라도 내려간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경쾌하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