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하이킥’ 전문기자가 됐다

연예부 기자, 시작은 TV받아쓰기

by mulgae


첫 연예매체는 일명 ‘기자 사관학교’로 불리는 온라인 매체였다.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기자들을 24시간 굴렸다. 조근 담당 기자들은 오전 6시부터 밤사이 일어난 이슈를 체크했다. 야근 담당 기자들은 5시에 조기 퇴근해 자정까지 주요 TV모니터링을 모니터링했다. 조야근 담당이 아닌 기자들은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보도자료를 (빨리) 쓰고, 주요 이슈의 팩트여부를 전화로 체크했다.


주 52시간 제도가 정착되기 전이었다. 조야근 수당이 있을리 만무했다. 기자 1인당 최소 하루 10개 이상의 기사를 써야 했다. (최근 그 매체 기자들이 쓴 기사 개수를 세보니 1인당 50~60개가 기본이었다.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다) 그나마 당시엔 OTT와 유튜브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말도 안되는 업무량에 지친 기자들이 이 회사를 거쳐 여타 연예매체로 이적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기자 사관학교'라는 별칭이 붙은 것이다.


신입기자의 미션은 ‘TV보기’였다. TV에 출연한 연예인이 하는 말 중 이슈가 될만한 말을 기사 양식에 맞게 받아쓰는 것이 업무였다. 요즘은 연예매체 기자들 학력이 많이 낮아졌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비교적 명문대 출신 중 언론사 입사에 실패한 사람들이 우회적으로 선택하는 곳이 온라인 연예매체였다.


멀쩡히 서울의 4년제 대학 나와 기자가 되겠다고 입사했는데 갑갑한 사무실에서 TV만 보고 받아쓰라니 이게 기자가 할 일인가 싶었다. 방송사가 연예부 기자의 주요 출입처고 TV 시청이 중요한 업무라는 건 좀 더 연차가 찬 뒤에야 알게 됐다. 그때는 그저 부끄럽기만 한, 하기 싫은 업무였다.


하지만 내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곧 서른이었다.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면 평생 밥벌이를 못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짓눌렀다. 무조건 버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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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MBC를 출입처로 배정받았다. 여기서 출입처는 방송사에 가서 취재원을 만나는 게 아니라 TV 시청 담당 출입처다. MBC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기사로 쓰는 것이다. 당시 MBC는 김병욱PD가 연출한 인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방송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거침없이 하이킥’과 김병욱PD의 광팬이었다. '순풍산부인과'부터 '똑바로 살아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도 좋았지만 '거침없이 하이킥'은 한 회차도 빠지지 않고 다 봤다.


원래 애정이 있으면 기사도 열심히 쓰는 법이다. 거기다 절실하기까지 했다. 그리 길지 않지만 잡지사 경력도 있었으니 다른 생짜 신입기자들과 내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단순한 줄거리 받아쓰기지만 열과 성을 다했다. 비슷한 시기 입사한 기자들이 “이런 기사를 누가 보냐”고 투덜거릴 때도, ‘누군가는 읽겠지’라고 생각하며 줄거리를 요약했다. (실상 TV모니터링 기사는 지금도 연예매체에서 가장 조회수가 높은 기사다)


열심히 쓰니 포털사이트에서도 종종 기사가 메인에 걸렸다. 친구들 사이에서 ‘거침없이 하이킥 전문기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업무는 매너리즘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도파민을 원하게 됐다.


신입 기자가 가장 손쉽게 도파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시청률로 ‘조지기’였다. 장안의 최고 화제 시트콤인만큼 0.1%만 시청률이 떨어져도 ‘시청률 하락세, 왜?’라는 제목을 붙이곤 했다. 포털사이트는 네거티브 기사를 좋아했다. 조금만 부정적인 논조로 기사를 쓰면 메인사이트에 척척 걸어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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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잔뜩 성이 난 김병욱PD가 직접 회사로 항의 전화를 걸었다. 녹화하다 포털사이트에 뜬 기사를 읽은 모양이었다. 김PD는 “우리 프로그램이 그렇게 심각하게 시청률이 떨어진 게 아니지 않냐”라며 항의했고 나는 “시청률 조사회사가 제공한 시청률 수치에서 보면 일정 부분 하락한 게 팩트다”라고 맞받아쳤다.



사실 김PD의 지적대로 0.1%는 일희일비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입기자의 손버둥(손으로 썼으니)에 애꿎은 프로그램이 놀아난 셈이었다.


훗날 시간이 흘러 김PD와 사석에서 만났다. 전화로 몹시 성을 냈던 그는 극I성향의, 굉장히 예의바른 중년 사내였다. 몇몇 매체를 통해 알려진대로 우울증을 앓았지만 그런 우울증이 꼼꼼하게 사람을 웃기는 장치를 심는 동력이 됐고 그를 시트콤의 대가로 만들었다. 언제 성을 냈냐는 듯 그는 나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비록 깊은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가까워지진 못했지만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전해 들으면 반가워할만한 사이가 됐다(고 혼자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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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방송한 '거침없이 하이킥' 후속 '지붕뚫고 하이킥'도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요즘은 잘 나가는 드라마의 배우와 스태프들을 위해 포상휴가를 보내주곤 하는데 당시엔 종방연을 대대적으로 개최하는 게 유행이었다. 보통 드라마가 고깃집에서 종방연을 여는 것과 달리 '지붕뚫고 하이킥'은 63빌딩 뷔페에서 열렸다. MBC 고위 임원과 출입기자들도 모두 초청됐다. 그 자리에서 신세경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며 카페베네 로고와 함께 '커쥬 마이 걸' OST가 흘러나오는 충격 엔딩을 함께 목격했다. 출입기자들 모두 예상치 못한 결말에 얼음이 됐다. 김PD는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예감했는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후 김PD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감자별 2013QRS' 등을 연출한 뒤 기획사와 함께 중국에 진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이후 한국PD들이 너도나도 중국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사드 사태 이후 귀국해 TV조선 ‘너의 등짝에 스매싱’ 등을 연출했다. ‘너의 등짝에 스매싱’은 김PD의 페르소나인 박영규가 사돈집살이를 하는 몰락한 가장으로 출연하는 시트콤이다. 안타깝게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고 김PD는 이 작품 이후 더 이상 연출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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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 시리즈의 팬으로 김PD의 부활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렸던 이로서는 안타깝기 그지 없을 따름이다. 비록 ‘시트콤 거장’은 조용히 왕좌를 떠났지만 언젠가 다시 한번 하이킥을 날리며 왕좌를 탈환한 날이 오지 않을까. 20년차 기자가 된 지금은, 도파민 중독에서 벗어나 날카로운 시각의 기사를 쓸 수 있을텐데. 그와 나 사이에 간극은 좁혀지지 못한 채 2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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