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지망생으로 살아남기

작가지망생으로 살아 남는 법

by 엽서시

#1.

아는 사람이 죽었다면.

길에서 마주치면 겨우 인사하는 사이의 아는 사람이 죽었다면. 같이 학교를 다녔던 친구가 죽는다면. 같이 일을 하던 사람이 죽었다면. 함께 술을 마시고 어깨를 부비던 친구가 죽었다면. 어제까지 같이 즐겁게 떠들었던 사람이 죽었다면.

죽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또는 어제 이름을 안 사람이 죽었다면.

가로등은 빙글빙글 웃는 낯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러운 주황색 혀가 나를 핥고 있었다. 그 혀가 스친 부분이 너무 아팠다. 퉁퉁 부은 얼굴이 아팠다. 가로등에 매달린 볼록거울이 그 둥그런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 거울마저 나를 놀려대겠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담배를 꺼냈다. 그렇지만 도저히 필 수 없을 정도로 담배들은 부서져있었다. 담배를 내던지고, 내던지고 담뱃갑마저 집어 던졌다. 담뱃갑 안에 든 라이터가 흔들리며 길바닥에 부딪쳤다.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꾸깃한 종이가 만져졌다. 손이 떨렸다. 너무 맞으면 춥지 않아도 손이 떨린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종이를 꺼냈다. 칼라프린트로 인쇄된 사진을 보았다.

다시 눈물이 흘렀다.

아까는 아파서 흘린 눈물이었는데,

지금은.

지금은 너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

사진과 사진 아래의 이름을 읽었다. 숨이 막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울음이 턱을 세게 쳤다. 입 안의 피를 뱉었다. 덧니가 입 안의 속살을 찢어버린 것 같았다. 피를 뱉었다. 턱이 울렸다. 한참 혀를 움직이고 나서 입 안에 사그락거리는 것을 뱉을 수 있었다. 작은 이빨조각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대체 어느 이빨인지 손가락으로 더듬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팠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아니, 허파가 아팠다. 무딘 내 신경과 짧은 내 어휘로 표현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게 더 아팠다. 사람이 죽었는데, 내가 느끼는 건 누군가 안쪽에서 허파를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사실적이었고 그래서 더 아팠다.

피를 뱉었다.

손에 든 사진을 구겼다. 사진과 이름이 내 손 안에서 구겨졌다. 실제로도 내 손으로 구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잠깐 울었다.


#2

경찰이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를 ‘보고’ 있었다. 모니터 뒤에서 경찰이 정말 타자를 두드리는지 아니면 타자 소리만 내고 있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내용을 다 기입해 놓고도 소리만 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토종닭 집이 그렇지 않은가. 손님들 앞에서만 닭을 패대기치지만, 이미 냄비에는 닭이 끓고 있다. 물론 그 닭도 토종닭일 테지. 미국 켄터키나, 브라질 리우에서라면.

어쨌거나 그렇지만 경찰은 연신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냉동닭일지 생닭일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내 눈앞에서 적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타닥, 차닥, 빗방울이 천 지붕을 두드리는 것 같은 타자 소리가 좁은 지구대 안을 메다. 나는 양 손을 다리 사이에 늘어뜨린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길게 자란 앞머리가 눈썹을 지나 눈을 찌를 때마다 손을 올려 앞머리를 치웠다. 그렇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앞머리가 내려와 눈을 간질였다.

“나이는?”

편의점 알바인 나는 말투에 민감하다. 지금과 같은 말투에 특히 그렇다. 무시 하는 말투. 목구멍에서 말을 끄집어 내 상대방에게 툭 던지는 말투. 내 얼굴을 맞고 흐르는 거만한 말투. 그렇지만 사실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없다. 바코드로 찍은 상품 가격을 올릴 수도 없고 라면이나 삼각김밥에 침을 뱉어서 줄 수도 없다. 가격을 말하며 난 고개를 든다. 길게 자란 앞머리가 내 눈을 가리길 바라며.

“21살이요.”

하고 중얼거리면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힐긋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나는 저 남자가 가발을 쓰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연신 손수건을 꺼내어 반질반질한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다가 내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곤 했다.

경찰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경찰은 내가 듣지 못했을 거라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난 들었다. 뭐 사실 크게 개의치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래도 뭐.

“직업은, 직원은 아니시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이렇게 기입합니다.

난 이미 경찰이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를 ‘보았다’. 경찰은 이미 나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어딘가의 냉동고에서 잠들어있을 차가운 냉동 닭만큼이나 차가운 경찰의 시선이 내 얼굴을 어림잡으며 핥고 있었다. 난 물을 마시려는 닭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찌르는 머리를 넘겼다. 경찰 머리 위에서 형광등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구대 안에 있는 형광등은 편의점 안에 있는 형광등과 똑같았다.

그래서였다. 내가 이상한 말을 지껄인 것은.

"알바 아닌데요."

어느새 경찰은 타자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편의점 형광등과 똑같은 형광등 아래에 앉아 화면을 등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경찰의 눈빛은 편의점 계산대 앞의 내 눈빛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대에 줄이 밀려있는 데도 껌을 고르고 있는 손님을 보는 나의 눈빛.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어서 고르고 내려놓으란 말야. 이 병신아.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손님은 절대 껌을 빨리 고르지 않는다. 결국 1분을 한 시간 같이 써서 고른 껌을 계산대에 놓고 나면, 이번에는 담배를 고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피던 걸 피면 될 것이지, 멍청한 놈.

그러나 명백한 사실이다.

서비스 직종의 안달 난 눈빛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대접받고 싶어 한다. 경찰의 눈은 충분히 안달이 나 있었고, 따라서 화면을 등지고 있는 나도 고민할 권리가 있었다.

뭐라고 말해볼까.

검사, 궁수, 도적······.

암살자?

암살자 지망생이라,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오히려 현실적이었고.

“작가······. 지망생이요.”

중간에 말을 더듬는 바람에 비현실적이 되어 버렸다.

경찰은 한참을 더 나를 바라보았다. 경찰은 내가 말을 더듬는 것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경찰은 그저 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눈을 가리고 있는 내 얼굴에서 무언가 해답이 나오길 바라는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편의점 직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할 때까지 내 귀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골프핀 모양의 귀걸이를 잡아당기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

“알았습니다. 그럼 목격자 분은 저기 가서 기다리시고, 저기 피해자분 이리로 오십쇼.”

암요. 저기 가서 기다려얍죠. ‘목격자’인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옆자리의 양복을 입은 ‘피의자’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그는 내 눈을 피했다. ‘피해자’가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것이 들렸다. 목격자인 내가 여태까지 조서를 쓰는 동안 피해자는 뒤에 자리에 앉아 화장을 태연하게 고치고 있었다.

그녀는,

틀어 올린 갈색머리. 수갑만한 은색 귀고리. 얇은 은 목걸이. 왼손 약지에 낀 베베 꼬인 은반지. 길게 기른 에메랄드빛 손톱. 달라붙는 짧은 베이지색 치마. 살짝 늘어진 붉은 체크무늬의 남방을 치마 위에서 맞춤하게 묶고 있었고, 앤디 워홀의 그림에서 베낀 듯한 마릴린 먼로가 입을 벌리고 있는 그림이 있는 흰 티가 쇄골 아래까지 속살을 보여주고 있는 채,

경찰서 안을 가로지르며 걸어왔다.

그렇지만 그녀에게서 가장 돋보이는 건 다름 아닌 쭉 뻗은 그 하얀 다리였다. 스타킹조차 신지 않은. 힐을 신지 않아도 그녀의 키는 어림잡아 170Cm가 넘어보였지만, 그녀는 높은 힐을 신고 있었다. 외려 우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는 껌을 씹으며 슥 나를 지나쳐 갔다.

피해자와 피의자, 경찰 세 명이 무언가 작당을 꾸미는 동안 난 경찰서 밖에서 담배를 피고, 편의점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해명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밖에서 좀더 떨어야 했다. 어쨌거나 때는 9월 말이었고, 저녁의 가을 날씨는 대단히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시 생각하는 것이지만 스타킹도 신지 않은 그녀의 맨다리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우리 편의점에서 따뜻하고도 질긴 스타킹 한 벌이 4900원이던가.

합의인지 뭔지, 마침내 경찰서에서의 볼 일이 다 끝났다. 사장은 경찰서에서 내가 보낸 시간 동안의 시급을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난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했다. 제기랄,

하고 욕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서비스 직종에 오래 종사한 사람의 특성답게 실제로 욕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설령 다른 사람이 내 입 모양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냥 투덜거리는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였다.

“저기요.”


#3

난 대답을 하는 대신 돌아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나의 눈높이는 거의 비슷했다. 여자와 눈을 마주치는 일도 불편하지만 여자와 그런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본다는 일도 더욱 불편했다. 게다가 서비스 직종에 오래 종사한 사람의 특성답게 나는 눈을 마주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내 직업은 그렇다. 흰색과 검은색의 사람의 눈을 마주치기 보다는 흰색과 검은색의 바코드와 눈을 맞추는 일이 더욱 익숙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저기요.”

하고 조금 더 짜증 섞인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꾸할 수 밖에 없었다.

“왜요?”

“그냥요. 고마워요.”

고맙단다.

“됐슴다.”

되긴 뭐가 돼.

“그래요?”

그래요, 라니.

“예. 앞으론 이런 일 없길 바라겠슴다.”

하고 말을 마치며 나는 돌아서고 싶었다. 정말이었다. 물론 여자와 실제로 마주쳐 대화를 나누는 게 거의 5년만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전화로는 꽤 경험이 있지만). 그녀가 고개를 우로 살짝 틀었다.

“그쪽 진짜 ‘작가지망생’, 맞아요?”

뭐라구?

“네?”

이제 당황한 건 나였다.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쪼그라든 풍선이 뱉어내는 마지막 숨만큼이나 가벼웠다.

“아니, 아까 그쪽이 경찰한테 그랬잖아요. 작가지망생이라고.”

“아······. 네.”

“아까 졸라 웃겼던 거 알아요? 편의점 알바가 편의점에서 목격해놓고선 지 직업이 작가지망생이라니까 경찰 완전 벙쪘잖아.”

“아······.”

말이 길어지면서 그녀는 주머니와 핸드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난 그녀가 핸드백에서 무언가 벽돌 같은 것이라도 꺼내지 않을까 주의하면서 대답했다. 마침내 그녀는 팔리아멘트 담뱃갑을 꺼냈다. 담뱃불을 붙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가을바람이 꽤 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난,

“저기, 안 추워요?”

하고 물어볼 수 있었다. 그녀는 우습다는 듯이 담배연기를 ‘내 얼굴에’ 뿜더니 연기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듯 잠깐 기침을 했다. 그리고 예의 그 가벼운 웃음을 던졌다.

“안·춥·네·요, 괜한 거 물어보지 마. 당연히 안 추우니까 이렇게 입었지.”

그리고 나선 그녀는 또 내가 ‘아, 네’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역시나 순간적인 질문이었고, 난 다시 당황했다.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지금 편의점에서 내가 시급을 받는 시간 대신 일하고 있는 사람은 점장이었다. 아마 지금도 점장은 시계를 열두 번도 더 보고 있을 터였다.

“그럼 작가 지망생씨는 이름이 뭐예요?”

지금 말하자. 지금 바쁘다고 말하고 다시 돌아가자, 라고 생각했다. 그때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고, 다시 머리카락을 걷어 올려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예쁘진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아니, 뭐 적어도 그랬다는 생각이다. 순간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 안에서 나 대신 갇혀있을 점장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미소 앞에서, 내가 돌아가야 할 편의점은 어디 화성이나 목성의 고리 안쪽으로 옮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예 돌아갈 수조차 없는.

