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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 박하림 Mar 26. 2020

02. 평정과 산란의 시소

요가를 잘 하는 것도 아닌, 못하는 것도 아닌


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갈망하면서도, 얄팍한 힐링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렇다.

친구가 추천해 준 요가 강사의 책을 펼치기를 망설인 것도 그래서였다.


사실 최근에 '힐링'이라는 키워드로 출간되는 책들 중 다수가 힐링보다는 페인킬링에 가깝다. '인생 원래 다 그래, 인관관계 원래 다 힘들어, 욕심을 버려, 가지려고 하지 마, 손절할 사람 손절해'와 같은 자조적인 말들은 진통제일 뿐 치료제일 수는 없다. 지금 진통제를 삼켜도 약효가 다 하면 여전히 인간관계에서의 상처는 쓰리고, 공들인 실패는 잊혀지지 않는다. 나를 끊임 없이 괴롭히는 누군가는 결코 손절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가지지 못했지만 욕심나는 것이 내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꿈일 수도 있다. 그러니 언젠가는 직면해야 한다. 또다시 진통제로 통증을 잊을 것인지, 치료제로 근본적 해부를 시작할 것인지. 나는 나부터가 진통제에 짧지 않은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서 더 이상의 진통제는 원치 않는다.


만약 이 책이 '여러분 모두 욕심을 내려놓으시고 흐르듯이 살아가세요, 요가를 하면서요'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면 읽다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나와 비슷하게 무모한 본태성 욕심쟁로서, 자꾸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여온 사람이었다.


진료 시간에 선생님이 언젠가 '스스로를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세요?'라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 질문에 답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꽤 오래 전부터 나 자신에 대해 뚜렷한 심상을 가지고 있었다. 충동과 외로움이라는 거친 쇳덩이가 이성과 사랑이라는 둥근 틀 안에서 끊임 없이 깎이고 갈려나가는 모습. 처음에 갈릴 때에는 모난 조각들을 강하게 쳐내느라 많이 아팠지만, 어느 정도 둥근 틀 안에 잘 머물게 되면서 점차 견딜만 해졌다. 그리고 견딜 값어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더 가뿐해졌다. 지금은 명상과 요가를 만나 조금 더 정교하게 갈아내기 시작한 것 같은 기분이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점은 '이효리는 요가 잘 하는 거에요?'라는 물음에 대해 그가 가진 생각이었다. 사실 내가 구독하고 있는 요가 선생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셨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요가 동작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 만약 그랬다면 체조 선수들은 요가를 한 번도 해보지 않고도 요가 고수로 등극할 수 있었을 텐데, 요기니들이 체조 선수들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잖아?


요가에서 중요한 것은 동작을 잘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동작을 하는 가운데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정신을 모으다'라는 말이 좀 비과학적으로 들려서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에 온전히 집중한다'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집중의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집중과는 조금 다르다. 집중의 결은 다르지 않지만, 외부 사물에 대한 집중과는 달리 나 자신에 대한 집중은 사뭇 신기한 되먹임 효과를 갖는다. 외부 사물에 대한 집중은 나의 정신력을 그것에 투입해서 그것으로부터 지식 혹은 지혜를 얻어내는 과정인 반면, 나 자신에 대한 집중은 스스로의 힘을 스스로에게 투입해서 순환의 고리를 강화하는 과정인 것 같다. 내가 스스로를 더 균형회복탄력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 요가의 본질은 그것에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왜 요가에 '난이도'라는 게 있을까? 그건 사람이 몸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몸이 아플수록, 몸에 더 강한 하중이 가해질 수록 우리의 정신은 그곳에서 떠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렵다. 요가에서 신체에 더 과감한 요구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른 호흡을 유지하며 온전한 나 자신에게 머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일일 것이다. 즉 더욱 더 단단한 균형을 잡아가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최근 나는 약의 몇가지 부작용으로 힘들었다. 특히 식사 후에 어김 없이 생기는 심계항진과 그로 인한 불쾌한 상기증이 좀 괴로웠다. 그 때문에 여러번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나의 정신은 내 몸의 불편함에서 주의를 떼지를 못했다. 그래서 내면의 중심이 흐트러졌고, 의식이 흐려졌고, 쉽게 지쳤다.


어제 한때 탐독했었던 철학자의 책을 가볍게 훑어보며 문득, 내가 그런 신체 증상을 좋은 신호로 인지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심장 박동 수의 증가란 한편으로는 내가 불안을 느낀다는 신호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온 몸에 혈액이 가득 공급되어 무엇이든 능률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불안하기 때문에 불안에 매몰되어 무기력해질 수도 있고,더 속력을 높여 성취를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심계항진은 내가 더 깊게 공부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제 하루동안은 효과가 있었는데, 오늘도 그럴지는 두고 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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