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리의 액티비티 3- 서핑스쿨

내게 홍조를 가져다준 너

by 클라우드나인

남편은 물 안보다 물 위에서 하는 스포츠에 자신이 있었는지, 이날따라 설레보였다. 양양에서 서핑 기초 교육 한 번 받아본 게 다인 나지만, 한 번 더 해봤다고 속으로 '쟤보다 잘해야지~!'하는 다짐을 하고 서핑스쿨에 나갔다.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발리 강사 분이었는데 이름이 '리키'였다. 한국어가 꽤 토종 발음같이 자연스럽게 들려서 나는 '우리 나라 사람 아니야?'하고 남편 귀에 속삭였는데, 남편이 아무리 한국말을 잘해도 그렇지 외양이 아예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냐며 '편견 없는 편'이라고 비웃었다. 아니, 우리 나라에도 진짜 썬탠 많이 해서 피부색 까만 사람들도 있고, (나는 선천적으로 까맣고...) 야외활동을 많이 해서 까만 사람들도 많으니까 난 진짜 리키가 한국사람이지 않을까 수업 시간 내내 의심했다. 결국에는 발리 현지분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서핑은 파도와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도와 대결하려거나 거스르려고 하면 그만큼 몸에서 힘이 더 빠진다. 파도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에 따라 몸을 맞기고 타이밍을 재야 한다. 일단 서핑을 하려면 서핑을 시작할 지점까지 보드를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게 고역이다. 파도는 해변가를 향해 부서지는데, 나는 그 반대 방향으로 헤치고 들어가려니 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빠진다. 3~4번 밖에 파도를 안 탔는데 벌써부터 힘이 들었다. 이미 물 속 깊이 들어가 있는 남편을 쳐다보니, 멀리 있지만 재밌어 하면서 웃는 게 보인다. 빨리 오라며 손을 흔든다. 난 속으로 '아, 왜 이럴 땐 눈치가 없지?' 생각하며, 좀 쉬자고 너가 리키 쌤한테 말해보라는 얘기를 하려고 열심히 남편 쪽으로 걸어들어간다. 남편 쪽으로 거의 다 왔는데, 남편은 해변가로 파도를 타고 출발했다. 열심히 걸어왔는데 이 얘기는 한 텀 뒤로 또 미뤄야 한다. 리키 쌤은 내가 힘들어 하는 티가 잘 안 났는지 얼른 보드 위로 올라가라며 부족한 자세를 고쳐준다.


적당한, 너무 높지도 얕지도 않은 파도가 다가오면 엎드렸던 몸을 힘차게 일으키면서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는다.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는 것과 일어난 후에 몸을 침착하고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어렵고 위협적인 순간에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게 강점인 나는 보드에 딱풀로 발을 붙여놓은 것처럼 편안하게 해변가까지 밀려간다. 보드 위에 서 있는 그 짧은 몇초는 정말 재미있다. 사실 파도를 탔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우리는 기초적인 수업을 들었지만,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만이 느낄 그 짜릿한 경계를 아주 아주 아주 살짝 찍어먹어봤달까.


그치만 그 몇초를 위해 몇 분을 걸어들어가서 기다려야 하는 건 서핑의 숙명이다. 스노우보드도 그렇고 이런 종류의 액티비티들은 그 짜릿한 찰나의 순간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 수반된다. 난 그 인내의 시간에 그 날 져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서핑이 나쁘지만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역설적이게도 그 인내의 시간이 있기 때문일거다. 생각해보면 계속 짜릿하고 흥분되는 순간만 있으면, 그건 더 이상 재미로 느껴지지 않을 거다. 인간은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익숙해지고 적응하기 때문이다. 실제 파도가 굽이 굽이 치듯이 서핑도 기다림과 짜릿함이 반복되기에 더 절묘한 스포츠가 아닐까.


그건 그렇고 서핑 한 이후부터 하나 얻은 게 있다. 홍조. 엄청 해가 쨍쩅한 날은 아니어서 걱정을 덜 했는데, 워낙 피부가 약한 나는 자외선을 직통으로 맞았나보다. 서핑한 이후부터 양 볼에 연지 곤지 찍은 것 마냥 빨갛고 동그란 홍조가 생겼다. 아무리 알로에를 바르고 팩을 해도 진정되지 않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홍조가 남아 있다. 자외선이 너무 강해서 그랬나. 홍조 덕(?)에 볼터치를 안해도 될 정도로 볼이 항상 빨간 나는 리키쌤과 함께 서핑을 하던 그 날이 문득 그리워진다. 지금 다시 서핑을 하게 되면 3~4번에 지치지 않고 한 10번 정도는 즐거운 마음으로 거뜬하게 파도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여행을 기다리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