그래서 난 바쁘다고 말하는 대신 내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난 제인이야. 22살. 넌?”

그녀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듣기만 해도 가명이 분명한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으로도 만족했다. 곧 자기가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그녀는 내게 말을 놓았고, 이후로도 쭉 말을 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째서 그때 난 그녀의 본명이 궁금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 그때라면, 그녀는 본명을 쉽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그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그 첫 만남이 시작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지만 아무튼지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날 정도로 어설픈 만남이었다.


#4

하품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하품을 쩍 하고 났을 때

였다.

갑자기 종소리가 문을 두드리면서 다급하게 문이 열렸다. 내가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폭풍처럼,

그렇게 그녀가 몰아쳐 들어왔다.

그녀는,

틀어 올린 갈색머리. 수갑만한 은색 귀고리. 얇은 은 목걸이. 왼손 약지에 낀 베베 꼬인 은반지. 길게 기른 에메랄드빛 손톱. 달라붙는 짧은 베이지색 치마. 살짝 늘어진 붉은 체크무늬의 남방을 치마 위에서 맞춤하게 묶고 있었고, 앤디 워홀의 그림에서 베낀 듯한 마릴린 먼로가 입을 벌리고 있는 그림이 있는 흰 티는 쇄골 아래까지 속살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속살에 집중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미친 것처럼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내게 걸어왔다. 힐을 신은 채였다. 편의점 바닥과 힐이 맞부딪쳐 나는 소리가 그녀 뒤를 따라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살려줘요.”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보다는 ‘느꼈다’. 편의점 바깥에서 허둥거리며 달려오는 양복 입은 남자가 보였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추격전이었고 난 비루한 남자 주인공을 맡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주인공이 그러하듯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위험에 빠져 주인공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는’ 그녀의 흰 손목을 잡아챘다.

팔찌가 서로 부딪치며 와그랑, 하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절대 손님들은 출입할 수 없는 계산대 안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면서 나도 모르게 CCTV쪽을 훔쳐보았다.

세 달 전인가 오후 타임 알바를 뛰는 여자애가 점장에게 왜 CCTV가 계산대 쪽으로 있는지 모르겠다며 기분 나쁘다고 성화를 부렸을 때였다. 점장은 여자애를 달래며 사실 저건 먹통이라고 기계만 돌아가고 있지 테이프도 안 넣었다고 지껄였다. 그때 나는 코웃음을 쳤다. 요새 CCTV에 테이프가 웬 말이더냐. 아마 점장 집의 컴퓨터 왼쪽에는 실시간으로 계산대 화면이 생중계되고 있을 것이다.

만일 지금 점장이 그 화면을 보고 있다면 어떨까 싶었다. 결국 계산대에서 음식을 먹다 들켜 잘리게 된 그 여자애(점장은 정확히 계산된 시간에 편의점에 들이닥쳤을 것이다)처럼, 나도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그때 편의점 바깥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양복 입은 남자가 갑자기 무언가 결심을 한 것처럼 문을 열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5

왜 난 그때 어서 오십쇼, 라고 말 했던 걸까.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부는 양복 입은 남자가 그냥 손님이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잘못을 저지른 게 그녀인지도 모른다. 술자리에서 저 남자 돈을 훔쳤다던가. 알게 뭐야. 너도 눈이 있으면 봐봐. 그녀는 사실······.

“야이 씨발로마, 넌 뭐야.”

그는 헐떡이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고대의 용이 그러 듯이 술 냄새가 섞인 숨을 내 얼굴에 뿜어댔다. 술에 취한 사람을 대할 때면 나는 늘 고민에 빠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사이에서 떠돌던 나는 다시 한 번 침착하게 어서 오십쇼, 라는 말을 해버렸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이 씨발로마, 넌 뭐냐고? 너도 한 패야?”

“예?”

그는 욕설을 중간 중간 섞으며 어째서 내가 ‘씨발롬’인지 주장하기 시작했다. ‘씨발’ 세상은 ‘씨발’, 돈 많고 잘난 ‘씨발’ 놈들 거고 ‘쥐뿔도 없는’ 자신은 ‘존나’ 치이기만 하고, 저 ‘씨발’ 년도 한 패고. 그건 ‘씨발’ 너도 마찬가지고······.

남자의 걸쭉한 욕설은 내 귓바퀴 어딘가에서 모두 차단되고 있었다.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중간중간 난 슬쩍 눈을 깔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타킹을 신지 않은 그녀의 흰 다리를.

그때 남자가 계산대를 내리쳤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남자의 궁극적인 분노의 원인은 ‘노래방 도우미’인 이 ‘씨바련’이, 2차를 갈 것처럼 갈 것처럼 그의 마음을 들뜨게 해 놓고선 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그가 모텔을 잡는 동안 밖에 있던 그녀가 도망간 모양이었다.

구부러져 있는 성욕에 자리 잡고 있던 분노가 술기운을 타고 울분으로 점점 번지면서, 그는 ‘왜 씨발 나한테만 그래’와 ‘어디 좆같아서 세상 살겠냐’며 절규했다.

분노가 그의 입에서 파편처럼 터져 나와 그녀를 적셨다. 술냄새가 섞인 축축한 침과 같은 그의 분노가 내 발목을 찰랑찰랑하게 적시고 허벅지를 축축하게 만들다가 마침내 우리의 턱 끝 까지 차올랐을 무렵,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아까처럼 와그랑, 팔찌가 비명을 또 질렀고 이번에는 그녀도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나도 그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그의 눈은 쏟아져 나올 듯이 불거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예의 그 ‘씨발로마’를 내뱉기 전에,

나는 조용히 다른 손으로 가게 안의 CCTV를 가리켰다.

‘씨발로마’를 내뱉는 대신 그는 나를 한 번 보고, 그녀를 한 번 보고, 그리고 CCTV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곱게 집에 가길 바랐다. 아직까지 내게 있어 그는 그저 평범한 진상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더 난동을 부린다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오기를 부리는 그의 태도, 억지로 화를 쥐어짜내는 그의 몸짓은 내게 우스꽝스러운 안무처럼 보였다. 술이 깨고 나면 후회할 행동. 그가 술이 깨고 나면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부끄러운 짓을 하는 동안, 소리를 지르고, 진열대 하나를 뒤엎고, 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고 고함을 지르는 동안, 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점장이 말한 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7초가 지났다. 남자는 여전히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손목을 뿌리쳤고, 난 남자를 가로막았다.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2분이 채 되기 전에 편의점 바깥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경찰 두 명이 들어왔고, 한 명은 여자였다. 남자는 순식간에 얌전한 고양이처럼 편의점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경찰이야말로, 그 ‘씨발’같은 세상의 결정체였기 때문에. 그러나 편의점 안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씨발. 난 한숨을 쉬었다. 아, 진짜 세상은 ‘씨발롬’같구나, 생각하는 순간

다른 한 경찰이 내게 말했다.

“저, 목격자 분께서도 서로 가주셔야겠는데요.”

네?

“네?”

경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 역시 그 질문의 진의를 바로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경찰에게 지금 이 편의점 안의 난장판과 내가 이 것을 청소해야 된다는 것과, 내가 편의점을 비운다면 일어날 사태에 대해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 나를 끌고 갈 것이었다. 그 뒤에는 법이 있고, 법 뒤에는 대한민국이 있고, 대한민국 뒤에는 ‘씨발롬’같은 사회가 있는데, 아무튼. 어쨌거나.

난 결국 점장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빨리 깨우친 것과 달리 점장은 내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난 경찰에게 내 휴대폰을 넘겨주었고,

두 마디 만에 점장은 이해했다. 점장도 법과 대한민국과 그 ‘씨발롬’을 알고 있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외투를 걸치고 편의점 문을 잠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경찰차에 올랐다.

내 옆에는 그녀가 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난 내가 아직 편의점 알바가 입는 조끼를 입고 있다는 사실에 혼자 웃었다. 아마 난 미처 깨닫고 있지 못했지만 사실 그 때에도 내 직업을 편의점 알바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시 날 깨닫게 해준 건

경찰서 안에 가득 찬 법과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있는 기타 모든 것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경찰서에서 내리고 한 20분쯤 지난 후, 난 내 직업을 ‘작가지망생’으로 말했고,


#6

20시간 후 난 왜 작가지망생이라고 했던 건지 후회할 뿐이었다.

주말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내가 쓰는 작품들이 관심 있다고 말했다. 내가 아무리 구차하게 설명을 해도, 그녀는 꿋꿋이 그 작품들을 보고야 말겠다고 작정한 듯 보였다. 어쩌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도 같았고,

그걸 밝혀내서 날 망신주고 싶어 하는 것도 같았다. 그 얄미운 모습은 다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곤 했다. 고작 한 시간이 걸렸을 뿐인데도 점장이 내게 지랄을 해댄 것보다도 그녀와 약속을 했다는 것이 더 싫었다.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나타나고,

내가 연필을 휘두르는 노트 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연필이 움직임을 멈췄다. 멍하니 유리를 통해 편의점 밖 거리를 내다보았다. 한산했다. 혹시 난 그녀가 그 길을 걸어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만일 그때 그녀가 걸어갔다 하더라도 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뭐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낮에 화장을 하지 않으니까.

가슴 어딘가가 꽉 막힌 기분이었다. 목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꽉 막힌 것을 꺼내어 주물러 본다면, 대답은 딱 하나였다. 다시 그녀가 보고 싶었다.

다시 봐서 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머리의 핏줄을 꽉 막고 있는 무언가가,

거짓말이라고 말하게? 내가 작가지망생이라고 했던 건, 그냥 경찰이 짜증나서 한 거짓말이었다고? 사실 난 고졸 학력의 편의점 알바일 뿐이라고? 해버려.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저년은 노래방 콜걸 아냐?

하고 지껄여 댔다. 닥쳐. 머릿속에 기관총을 퍼부어댔다. 놈이 잠잠해지고 다시 떠오른 생각은 뚜렷했다.

보고 싶었다.

누가?

그녀가.

지금 내가 떠올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실제 그녀의 얼굴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머리카락과 눈썹, 입술의 색깔, 아이라인, 눈, 콧날, 손톱 등이 마구잡이로 섞인 카드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이 모자이크들을 모두 합친 것이 정말 그녀가 맞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 팔이 움직이고 있었다.

연필이 노트 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노트위에는 몇 개의 조잡한 선이 교차되고 얽히면서 그녀의 얼굴을 닮은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약 15분 전 쯤에 그렸던 그림. 노트를 가로지르던 연필은 마침내 그 그림 위를 짓밟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연필을 움직이는 손이 더 대담해지면서 나는 노트 위에 그려진 그녀의 캐릭터를 마구 덧칠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화가지망생이라고 했다면 더 나았을까?

순간 연필을 멈추고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엉망이 된 그림, 아니 이제 더 이상 그림이라고 할 수 없는 검은 흑연덩어리가 종이 위에서 검은 선으로 만들어진 몸을 뒤틀고 있었다. 이건 자위였다. 활자로 쓰인 자위의 의미가 아닌, 정말 딸딸이로서의 자위. 휴지 위에 내갈기는 일순간의 만족과 타락,

과 비슷했다.

대학도 가지 못했다.

시간은 가고 나이는 먹지만 난 여전히 고졸일 뿐이다. 겨우겨우 알바밖에 못하는 현실에서 그래도 남들과 다르다고 그려대는 볼썽사나운 그림들. 어느새 난 나도 모르게 노트를 넘겨보고 있었다. 한 장 두 장 넘어가는 종이 위에는 그림이 아닌 말라붙은 정액자국처럼 번진 흑연자국만이 보기 싫게 남아있었다.

갑자기 그 그림들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겨서 휴지통에 넣고 싶었다. 자위의 결과가 다 그런 것처럼. 정말 이 그림들이 수음의 흔적과 다름없다는 건 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잠깐 손에 힘을 주었을 뿐, 종이를 구기지 않았다. 이것마저 없다면. 이 더러운 휴지뭉치 같은 것들이라도 등 뒤에 숨기지 않는다면.

정말로 난 그냥 쓰레기 인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지망생이라는 거짓말은 대체 뭐야?

그 순간 서비스업에 오래 종사했던 사람의 입을 뚫고 욕이 터져 나올 뻔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눈을 몇 번 끔적이고야 말았다.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 나는 절실하구나.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글을 지어내야한다. 내가 어떻게 지껄인 거짓말이건 난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뭐 사실 내가 작가지망생 따위가 아니라는 걸 그녀가 알아챈다하더라도, 내가 그냥 고졸 인생이라는 걸 안다 하더라도, 경찰이 내게 사기죄로 수갑을 채우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시시껄렁한 순간이었다. 별 것도 아닌 여자에게 별 것도 아닌 거짓말을 하지만, 어쨌거나 당시의 순간만큼은 별 것이 아닌 셈이었다.

사실 이 별 볼일 없는 세상에서, 별 것도 아닌 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막대한가.

결국 별 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인 셈이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이 고민의 순간도 따지고 보면 별 볼일 없는 내 삶에서 굉장한 고민이었던 셈이다.

그 사실이 나를 웃게 했다.

천천히 마음에도 여유가 찾아오며 생각은 곁가지를 쳐 나가기 시작했다. 편의점 옆의 학원이 끝나고 중, 고등학교 애새끼들이 기어 나오려면 이제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학원 시간대가 끝나고 나면 취객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놈들을 취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술 취한 개 같은 새끼들이 도무지 예측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이러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 널럴한 이 시간은 그 바쁜 때를 위한 잠깐의 보상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뜬금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고졸. 편의점 알바. 딸딸이. 작가지망생. 애새끼들. 같은 썩어빠진 단어들이 거름이 되어 잘 뒤섞여 무언가를 피워낸 것 같았다. 아직 글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작가지망생이었지만 마음이 편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학원이 토해낸 미성년자 애새끼들이 담배를 사려고 별 수작을 다 부리는 것들을 막아내고, 도둑질을 하려는 개새끼들한테 소리를 지르고, 술 먹고 들어와 온갖 행패를 부리는 개 같은 새끼들과······. 새벽차로 받아서 날라야 하는 상품과······. 청소······. 분리수거······.

따위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알바가 끝난 새벽에는 노곤한 몸과 텁텁한 입안과 축 늘어진 팔다리가 집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양말을 뭉쳐 어딘가로 던졌다. 눈이 시린 발 냄새가 침대 위를 기어오기 시작했다. 베게에서는 오래 묵은 살 냄새가 발효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모든 냄새가 섞인 방의 공기를 들이마시자 마른 입안에 구역질이 감돌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구역질이 나는 것은,

오늘이 벌써 지나갔다는 생각, 생각이 아닌 바로 그 사실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만 벌써 오늘이 지나가고, 내일 할 일들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편의점 야간알바도 있고 작가지망생, 결국 이 거짓말은 들키고 말 것이고.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온갖 잡생각들이 여기저기 시린 근육을 파고들며 뿌리를 뻗어댈 뿐이었다. 잡념들이 머리 두개 달린 개처럼 서로 물어 뜯어대는 그 순간,

난 고등학교 이후로 수없이 되풀이 했던 그 생각을 다시 하고야 말았다.

죽고 싶었다.

조용히 빠르게 끝나버리고 싶었다. 쉬고 싶었다. 잠깐의 휴식, 며칠의 휴식이 아니라 영원한 휴식을 원했다. 뿌리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나지 않는 곳에서 흙에 파묻혀 물이나 마시며 조용히 다리를 뻗고 싶었다. 그렇지만 눈을 뜨면 날 덮고 있는 흙은커녕 나와 천장 사이의 숨 막히는 공간만이 시커먼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이 내게 있어서는 단두대 같았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똑바로 누워 칼날이 자기 목으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봐야 했던 프랑스왕비와는 달리 나는 매일 밤 내게 절대 칼날을 떨어뜨리지 않는 천장을 바라보다 잠들어야 했다. 이 지옥 같은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고,

다시 눈을 떴다.

이야기가 떠올랐다.


#7

‘두근’거렸다. 여자와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 한다는 건 수화기 너머의 여자를 대하는 것과 사뭇 달랐다. 제인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콜라 잔에 숨겨진 빨대 너머로 제인을 훔쳐보고 있었다.

작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편의점에서 한 20분 쯤 걸었던 것 같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이 근처에 ‘직장’이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뭐 그녀와 같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는지 나는 도무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 잘 해결 됐어요?”

내 첫마디였다. 순간 생각난 말이었고, 내 입에서 첫마디가 채 다 흘러나가기도 전에 난 내 입을 저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결이라니. 제인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고, 눈을 굴리더니,

“어.”

라고 대답했다.

아마, ‘합의’했겠지. 양복 입은 남자도 그리고 제인도 서로 합의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남도 직장이 있었지만, 제인도 ‘보도’라는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말할 수 없는 직장이 있었다. 경찰서에서의 일은 누구의 직장에도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었다.

다시 둘 사이에 놓인 테이블은 20분 쯤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입안에 맴도는 말들을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아직 음식이 나오려 해도 한 20분은 더 걸려야 할 것 같았다.

나와 제인 사이의 거리를 부수고 입을 연건 제인이었다. 제인은 내 ‘원고’를 궁금해 했다. 원고를 달라는 제인의 하얀 손을 보며, 테이블 아래에 감춰진 제인의 흰 다리를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제 큰 패를 걸어야 할 시간이었다. 난 침을 삼키며, 태연하게

가방에서 A4용지 무더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제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근데 그냥 얘기해 줄 수도 있는데,”

어때?

복사가게에서 주워온 것에 불과한, 엉터리 원고지들이 떨고 있었다. 제인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고, 눈일 굴리다가,

대답했다.


#8

죽고 싶어 하는 애가 있었어. 학교도 다니지 않고 알바도 안하고,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지. 응. ‘대인기피증’같은 거였어. 왜냐면······. 그건 이따가 얘기해줄게.

아무튼 이 앤 방 안에서 하루 종일 고민만 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고통 없이 편하게 죽을 수 있는지. 응. 그러니까 이 애는 한마디로 얘기하면 죽고 싶기는 하지만 그 죽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무서웠던 거지.

목을 매다는 거?

뛰어내리는 거?

수면제를 먹는 거?

손목을 긋는 거?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어. 그냥 방에서 컴퓨터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죽이고 있었지.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도 정말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그 애에겐 너무 지루했던 거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사실 그 애에게 시간이라는 건 하루와 하루를 구분할 만큼의 가치도 없었지만 그날은 그 애에게 ‘중요한 날’이었어. 그러니까 마치 꼭 생일처럼. 뭘 쓰고 점을 찍는 것처럼 그날 하루는, 그 전날과 그 다음날을 구분 짓는 날이 된 거야.

꿈같았어. 신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천사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악마의 목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들린 거야. 그 목소리는 달콤했는데, 어쨌든 그 목소리는,

그 애에게 을 준다는 거 였어.

그래, .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진짜 길고 무거운 . 그런데 그 을 주면서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 거야. 이 은 널 죽이기 위한 이 아냐. 이 은 널 죽이지 않기 위한 이야. 그러니까 이 은,

네가 이렇게 ‘대인기피증’ 된 원인만 쏴 죽일 수 있는 이거든.

이렇게 말한 거야. 그러니까 이런 거지. 예를 들어서, 응. 만일 왕따를 당한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이 너무 괴로우면, 그 기억을 쏴 죽일 수 있는 거야. 아무튼 그런 얘기를 하고 목소리는 사라졌어.

애는 꿈에서 깼지. 아니, 그게 꿈인지 환각인지도 모른 채 그저 방 안에 누워있었어. 머리는 온통 땀에 젖어 있었지. 그리고 애가 일어나 앉으려는데,

주머니에 총알이 세 개가 들어있었어.

아, 응. 이 이야기를 빠뜨렸네. 아까 그 목소리가 을 주면서 한 말이, 이 은 딱 세 번만 쏴야 된다고. 을 너무 많이 쏘게 되면 의미가 없잖아? 아무튼 그래서, 이 애는 이 을 시험해보기로 했어. 사실 이 을 어떻게 쏴야 되는 지, 쏘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니까.

이 애는 어떤 기억을 지워야 될지 고민했지. 그러다가 책장 아래 꽂혀 있는 만화책들을 본거야. 이 애는 그 만화책을 봤던 기억을 쏘기로 결정했어. 하지만 정말 그 기억이 없어져버린다면, 그 기억이 원래 있었던 건지 모르게 되잖아? 그래서 그 만화책 내용들을 노트에 미리 적어 놓기로 했어.


#9.「자살방지노트」. 2006. 11. 12 최종수정

13권의 마지막장을 덮는다. 그리고 다시 노트를 펼쳐본다. 다시 13권을 바라본다.

이게 뭐야. 이건.

이거야말로, 반전이잖아.

방 여기저기에 널려진 만화책들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제 만화의 주인공이 된 건 ‘나’다. 악마에 영혼을 팔았던, 돌이킬 수 없는 계약을 했던 그건 중요치 않았다. 이제 주인공은 나야.

당장 회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죽고 싶은 기억, 을 생각한다. 다시 등 언저리에 축축하게 땀이 배기 시작한다. 쥐구멍을 넘어서 쥐약이라도 먹고 죽고 싶었던 기억, 그 기억속의 ‘나’야말로 바로 ‘죽고 싶은 나’이고 그 ‘죽고 싶은 나’를 생각하는 ‘내가 죽이고 싶은 나’가 아닐까.

누구나 후회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후회와 죽고 싶은 기억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후회스러운 기억 속에서 나는 행동의 주체이지만 죽고 싶은 기억 속의 나는 행동의 객체라고 할까? 사실,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도 그 자리에서 검은 피를 죽 뱉으며 죽어 넘어져도 아무도 몰랐을 텐데, 하는 기억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왕따’라거나, 그런 기억들 속에서,

죽이고 싶은 나는 살고 싶은 나 사이에 조각조각 엉켜 있다.

내 책상 주변의 아이들 필통 안에는 연필이 들어있다. 수업시간동안 사방에서 연필 깎는 소리가 들린다. 수업이 끝나고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내 목 뒤에는 나무가루와 흑연가루가 들이 부어진다. 아이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흑연덩어리와 뭉쳐져서 땀구멍을 막는다. 마치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에얼리언이다, 씨발년. 진짜 존나 못생겼네.

누가 외친다. 그 외침 한 마디가 적군이 쏜 첫 번째 화살이 되어 날 파고든다. 뒤이어 화살들이 쏟아진다. 핏, 퓻, 하는 소리, 가 뱅글뱅글 돌면서 날 갈가리, 찢는다. 핏, 퓻, 따뜻한 것이 뺨에 닿는다. 누가 침을 뱉었나 보다.

흑연이 내 몸 안으로 스며든다. 난 검고 윤기 없는 하나의 돌덩이가 된다. 단단하지도 않은.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고, 작은 날과 가루로 변해 부서진다. 바람이 불고 흩날려진다. 그렇지만 절대 흩날려지지 않는 기억.

차가운 느낌, 목덜미를 타고 얼굴을 타고 흐르는 느낌. 누군가 머리에 음료수를 붓는다. 머리를 털 수도 없다. 어느 녀석이 닦아준답시고 걸레를 던진다. 걸레는 제 몸을 펼쳐 내 시야를 가리고 내 얼굴을 덮는다. 눈꺼풀이 내 눈을 덮는다. 세상은 검은 흔적과 역겨운 냄새만 남는다. 누가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 들고. 콧잔등이 찡한 그 순간 날 구하기 위해 세상은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다행히.

하지만 정말 난 외계인이라도 된 것처럼 오렌지색과 향이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신.

아이들이 끼룩 끼룩 웃어대며 자리에 앉고.

난 백사장의 갈매기처럼 구경거리가 되어 자리에 앉는다. 마치 석유가 유출된 해안의 물새처럼 끈적끈적하고 어두운 것이 잔뜩 몸에 묻어 결코 날 수도 헤엄칠 수도 그래서 도망갈 수도 없는 기억. 애써 태연한 척을 해도 사람들이 카메라 렌즈 사이로 날 동정하는 기억. (그렇지만 날 쳐다보는 저 씨발 새끼들이 석유를 유출시켰다는 걸 난 알고 있다.)

노트에 기억을 적었다. 죽고 싶은 순간, 그러니까 죽이고 싶은 순간을. 눈에서 끈적끈적하고 뜨끈한 기름 같은 것이 묻어나왔다. 더럽다, 는 생각이 들어 얼른 바지에 문대 닦았다. 다시 눈을 끔적여 더러운 것들을 마저 밀어내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친다.

뜨거워진 컴퓨터를 끄고.

내 자신의 전원을 끈다.

뜨거웠던 이마가 천천히 식기 시작한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해가 지기 전의 저녁이었고, 오렌지 색 빛이 가득 벽지를 물들이고 있다. 왠지 볼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싸쥐고 잠깐 동안 있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천천히 얼굴에 스며들 때까지 있었다. 한참 후 손바닥을 때고 다시 내 눈에 천장무늬가 보일 때까지 누워 있고 난 후에야 나는 밥을 먹으러 방문으로 향했다.

식은 오뎅국. 흑미가 섞인 밥. 어묵조림과 총각김치.

를 우적우적 씹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머리에서 작은 조각들이 끊임없이 떨어져나가는 기분이다. 다시 눈가를 비볐다. 발갛게 달아올라 부운 눈자위를 껌벅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에서 거북한 숨이 올라왔다. 다시 한 번 숨을 고쳐 쉬고 책상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총소리와.

그리고 한없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과 축축한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노트를 펼쳤다. 한 자 한 자 내 글씨체로 적혀져있는 내 기억을 마치 소설을 읽듯이, 무서운 이야기를 읽듯이 읽었다. 씨발 년이, 죽어도 싼 년이 부들부들 떨며 공책 안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찍고 있었다. 정말 글자들이 발자국처럼 흐려진다. 눈물이 다시 눈가에 고이고 한 방울 두 방울 씩 떨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슬픈 건지 어째서 우는 건지도 모르고 다시 생기는 눈물자국을 비벼야 했다.

그 때, 주머니에 무언가가 허벅지에 닿는 느낌이 든다. 손을 넣는다. 숨을 몰아쉰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닿는 매끈매끈하고 단단한 물건, 한 개.

이제 이 모든 걸 끝내야하는 마지막

한 발.

죽고 싶은 기억들이 아우성치며 목구멍을 치고 밀려 올라온다. 저마다 절규하고 얼굴을 쥐어뜯는다. 지옥의 영혼들에게 천사가 내민 파 한 뿌리의 이야기 속처럼, 귀신들이 내미는 손가락들이 지옥을 가득 메운다. 나는 고백하지도 못했던 그 남자애, 그 남자애를 좋아했던 다른 여자애들이 그 남자애와 떠들고, 그리고 졸지에 반에 내 소문이 터지고, 나를 쳐다보던 그 남자애의 얼굴. 심지어 다른 남자애와 싸우기까지 했던,

씨발 저 년 갖고 나한테 지랄 좀 하지 말라고.

수없이 우유가 부어지던 내 체육복과 서랍, 그리고 나에게 심부름 시키는 걸 은총처럼 생각하던 그 ‘년’들. 수학여행 날, 그 지옥 같은 이틀 밤. 내가 나오지 않는 단체사진. 교무실에 다녀와서 울던 엄마.

왜 우는데, 왜 우는데, 왜 우는데, 제발 말 좀 하라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던 재수학원.

수학여행과 다를 바 없던 신입생 OT날과 정말 날 외계인처럼 바라보던 동기 남자애들과 선배들. 그리고 여자 동기들. 여전히 날 가지고 씹고 물어뜯고 돌리던 그 입과 이빨과 혀들. 화살과 면도칼 같은 것들과 묵직한 둔기 같은 것들. 수없이 바라 본 거울에 비친 나를 닮은 모습 같은 것과,

대학교 3학년, 과제를 하다 늦은 그날 밤, 그 골목길에서, 그 것이, 날 붙잡고, 난 발버둥치고, 그리고 그 게 하던 말,

가만있어, 썅년아. 못생긴 년이 어차피 너도 좋잖아.

그리고. 씨발, 나도 너 같은 거 랑 하기 싫으니까 가만있으라고. 죽여 버리기 전에.

병원에 다녀오고, 날 바라보던 그 의사의 진물 같은 눈동자와.

그리고 세상이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현관 문 너머의 모든 세상이 내게 긴 혀를 내밀고 그 진물같이 누런 눈동자와 부리와 화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바라본 세상은 오렌지 향 나는 음료수로 가득 차 있었고 어느 날은 흑연 가루같이 검은 것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도 꾹 참고 학교를 가야 했다. 그렇지만 마침내 하늘이

가만있어, 썅년아, 못생긴 년이, 어차피 너도 좋잖아,

그리고

씨발, 나도 너 같은 거 랑 하기 싫으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죽여 버리기 전에,

라고 말하던 순간, 난 더 이상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휴학이나 자퇴 같은 것도 하지 못 한 채 이 방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오렌지 빛 세상이 중얼거리는 누런 말들 때문에.

눈에선 오렌지 향과 색을 닮은, 외계인의 눈물이 아까부터 누런 자국을 남기며 흘러내리고 있다. 다시 내 손이 하나뿐인 그 총알을 다시 쥐었다. 하나론 안돼, 안돼, 내가 무슨 짓을 한거야. 왜 만화책 같은 거 때문에 총알을 날린 거야, 무슨 짓을 한거야, 이대론 안돼, 많아야 돼, 총알이, 그런데 나, 엄마, 내가 무슨 짓 한거야? 엄마, 다시 되돌려야 돼, 엄마, 엄마.

홋홋홋홋홋홋홋홋홋홋.

엄마.

엄마?

홋홋홋홋홋홋홋홋홋홋.

엄마, 나 누가 죽이고 싶은지, 모르겠어, 그런데 총알이 하나야, 어떻게 해야돼?

홋홋홋홋홋홋홋홋홋홋.

홋, 홋, 홋.

엄마.

엄마?

엄마, 맞아?

무서워, 어두워. 여기는 어디지?

어디선가 떨리는 흰 손이 보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무언가를 내민다. 나도 모르게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사람처럼 불쑥 그 것을 잡는다. 천천히 그 것이 날 끌고 올라간다. 엄마, 엄마야? 내 손에 쥐어진 것을 본다. 검은 윤기가 나는 긴, 아, 이건.

순간,


#10.

“나를 죽이는 나를 죽인다, 그러면 총알은 계속 남을 수 있어. 그 애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리고 그건 진짜로 그렇게 됐어. 그래서 그 애는 하염없이 자기를 죽였지. 다시 돌아 가고 돌아 가고, 노트에 쓰인 기억을 보고 다시 돌아가고 다시 자기를 쏴 죽였어. 방안은 곧 텅 빈 탄피로 가득 찼지. 그리고 그 애도 탄피처럼 텅 비어버린 순간 그 애는 자살했어. 자기를 너무 많이 죽이다 보니 결국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게 된 거야. 그 애에게 자기는 그냥 죽이고 싶은 애에 불과했고, 그래서.”

그렇게 된 거지.

하고 이야기를 마쳤다. 제인은 한쪽 손을 볼에 기대고 있었다. 멍해져 있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음식이 도착했다. 음식을 씹으면서 이야기의 진행은 더 느려졌다. 음식이 줄어들면서 다시 이야기의 진행은 빨라졌다.

두 번 째 콜라를 리필 시켰다. 중간 중간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던 제인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고,

제인은 갑자기 웃었다.

제인에게 있어 언제나 느낀 점이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울음을 터뜨리거나 한 걸 기대한건 아니지만 난 적어도 진지한 반응을 바랐었는데. 그리고 제인이 입을 열었다.

“재밌다.”

아.

“진짜?”

“응. 진짜 재밌는데?”

“와. 진짜로?”

“음·····. 아니 뭐 그렇게 재밌는 건 아니고 그냥 들어줄만했어.”

말을 마치고도 제인은 한참 쿡쿡거리고 웃었다. 나가자. 제인은 외투를 걸치며 눈을 빛냈다. 들어줄만 했다, 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계산대 앞에서 잠깐 실랑이가 있었지만 내가 밥값을 냈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그럼 이제 어디 갈까?”

하고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질문이지만, 그 질문에 몹시 당황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딜 또 간단 말인가. 그렇지만 정말로 이렇게 되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카페’라는 여자들과 대화하기 쉬운 공간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그때 그런 걸 알고 있었을 리 없었다. 내가 오간 공간은 편의점과 집 밖에 없었고, 커피라면 당연히 편의점 캔커피 정도를 떠올리는 게 전부였다.

제인도 과연 카페를 알고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꼭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았다. 눈에 띄게 당황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보고 제인은 다시 웃었고, 제인의 말에 따라 우리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라는 걸 처음 본다는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난 내 옆에 걷고 있는 제인을 보았다.

어깨 양 옆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생머리, 제인의 상체에 딱 달라붙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는 마이, 회색 티, 무언가 이것저것 주렁주렁 달린 길게 늘어져 있는 목걸이는 제인의 불룩한 가슴께쯤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제인의 엉덩이에 달라붙는 짧은 치마. 그리고 그 아래 하얀 허벅지와 높은 굽의 구두.

그때 난 부끄러움이란 걸 느꼈다. 초라함과 함께. 고등학교 졸업식 날 혼자 졸업장을 받아들고 북적북적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던 그 때의 심정이었다. 졸업장을 쑤셔 박은 것처럼 내가 입고 있는 펑퍼짐한 청바지와 여기저기 하얀 것들이 묻어있는 패딩 점퍼를 쑤셔 박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여자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낙엽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꼭대기 층에 극장이 있는 백화점에 갈 때까지 별 말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제인은 내게 자기가 들어줄 만하다고 한 것 때문에 화가 난 줄 알았다고 했다. 사실 화가 나긴 났었지만 그건 제인 때문이 아니었고,

아무튼 그렇게 화가 난 상태로 영화관에 들어섰다.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한번 발을 헛디뎠다. 그렇지만 그때는 웃음이 났다. 극장은 몇 년 만일지 모를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광고가 시작했다. 불이 어두워지고 다시 광고들이 지나가더니 영화가 시작했다.

한 남자 배우가 나온다. 그는 지루한 일상에서 달아난다. 출근을 거부하고 남자는 바다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차 안에서 그는 화려한 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자를 만난다. 남자의 일상은 부서진다. 둘은 사랑을 하고, 싸우고······.

헤어졌다. 여자는 어느 병원에서 남자와의 기억을 지우고······.

내가 좀 전에 해준 이야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지어낸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제인 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는 순간까지 마음을 졸였다. 마침내 그 둘이 다시 사랑을 찾으면서 영화는 끝나고,

불이 켜졌다.

나는 일어서려 했지만,

옆자리의 제인은,

울고 있었다.


#11

묘한 기분이었다. 왜 내 이야기는 제인을 울리지 못했을까.

그러나 단지 그 정도였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영화관을 나왔을 때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제인이 그때까지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인은 정확하게 여자화장실 앞까지 얼굴을 가리면서 울었고, 잠깐만, 이라고 말하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 앞에서 제인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얼굴을 가리며 울고 있던 제인을 데리고 나오면서 제인의 어깨를 감쌌던,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본의 아니게 아랫도리가 뻣뻣하게 당겨 왔고 그때는 펑퍼짐한 청바지가 참 고마웠다.

화장실에서 나온 제인은 울기 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손부채질을 몇 번 하던 제인은 후, 하고 숨을 내쉬더니 다시 웃었다. 우리는 방금 우리와 함께 극장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산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우리 말고 딱 한 명이 더 있을 뿐이었다.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나와 제인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아까 밥을 먹기 전의 침묵과는 분명 다른 침묵이었다.

정말 그랬다.

백화점을 나오면서 제인은 다시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제인이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렸기 때문에 우리는 근처 아파트 단지의 정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 나서도 한참 말이 없었다. 주변에는 가끔씩 팔을 휘두르며 지나가는 노인이나 아주머니가 있었지만,

조용했다.

나와 제인은 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은 먹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쩌면 둘 다 술에 진저리치는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제인은 조금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끌어 냈고 나는 더욱 횡설수설하며 이야기를 질질 끌어냈다.

제인은 자신의 고향이 안산이라는 것과, 안산에서 있었던 일들과, 가난한 것과, 연예인 지망생이 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것과, 비참한 것 그리고 서울을 이야기했다. 안산은 역 근처라도 평일에는 놀랍도록 한산한 데 비해, 이 곳은 항상, 시끌벅적하고 놀랄 만큼 밝다는 걸 이야기했다. 술 취한 사람들이 항상 시끄럽게 떠들고, 노래방에서는 끊이지 않고 탬버린 치는 소리와, 여자들의 콧소리 섞인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있었다. 제인의 ‘친구’들도 지방에서 올라온 애들이 많았는데······. 갑자기 제인은 이 대목에서 말을 끊었다. 난 제인의 ‘친구’들이 아마 제인과 같은 노래방 도우미들이 아닐까 추측하던 찰나였다.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제인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암. 같다고 제인은 말했다. 온몸을 돌던 피가 뭉쳐 썩은 피고름을 먹고 자꾸 자라나는 암 덩어리처럼. 서울은 자라나고 있다고 했다. 가끔 ‘일’을 마치고 나올 때면 자기에게 술을 먹인 건(이 대목에서도 제인은 잠깐 말을 끊었다)······. 아무튼 서울이라고 했다.

제인의 어머니처럼, 서울도 암으로 앓고 있고, 어쩌면 자기도 앓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인은 소중한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은밀하게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제인이 숨을 죽일 때마다 나도 숨을 죽였다. 제인이 목소리를 높일 때면 나도 고개를 높였고,

제인이 말을 멈추었을 때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내 고향은 순천이라는 것. 중학교 때 아버지가 일을 찾아 서울로 오면서 같이 왔다는 것. 나도 맨 처음에 서울을 보고 놀랐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순천에나 바다가 있지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처음 2호선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 그 바다처럼 넓은 강을 보고 놀랐던 이야기를 했다. 서울엔 정말 없는 게 없다는 생각을 슬프도록 했었다는 이야기와 그리고, 그리고 내가 편부 가정이라는 것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에 가지 않은 것, 아니 대학에 가지 못한 걸 이야기 했고 가끔 순천에 있는 내 친구들을 생각한다는 것과.

죄다 이야기했다.

아마 그 날 있었던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었을 것이다. 딱 하나, 제인이라는 이름과 내가 작가지망생이라는 것만 빼면.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그 날 있었던 이야기들은 모두 거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나와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인과 작가지망생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제인과 헤어지고 나서 집까지 걸어가면서 제인의 말을 곱씹었다.

“우리······. 엄마가 옛날에······. 해준 얘긴데. 엄마가 막 아플 때······. 해준 얘기야. 옛날에 무슨 외국에 엄청 착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엄마는 엄청······. 안 좋은 사람이었나 봐.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을 때······. 천사가 어느 날 지옥을 보여주더래.”

“근데 그 지옥 안에 자기 엄마가 있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은 천사 한테 제발 어떻게 자기 엄마를 이리로 데려 올 수 없겠냐고, 빌었대.”

“천사가 말하길······. 엄마는 단 한 번도 착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딱 한 번 착한 일을 한 게······. 옛날에 배고픈 거지한테 파를 한 뿌리 줬다는 거야. 그래서 그거라고 어떻게 될 수 없겠냐고 그 사람이 막 빌었대.”

“그러니까 천사가 그 파를 들고 지옥에 있는 엄마한테 간 거야. 그래서 파를 내밀고 그 엄마보고 그 파를 잡고 올라오라고. 그런데 엄마가 파를 잡으니까 다른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막 파를 잡는 거야. 파는 한 뿌리 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막 파를 잡으니까······. 엄마는 놀라서 막 사람들을 차고 막 그랬대. 그런데 그 순간 파가 딱 부러진 거야.”

“나중에 천사한테 그 이야기를 들은 그 사람은 막 울면서, 엄마가 그러지만 않았으면 그 파는 지옥에 있는 사람 전부라도 버틸 수 있었을 거라고 막 그랬대. 엄마가 병실에서 이 이야기 하면서······.”

“엄마는 나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고, 진짜 파 한 뿌리만큼도······. 해준 게 없다면서, 엄마는 지옥에 가도 상관없는데······. 진짜 엄마가 슬픈 건 나한테 파 한 뿌리만큼도 해준 게 없어서, 그게 엄마는 너무 슬프다고······.”

제인. 엄마. 제인. 엄마. 제인.

눈을 감았다. 사실 파 한 뿌리만큼도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내가 그 착한 사람이었다면 그 교활한 천사 새끼를 잡아다 지옥에 다시 던져버렸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 역시 나중에 천국에 가지 못할 거란 걸 깨달았다. 제인과 제인의 어머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만일 파뿌리를 잡고 있는 내게 제인과 그 어머니가 매달린다면,

난 세상 모든 사람을 발로 차는 한이 있더라도 그 둘은 발로 차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에 들어섰다. 그리고 전화벨이 울렸다.


#12

“어······.”

제인이야? 라고 할 뻔 했다. 그렇지만 수화기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침묵했다.

-잘 지냈어?

응. 어. 잘 지냈지, 그럼.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처럼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년이 뭐라고 지금 내가 떨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구나.

잠깐의 침묵. 20분 걷는 것 정도로는 도저히 가까워 질 수 없는 거리. 20분이 아니라 20년 동안 서로 이야기를 하고 영화를 본다 하더라도 가까워 질 수 없는 거리.

-요새도 많이 바빠?

아니. 그냥. 아냐. 그냥 뭐, 맨날 똑같지.

-그렇구나. 난 요즘······.

잘 지낸다는 말과, 대학 생활과, 과제, 학점 등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얼굴 좀 보고 살자는 말과 그리고,

급하게 돈 좀 빌려줄 수 있냐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과외비가 들어오면 바로 갚아주겠다는 말과 함께.

잠깐 수화기에서 고개를 떼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번이 두 번째인가. 한 달에 두 세 번 정도 걸려오는 전화지만 그 때마다 돈을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돈도 아니다. 사실 내가 알바하면서 뭐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돈을 빌려 줄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난 잠깐 그 결과를 거부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다시 수화기에 입을 갖다 댔다.

빌려주겠다고 답했고.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고 대꾸해 주었고 그렇게 웃으면서 통화를 끊었다. 통화를 끊자마자 웃음은 사라졌다.

서울에 올라와서, 전학 온 중학교의 교복과. 낯선 교실. 경계하는 눈빛들. 그리고 내가 옆에 앉았을 때,

‘웃어주던 여자애’

의 웃음을 떠올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한 번도 보지 않았던 그 얼굴은 내 기억 속에서 제 맘대로 변하고 있었다. 때로는 샴푸 광고의 탤런트처럼, 또 때로는 소주 광고의 여가수처럼 변했다. 탤런트의 얼굴과 가수의 얼굴로 내게 보고 싶다고 말했고, 돈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얼굴은 다시 변하기 시작하더니 제인이 되었고,

내게 파뿌리를 내밀었다.

천장은 단두대처럼 스물스물 기어오고 있었고,

나는 천사를 저주하다 잠이 들었다.

잠들기 전에는 눈앞까지 내려와 있던 천장이 눈을 떴을 때는 다시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완전히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는 한낮이었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이불을 주섬주섬 개키려다가 다시 뭉친 채로 침대에 집어 던졌다. 머리가 맑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귀걸이를 빼지 않고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귀걸이를 뺐다가, 다시 끼웠다. 전 날 밤의 전화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고,

파를 썰어다 라면을 끓였다. TV를 켰지만 실상 TV는 보지 않으면서 라면을 먹었다. 잠깐 TV를 보다가 팔굽혀펴기를 했다. 땀이 좀 솟자 화장실에 들어가 씻었다. 씻고 나서는 화장실을 조금 정리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방에 들어갔다. 왜 망설였는지 나 자신도 혼란스러워 하면서.

발가락으로 컴퓨터를 켰다.

바탕화면을 마우스로 이리저리 휘젓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인터넷이나 게임을 클릭하기 전에, 워드프로세서를 작동시켰다. 흰 백지가 모니터의 한가운데에 떠올랐다. 커서가 깜박였다. 곧 흰 백지는 막막하도록 드넓은 사막으로 바뀌었다.

자판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움직이려다

그만두었다. 아니, ‘그만둔 게’ 아니라, 그럴 수 없었다. 연필로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나쁜 짓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컴퓨터를 끄지도 못한 채, 한참을 쩔쩔매야 했다. 나를 구원해준 건 시간이었다.

알바를 가야 할 시간.


#13

이었다. 다시 패딩 점퍼를 걸쳤다. 새 양말을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전에 신었던 양말을 다시 펴서 신었다. 조금 이물감이 들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신발을 구겨 신고, 문을 잠그고, 거리에 나섰다.

편의점으로 걸으며 한참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까 왜 난 글을 쓰지 못했던 것일까. 아까 한 줄이라도 글을 썼다면 진짜 작가지망생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결국 작가지망생을 사칭하는 한 명 편의점 알바다. 편의점 알바라는 사실이 초라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작가지망생을 사칭하는 편의점 알바라면, 그 사실은 비참하다. 사거리의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불어 앞머리를 휘날렸다.

제인은 어떨까.

제인도 분명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물론 분명히 그렇다, 고 증거를 댈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제인은 내 앞에서 노래방 따위의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얼버무렸다. 물론 내가 파렴치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제인의 연기는 사뭇 순진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제인은 나와 같은 고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억울하기까지 했다

다시 손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귀걸이를 잠깐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순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횡단보도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아무런 고민도 없이 사람들은 목적지를 향해 달아나듯 도로를 건넜다. 문득 나도 달아나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달아날 수 없다. 지금 달아난다 해도, 결국 난 어느 순간 제인의 앞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서로 만나기 위해, 서로를 감춰야 한다.

슬펐다. 가슴에 몽우리 같은 것들이 맺혀갈 무렵.

이야기가 떠올랐다.


#14.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들의 이야기」. 2006. 12. 28 2차 수정완료

그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궁전의 안쪽에서 하인이 다가와 공주에게 한 그물에 잡힌 다람쥐와 물새를 바쳤다. 하인은 웬 중국인 농부가 이것을 바쳤으며, 같이 있을 수 없는 것들을 한 그물로 잡았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것에 미치는 황제의 덕을 말하는 것이어서 황제에게 바친다는 농부의 말을 전했다. 공주는 그 것을 궁중에 요리사에게 주라고 말했다.

그때 그가 공주에게 허락을 받고 일어나 그 것들을 살펴보았다. 마치 그 짐승들과 이야기를 나누듯이 한참의 시간을 보낸 그는 다시 돌아와 다시 한 번 공주에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 공주에게 허락을 받고 한 그물에 잡힌 다람쥐와 물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그물에 잡힌 다람쥐와 물새의 이야기

“갈대숲이 우거진 강 위로 떡갈나무가 궁전처럼 우뚝 자리 잡은 언덕이 있습니다. 황제의 궁처럼 이 떡갈나무는 언덕 전체에 자신의 가지를 드리우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 이 아름답던 나무도 늙고 늙어 어느덧 가지 몇 개에만 옛날의 추억을 되살리듯 초라한 열매가 맺히곤 했습니다.

그 나무에 다람쥐가 한 마리 살고 있었습니다. 작고 또랑또랑한 눈망울이 오팔처럼 반짝거렸으며 귀여운 몸에는 뚜렷한 줄무늬가 앙증맞음을 더했습니다. 게다가 풍성한 꼬리털은 어찌나 숱이 많았던지, 그 나무에 찾아드는 까치들마저 그 다람쥐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며 재잘거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 달마저 얼굴을 감춘 그믐밤에 이 다람쥐는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간 떡갈나무 열매를 찾아 갈대숲까지 종종걸음을 치고 말았습니다. 다람쥐가 떡갈나무 열매를 집어 드는 순간 웬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다람쥐는 대단히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그 목소리의 무례에 대해 따졌습니다. 그러자 뜻밖에 그 목소리는 다람쥐에게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갑자기 굴러온 떡갈나무 열매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잠을 깨운 것인지 설명했습니다. 다람쥐는 그 친절한 설명과 말솜씨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그 목소리에게 자신이 언덕 위의 떡갈나무에서 그 열매를 찾아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아, 당신은 바로 언덕 위의 그 아름다운 나무에서 온 것인가요? 저는 이 물가에 살면서 항상 그곳을 가보기를 꿈꿨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이 곳에서 물고기를 잡고 하는 일이 바쁜 나머지 가보지는 못했답니다. 그저 오후가 지나 그곳에서 불어오는 향기로운 떡갈나무 향기를 맡으며, 그곳에 사는 이는 얼마나 알라의 축복을 받은 이일까 생각하곤 했지요.”

이 난데없는 찬사에 다람쥐는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순간 자신이 고작 다람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기 부끄러웠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람쥐는 거짓말을 내뱉었습니다.

“알라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께서는 제게 창공을 허락하신 은혜와 더불어 언덕 위의 저 아름다운 참나무에 사는 은혜까지 베풀어주셨습니다. 저는 아침에 떡갈나무에서 도약하여 사냥을 하고, 저녁에 사냥을 마치고 떡갈나무에 내려앉는 순간까지 그분의 은총에 깃들어 사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 이 아름다운 갈대숲과 흐르는 시냇물의 아름다움을 볼 때마다 항상 그분께서 제게 주신 은혜를 불평할 때도 있답니다. 그분께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말입니다. 나무에서 이곳으로 드리워진 가지에 걸터앉아 이 냇물의 아름다움을 보며 그 분과 이 곳에 사는 이들을 찬양한 적도 많았지요.”

사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 강가에 사는 오리였습니다. 오리는 다람쥐의 거짓말을 믿고 다람쥐가 독수리인줄로 착각하였습니다. 당연 도망가야 했지만, 오리는 칠흑 같은 어둠과 그리고 예상외로 독수리의 목소리가 아름답고 상냥하며 또한 그 표현이 부드럽고 친절한 것에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것을 염려한 오리 역시 거짓말을 해 버렸습니다.

“알라께서 허락하신 창공의 지배자이신 독수리여. 그대의 칭찬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저 역시 고작 이 갈대밭의 주인이라 할 수 있지만 그대가 가진 드넓은 창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 시냇물의 푸름을 어디 알라의 궁전이 있는 하늘의 푸름에 빗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오리마저 자신이 악어라고 거짓말을 해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둘은 서로의 상냥함과 부드러움에 놀라면서-다람쥐와 오리 둘 다 악어와 독수리가 이렇게나 상대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동시에 서로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매 달, 달이 뜨지 않는 그믐밤이면 그 둘은 갈대밭에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 둘은 서로의 모습을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믐밤이 아닌 시간에 만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으며, 또한 그렇게도 당당한 상대에게 자신의 거짓말과 초라함을 들키는 것이 창피하였기 때문에 그 둘은 다른 약속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그믐밤, 갈대숲에서 오리를 기다린 다람쥐는 새벽이 되도록 오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새벽이 되어 해가 뜨려 하자 다람쥐는 소스라치게 놀라 언덕 위로 달음박질을 치려했습니다. 그때 갈대숲 어디에서 끓는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독수리님, 독수리님, 만일 당신이 아직까지 그곳에 계신다면, 그리고 갈대숲의 주인인 악어와의 우정을 기억하시고 내 목소리를 기억한다면 부디 날갯짓을 멈추어주십시오. 나는 사실 오리입니다. 나는 이 갈대숲의 주인도 그 무엇도 아닙니다. 단지 그 운명의 그믐밤, 알라의 뜻대로 그대를 만났지만 악마의 뜻으로 그대에게 거짓말을 했을 뿐입니다. 지금 내가 받는 고통이 당신에게 한 거짓말의 대가라 하더라도 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독수리님, 알아주십시오. 난 어제 낮, 어부가 친 덫에 걸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제 밤에 당신과의 만남에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난 어제 밤에도 당신이 나를 보기 위해 내려왔음을 알았고 지금도 갈대숲 어딘가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해가 밝아 어부가 와 그물을 거두면 내 목숨도 거두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당신께서 내 우정의 선물과 배신의 선물로 제 목숨을 거두어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아, 고백이란 얼마나 지독하면서도 달콤한 순간인지요. 이제 나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다람쥐는 놀랐습니다. 다람쥐는 오리에게 화를 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갈대숲을 뒤진 다람쥐는 곧 덫에 걸린 오리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오리는 다람쥐에게 화를 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둘은 서로의 우정과 배신의 대가로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기를 바랐습니다. 마침내 어부는 덫을 보았고, 자신이 강가에서 거둔 이 괴상한 수확물을 땅의 지배자이신 칸에게 바친 것입니다.”


#. 15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제인은 웃지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재미없었어?”

“아니.”

그제서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길지 않았다. 잠깐 머리를 매만지던 그녀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핸드백을 뒤졌다. 나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담뱃갑을 내밀었다.

“난 맨솔 안 피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내 담배를 빼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담뱃불을 붙였다. 담배연기가 색칠한 그녀의 숨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붉게 칠해진 그녀의 입술이 살짝 흔들렸다.

“재밌었어.”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아까 일 있었거든.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갈색머리카락이 겨울 공기를 부수며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겨울공기를 함빡 빨아들인 그녀가,

“좀 집중이 안 됐어, 미안해.”

아름다웠다. 아냐. 아냐. 괜찮아. 나도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아니면 내 이야기가 형편없다는 사실이? 아니면 내가 엉터리로 작가지망생을 흉내 내고 있는 이 사실이.

아마 그 ‘사실’ 때문일 것이다.

제인은 일을 하다 왔다. 아마 노래방에서, 지하 노래방에서. 어떤 ‘씨발롬’들과, 노래를 부르고 엉덩이를 흔들고. 스타킹을 신지 않은 제인의 다리를. 또는. 또는.

제인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닌데, 화가, 아니 화가 아닌 다른 어떤 감정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어렸을 적 갯벌에 가면 바닷물이 고인 웅덩이에 죽은 물고기들을 먹기 위해 게들이 모여들 곤 했다. 꼭 그런 것처럼. 여기저기서 슬금슬금 화란 놈들이 모여 들었다. 화가 났다. 어째서인지 모를.

그중 가장 큰 게가 집게발로 심장을 쥐어짰다. 심장이 쿨럭거리면서 화를 마저 뱉어내고는 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도 뱉어냈다. 난 그게 무언지 손가락으로 찍어보고 나서야 그것이 슬픔이란 걸 알았다. 슬펐다. 왜인지 모를.

뒤늦게 흘러나온 슬픔이 먼저 바깥으로 나온 화와 섞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서서히 울분을 만들어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난 무언가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노래방을, 지하를, 게를, ‘씨발로마’들을, 심장을. 제인과 내가 앉아있는 이 정자를 뽑아다가 통째로 집어던지려는 찰나.

제인이 담배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 친구들 중에 대학생이 있는데······.”

난 다리를 흔드는 것을 멈췄다.

“사실 난 대학생이 아냐. 음······. 너도 알지 모르지만.”

당연히 알지.

“네가 작가지망생이라고 했을 때······. 경찰서에서, 기억나? 사실 그땐 되게 웃겼어. 왜냐면······. 난 네가 작가지망생이라고 하는 말이, 내가 예전에 그냥 가수한다고 떠들고 다닌 거랑 똑같이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래서 웃었구나. 나를 작가지망생이라고 부르며 웃던 그녀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웃음은 비웃음이 맞았던 것 같다.

“넌 아닌 거 같아. 넌,”

뭐가 아니라는 건지, 나는 제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릴 뻔 했다. 제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처음이지 싶을 정도로 나와 제인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작가지망생······.”

제인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내게 내가 진짜 작가지망생이냐고 묻는지 혹은 내가 진짜 작가지망생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인의 눈 속에서 녹색 빛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두운 공원 정자에 서로 마주 앉아 그녀의 눈동자에서 녹색 빛을 보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내가 제인을 좋아한다는 걸까.

아니면 내가 제인을 이제 사랑한다는 걸까.

그런 생각을 접으면서 난 제인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제인의 코와 입술 근처의 공기에서 살구 빛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방금 담배를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난 제인의 입술이 향기로우리라는 것에 내 전 월급을 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뺨을 맞고 내 월급 모두를 잃어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 말은,

내가 진짜 작가지망생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긴장되는 공기가 우리 사이를 뒤덮고 있었다. 하늘에서 별 하나가 15광년을 뚫고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실같이 가는 빛을 던졌다. 그 빛을 먼저 따라 간 것이 나였는지, 제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의 입술은 살짝 부딪쳤다.

그리고 나와 제인은 서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자 안은 엄청나게 무거운 어색함이 감돌았고 제인은 다시 핸드백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제인을 바라보며,

내가 뺨을 맞지 않았음을, 내 월급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역시나 제인의 입술은 향기로웠다.

“······잘래?”

제인의 허파를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였다. 15광년은 걸려서 내 귀에 도착한 듯한 말이었고.

뭐라고? 이번에는 정말 놀란 나는 제인을 바라보았다. 제인은 어떻게 잘래와 갈래의 중간발음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나는 되물을 수 없었다. 제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직도 제인은 허파를 쥐어짜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그러니까 너랑도······.”

진짜 작가지망생이라면 어떻게 대답해야 했을까. 어떤 낭만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고개를 들고 볼을 매만져 줄 수 있었을까. 그녀의 둥글고 마른 어깨를 안아줄 수 있었을까. 아니, 최소한 나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난 그냥 앉아있었다. 왜 제인이 갑자기 나하고 자고 싶어진 걸까, 따위의 멍청한 생각을 하며.

결국 제인이 얼굴을 감싼 채 일어섰다. 어쩌면 결국 제인의 허파가 찢어져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아파트 공원에는 제인을 기다려줄 화장실이 없었다. 난 일어섰다. 제인의 어깨를 잡고 싶었지만. 제인은 달려 가버렸다.

달려가던 제인은 중간에 한번 크게 발을 헛디뎠다. 나조차도 놀라 비명이 나올 정도였지만 제인은 개의치 않고 절뚝거리며 달아나더니, 이내 아파트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난 발목을 다친 여자도 쫓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그리고 전화벨이 울렸다.


#16

-그러니까······.

뭐가 그러니까 라는 거야, 이년아. 참, 어제도 통화했었지.

난 어제 얘한테 무슨 말을 지껄였던 걸까.

-지 않았어?

수화기를 쥔 채 난 아직도 정자에 앉아있었다. 좀 전까지 제인이 들이마시고 내뱉은 공기가 아직 살구 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서 조금씩 그 살구 빛의 공기들이 흩어지는 것을 난 멍하니 보고 있었다.

-저기, 여보세요?

마지막 그녀의 숨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서야 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작 했어야 할 말들,

“저기, 돈은 안 갚아도 돼. 그러니까 그냥”

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한 말이 ‘끊어’인지 ‘꺼져’인지 ‘다신 연락하지 마’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아무튼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뛰었다. 그녀가 달려가던 쪽으로 무작정 내달렸다. 동화처럼 살구 빛 공기들이 실오라기처럼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살굿빛 공기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까지 한참을 달렸다.

숨이 찼다.

공기도 찼다.

차가운 공기가 내 허파를 할퀴어 대는 동안, 허리를 숙이고 한참 숨을 골랐다.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세 통의 발신 전화가 있었다. 그 발신 전화들을 무시하고 난 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가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다시 수신음이 가고,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다시 수신음이 가고, 다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내가 전화를 끊었다. 다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수신음이 갔다.

그리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제인의 목소리가


#17

들렸다. 화장으로도 덮일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만 듣고도 난 제인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제인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정말로 식어있었는지, 아니면 그렇게 연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신 한참을 달려온 내 목소리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에 대고 있는 휴대전화가 녹아버릴 정도로 뜨겁게 달구어진 숨이 기도를 타고 올라왔다.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내 숨이 내 주변의 공기를 하얀색으로 채우고 있었다.

“제인, 너 어디야?”

내 목소리에 제인도 이제 놀란 듯싶었다.

“넌 어딘데?”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 넌 어딘데?”

“집.”

“너 집 어딘데?”

제인은 횡설수설하면서 자기 집 주소를 말했다. 나도 횡설수설하면서 그 주소를 외웠다. 몇 번이고 제인이 고쳐준 후에야 난 제인의 주소를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거기가 어딘데?”

라고 물었다. 수화기 안쪽에서 제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숨이 찼다. 제인은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살굿빛 웃음이 수화기를 통해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처럼 내 귀를 적셨다. 숨이 넘어갈 듯 웃음과 함께 제인이 내 목소리를 흉내 내며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

그제야 나도 웃을 수 있었다. 한참 웃고 난 뒤에야 마침내 제인이 ‘거기가 어딘지’,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말해주었다. 내가 있던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미용실을 찾고, 작은 상회를 찾았다. 생굴을 파는 술집을 찾았고 골목을 꺾어 오피스텔 촌을 찾았다. 그 오피스텔 앞에는

제인이 서있었다.

그리고 난 하늘에 맹세코.

내가 전화를 받던 그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골목을 꺾었으면 제인의 오피스텔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인이 나를 보았다. 나는 숨을 골랐다. 살구 빛 공기들이 골목을 채우고 있었고, 난 달려가서 제인을 부둥켜안고 입을 맞췄다.

제인은 놀란 눈으로,

손바닥을 휘둘렀고, 난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아프게 따귀를 맞았다.

다시 제인을 바라보았다. 화장을 지운 제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맨다리 대신 회색 긴 추리닝을 입고 있는 제인의 다리를 내려보았다. 힐이 아닌 슬리퍼를 신고 있는 제인의 하얀 발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구두를 신지 않은 제인이 나보다 약간 키가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우리의 눈높이는 거의 비슷했다.

제인을 안았다.

안아준다,는 말을 나는 지금도 싫어한다. 어떻게 안아, 줄 수 있겠는가. 안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처음 제인을 안았을 때 나는 제인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받았다면 모를까. 제인의 따뜻한 체온과, 말랑거리는 살의 느낌. 제인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향기와,

오롯한 제인 전부를 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제인을 안은 채 잠깐 말없이 기다렸다. 아마 다시 제인이 내 뺨을 후려치는 것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인은 내 뺨을 치지 않았다. 슬리퍼를 신은 제인의 발등이 빨개지기 전에 나는 입을 열었다.

엄청난 혼란과 떨림이 허파를 통해서 내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이 세상의 말들이 아니었다. 번역할 수도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말들이었다. 횡설수설한 말들이 잦아들면서 내 떨림도 그리고 제인의 떨림도 잦아들고 있었다.

제인의 눈에서 난 다시 녹색 빛을 보았다.

“그러니까 제인,”

제인의 집 근처에서 제인의 집을 찾아 헤맸던 것처럼 난 다시 헤매고 있었다. 내가 제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하기 위해서.

제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제인을 끌어안고 싶었다. 제인의 입을 맞추고 싶었다.

제인의 너무나 하얀 그 손을.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고 기른 손톱을. 제인의 향기가 나는 둥글고 마른 어깨를. 안에 단단한 뼈를 품은 그 뭉근한 살을. 제인의 입술. ‘입술과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눈을 내리깔았던 그 아름다운 입술에.

제인의 손을 잡기 싫었다. 제인을 끌어안기 싫었다. 제인의 입을 맞추기 싫었다.

제인이 어째서 내 손을 잡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 손에 축축하게 난 땀 때문에. 제인을 안았을 때 오래 빨지 않은 내 점퍼에서 냄새가 날 것 같아서. 제인이 내 입을 맞추었을 때 내 입에서 담배 냄새를 맡는 게 싫었기 때문에.

내가 제인을,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인이 하루 종일 내 안에서 떠나지 않고 내 안팎을 오가며 날 휘둘러 대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한 단어로 표현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아마 제인이 나였다면 쉽게 그 말을 꺼냈을 것이다. 제인은 진심으로 순수하게 그 말을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금광석에서 순수한 금을 골라내기 어려운 것과 같았다. 금광석에서 금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화학약품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날것의 퍼덕거리는 내 감정을 녹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금광석을 선물하는 바보는 없다.

나는 단어가 샘솟는 가변에 앉아 사금을 찾기 위해 채질하고 있었다. 금은 너무나 명백했지만 나는 아직도 더러운 욕망과 순수한 감정 사이에서 무엇이 진짜 금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몽환적인 말이 내 입술을 맴돌고 있었다. 너무나 추상적이라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그것은 분명한 금이었다. 그렇지만 금을 모르는 원시인처럼, 또는 금은방에서만 금을 보아왔던 사람처럼, 난 그 알 수 없는 감정 앞에서 황망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말로만 듣던’ 감정이 내게도 피어오르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나는 원시인이나 다름없었다.

“난 엄마를 티라노사우르스해.”

“너는 마치 내게 메머드 뒷다리같아.”

“여보, 오늘 당신은 정말 초원의 버섯이야.”

그 말이 있기 전까지 사람들은 혹시 이렇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아는 가장 좋은 것. 그래서 상대에게 주고 싶은 것. 사실 모든 말은 결국 말에 지나지 않다. 말로 감정을 전하고자하는 것은 그물로 바다를 낚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그물을 던지고 끌어당겨도 그물에 걸린 것은, 그물을 적신 소금물뿐인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말 대신 차라리 물건에 비유하는 것이 내 감정에 옳은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순간 목구멍이 막혀왔다. 깨달았다. 내 좁고 지저분한 삶 속에서 이 감정에 비할 수 있는 물건은 없다. 진흙탕 위에 떨어진 꽃잎, 같았다. 순간인 동시에, 영원히 기억될 시간이었다. 찬란하다. 내 삶에서 이런 순간은 없었다.

아니, 단 하나 내 삶에서 이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오직 한 마디의 말은

‘제인’한다,

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였다. 세상의 어느 물건도, 사전의 어느 단어도 이 이상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내가 제인하는 것은 제인이었다. 그 뿐이었다. 제인의 향기, 제인의 눈썹, 제인의 이마. 제인의 웃음소리, 제인이 입은 옷. 제인이 꺼내는 말. 제인이 만들어내는 살굿빛 실오라기.

그러나 내가 제인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을 것이다. 난 그때까지도 내 앞의 제인이 진짜 제인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낸 제인이라는 허상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멍청하게 헤매고 있었다. 발갛게 시린 제인의 발등이 눈에 들어왔다. 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웃음이 날 만큼 간단한 것이어서, 나는 슬며시 웃고 말았다. 서러운 추위에 난 입을 뗐다.

“사랑해.”

“사랑해, 제인.”

사랑해, 제인. 사랑해, 제인, 사랑해. 사랑해. 제인. 한 번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렇지만 역시나 난 틀렸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제인이 나를 막았다.

제인이 내게 입을 맞춰 ‘주는’ 그 순간.


#18

제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오피스텔 앞의 가로등이 꺼졌다. 오피스텔 창으로 새어나오던 불빛들도 모두 사라졌다. 내가 눈을 감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모든 빛이 사라져버렸다. 당연했다. 세상의 모든 빛은 나와 제인의 입술 사이에서 머물고 있었으니까.

제인의 입술이 그녀가 후려쳤던 내 뺨을 훑고,

내 귀를 베어 물었을 때 난 나도 모르게 내 몸을 떨었다. 내 귀도 제인의 발등만큼이나 빨갛게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제인과 나는 오피스텔로 들어섰다. 계단을 오를 때 제인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난 제인의 발목을 걱정했고, 제인은 내 뺨을 만지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제인이 열쇠로 문을 열었다. 제인이 사는 곳은 거의 고시촌만큼이나 좁은 방이었다. 방바닥은 보일러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고 이불과 과자봉지, 이런저런 것들의 포장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 구석에 마치 낙엽처럼 쌓여있는 옷들과 제인의 가죽처럼 보이는 외투들이 옷걸이에 팔을 걸고 매달려 있었고 그리고 그녀의 속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순간 얼굴과 함께 아랫도리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서며 귓가에 제인이 속삭였다.

우린 이제 애가 아니잖아.


#19

우린 이제 애가 아니잖아.

제인의 입술과 내 입술이 서로를 찾고 훑었다. 그녀는 혼자서 옷을 벗었다. 그녀가 나를 붙잡고 인도했다. 세상이 따뜻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움직임과 진동과 떨림과 한숨과 신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늘어진 정액처럼 제인과 나는 서로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누워 있었다. 제인은 내 가슴팍 즈음에 머리를 두고 누워있었다. 살며시 제인의 머리를 안았다. 제인의 머리가 내 팔 안에서 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이야?”

제인이 속삭였다.

응. 처음이야.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나는 조용히 제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제인이 꿈지럭거렸다. 제인의 다리를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미끄러졌고, 땀을 먹은 제인의 허벅지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하얗게 빛났다.

“나도······. 처음이야······.”

한참 뜸을 들이던 제인이 멋쩍게 속삭였다. 자신이 나를 인도한 게 부끄럽다는 듯이. 자신이 너무 크게 교성을 지른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제인은 변명하고 있었다.

“뭐가?”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물었다. 제인은 팔을 뻗어 이불을 끌어당겼다. 다시 제인의 허벅지가 이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거······. 안 끼고 한 건.”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한 걸 꾹 참았다.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도 했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제인을 꼭 끌어안았다.

불을 끄지도 않은 채, 씻지도 않은 채, 옷을 입지도 않은 채 우리는 서로를 덮고 잠이 들었다. 보일러와 우리가 내 쉰 날숨에 창문에 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따뜻한 밤이었다.


#20

서둘러 말하자면 그날부터 난 다시 작가지망생이길 반쯤 포기했다. 이제 내가 지어내는 서투른 이야기는 아무런 쓸모도 소용도 없었다.

생각보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가끔 술을 먹은 제인이 울먹이며 주정을 하곤 했다. 술을 먹은 제인은 제인이 아니었다. 내게 욕을 하기도 하고,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며 어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외치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무섭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인이 아닌 그녀를 만나는 것이 무섭기도 했고.

그래서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끔 우리는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갔다. 또는 밥을 먹으러 갔고. 옷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난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남자였고,

제인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여자였다. 수없이 제인에게 아름답다고 말해 주었다. 새로 고백하는 마음으로 수없이 제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제인은 그때마다 딴청을 피우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했다.

그때 난 편의점에서 한 시간 일을 하는 대가로 7500원을 받았다. 제인은 팁을 뺀다 쳐도 한 시간에 5만원 정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십 만원이 채 안되는 돈으로도 충분히 나와 제인의 한 시간을 살 수 있었던 셈이다.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그랬다.

그렇지만 나와 제인이 서로 만나고 있을 때는 설령 한 시간에 백만 원을 준다 하더라도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비록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외줄에 오른 광대 같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부터였다. 제인에게 난 이제 더이상 작가지망생이 아니라, 작가지망생이기도 한 나였다. 그리고 작가지망생이기도 한 나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외줄에 오른 우리의 시간을 보내기 싫었다. 일주일 동안, 또는 이주일 동안 나는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새벽에 자고 낮에 일어나 밥을 먹고 운동을 조금 하고 그리고 다시 일을 나갈 준비를 했다. 천장은 단두대처럼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그러나 제인을 만나는 주말이 되면 나는 다시 살아났다. 천장은 저만치 물러나 있었고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고 샤워를 했다. 새로 빤 양말을 입었고 제인과 함께 골랐던 옷을 입었다.

서로를 품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질문과 답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제인이 추운 걸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인은 사실 내가 욕을 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제인이 운동신경이 둔하다는 것을 알게 되던 날 제인은 내가 어느 순간부터 신발에 깔창을 끼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비록 한 권일 뿐이지만 제인의 집에 시집이 있다는 걸 알던 날, 제인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 공책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어느 날 제인은 내가 사실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 챘고, 어느 날 난 제인이 손톱에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걸 눈치 챘다.

물론 아직까지 서로 모르는 것도 있었다.

난 제인의 진짜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했다. 이름은 둘째치고라도 제인의 나이는 항상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 제인은 자기 나이는 27살이라고 꾸준히 말했고, 그래서 난 그때의 제인은 27살이라고 믿었다.

아직 제인은 내가 진짜 작가지망생이 아니라는 걸 알지 못했다. 난 그 사실만큼은 제인이 영원히 알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도 제인의 이름이나 나이를 묻지 않았다. 때로는 이름을 모르는 대상을 이렇게 알아갈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통장의 액수를 확인했다. 한 달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액수는 천천히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돈을 모았다. 제인도 그랬을 것이다. 서로가 그 기한을 말한 적은 없지만 언젠가 제인과 내가 같이 살게 될 때까지, 제인이 지금 살고 있는 그 좁은 방에서 나올 수 있을 때까지(지금 제인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제인이 일하는 보도방 사장의 소유였다.)였다.

통장에 돈이 모일수록,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 같이 살 수 있을 거라던 막연한 생각이 이야기가 되고 현실적으로 되자,

우리의 외줄도 점점 높아졌다.

제인도 전보다 더 바쁘게 일을 나갔다. 그리고 전보다 위험한 일도 하는 것 같았다. 전에 없이 제인의 눈두덩이에 파란 멍이 들기도 했다. 제인은 그 주말에 날 보지 않기 위해 온갖 핑계를 댔었다. 차라리 내가 그 핑계를 믿었더라면. 그렇지만 제인은 작가지망생보다도 서투른 거짓말쟁이였고,

부어오른 제인의 눈두덩이를 본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는 제인이 핑계를 대면 난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그 전날 나도 새벽타임까지 편의점 일을 하다 넘어지는 바람에 상품 두 개를 깨뜨렸고.

사장에게 뺨을 맞았던 것을 어슴푸레 떠올렸기 때문이다.

때로는 제인은 아무것도 꾸미지 않았고, 그래서 가끔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여자가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럴 때조차도 제인은 아름다웠다.

제인은 늘 아름다웠다.

그래도 세상은 천천히 그리고 시끄럽게 굴러가고 있었다. 어디에서는 제인같이 ‘보도’를 다니는 여자나 창녀들을 대상으로 연쇄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고, 어디에서는 편의점을 털러 온 강도가 야간 알바를 칼로 살해하고 달아나기도 했다.

그해의 겨울이 끝나고 봄이 다가오던 어느 날 밤은 아주 추웠다. 꽃샘추위가 지독하던 날 제인은 내게 전화를 걸어 어디론가 따뜻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난 그 여행에 따라가고 싶다고 했고, 제인은 절대로 날 데려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웃으면서 통화를 끊었다. 그날 천장은 지구 남쪽의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잠이 들락말락 하던 순간 나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것은 꿈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아주 더운 곳의 이야기였고, 열국의 꽃이 붉은 비단처럼 피어오르는 이야기였다. 나는 초라한 이야기꾼에 지나지 않았다. 거지꼴의 나를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의 틈바귀에서 나는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제인은 아름다운 공주였다. 왕이나 술탄이나 칸, 또는······. 아무튼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제인은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 다음 순간, 나와 제인은 모래바람 사이에서 서로 웃고 있었다.

만일 제인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난 그 이야기를 제인에게 들려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평소 그랬던 것처럼 그 이야기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가 없어도 나와 제인은 행복했을 것이다.

제인은 그 어떤 열국의 꽃보다도 아름다웠으니까.

꽃샘추위가 지독하던 날이었다.


#21

제인이 사라진지 보름이 넘었을 무렵, 난 미칠 것 같았다. 아니, 미쳐버리고 말았다. 미쳐버리기 직전까지 난 매일같이 제인에게 수십 번씩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만 제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제인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목소리가 제인 대신 전화를 받았다. 고객의 전화기가 꺼져 있사오니······.

전화기를 잊어버린 걸까. 만일 그랬다면 어떻게든, 다른 누구에게 휴대폰을 빌려서라도 내게 전화했겠지. 대체 왜. 대체.

일이 끝날 때마다 버릇처럼 제인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거길 들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에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앞에서 담배 한 갑을 모조리 피우고 집에 돌아간 적도 있었다. 일 하는 도중에도 모르는 번호로 오는 모든 전화를 받았다. 모두 쓸데없는 내용이었고 난 그 때마다 미칠 듯이 화를 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충동이 허기처럼 날 괴롭혔다. 그리고 마침내 난 미쳐버렸다.

그날 아침부터 오늘 알바 못가겠다고 사장에게 통보한 나는 제인을 찾아 나섰다.

제인이 어디서 일하는지 내게 말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난 역 근처의 노래방이란 노래방은 모두 찾아다녔다. 그러나 대낮부터 노래방에 찾아와 노란 머리로 눈을 가리고 귀걸이를 주렁주렁 매단 채 버럭 화를 내는 애송이에게 도우미를 어디서 부른다고 말해주는 노래방 사장은 없었다.

결국 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제인이 살고 있던 오피스텔로 향했다. 다리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난 버스를 타지 않았다. 제인의 오피스텔 앞에서 무작정 제인과 비슷해 보이는 여자애들을 잡아 사정했다. 제인을 알지 않느냐고.

가명인 제인을 아는 여자애가 있을 리 없다고 마음 한 구석은 비명을 질러댔지만,

난 제인을 아는 여자애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친구’ 중 하나였다.


#22

사실 그녀는 ‘제인’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제인과 만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제인에게도 몇 번 들은 모양이었다. 요 며칠 사이 내가 오피스텔 앞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고 제인에게 차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안 그래도 하루만 더 이 앞에서 서성거렸다가는 경찰에 신고할 작정이었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그 계집애는 더럽게 말이 많았다. 게다가 모든 자신의 생각에 내 동의를 구했다. 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으로 그 주둥이를 박살내는 상상을 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제인의 이름은 ‘하루’였다. 여자 이름이라기보다는 강아지 이름 비슷했지만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지금 생각해보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가 요새 일을 나오지 않는 것 같다‘며 내 복장을 뒤집었다. 제인이 일자리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내 불안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런 일이 있느냐며 물었다. 잠깐 고민하던 계집애는 자기는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빚을 지고 가끔 그렇게 도망가는 애들이 있단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제인에게는 빚이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난 다시 한번 폭발했다. 내 안에서 터진 불안감이 내 안을 가득 메우고, 마침내 터졌다. 공기에 닿은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는 욕설과 고함으로 변했다. 계집애는 겁에 질린 듯이 말을 멈췄다. 계집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계집애가 도망가기 전에 그 계집애의 손목을 잡았다.

짤랑. 계집애의 손목에서 팔찌가 부딪쳤다. 그 소리가 나를 진정시켰다. 침을 삼켰다. 그리고 계집애에게 사과를 하고 나서 제인이 다니는 보도방이 어디 있는지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선가 영업 성적이 떨어지거나 하는 도우미는 보도방에서 핸드폰을 뺐고 섬이나 다른 지역으로 팔아넘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제인이 영업 성적이 떨어진다거나 그런 것은 잘 몰랐지만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요새 제인이 위험한 일을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업주 몰래 뭔가를 빼돌렸다던가.

계집애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다시 안에서 무언가가 북받쳤지만, 화를 내는 건 잘못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계집애가 제인을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당연한 일이었다. 공연히 보도방 위치를 불어댔다가 족침을 당하는 건 그 계집애였다. 다시 이런 곳에 출입하지 못하게 칼을 댄다는 말도 들었다. 얼굴이라거나 가슴이라거나 또는 다른 어딘가에. 설령 잘 일이 풀려 몸은 다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보도방을 다니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한 단계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고,

‘죽어도 싫겠지’. 계집애는 계속 도리질을 했다. 이 계집애에게서 보도방에 대해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칼을 들이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그래서 난 대신 제인이 나가던 곳에 대해 물었다. 긴 사정과 부탁, 다짐 끝에 제인이 나가던 노래방의 위치를 들을 수 있었다.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에야 그 계집애는 속살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나 역 근처의,

이미 내가 들렀던 노래방 중 하나였고,

난 이번에도 버스를 타지 않은 채 역까지 달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그 노래방 입구 앞에서 난 숨을 고르고 나서는, 깨진 벽돌 하나를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 노래방 문을 발로 찼다.

이번에는 화를 내는 것이 옳았다. 경찰에다가 신고하겠다는 말보다 그게 더 씨알이 먹혔는지도 모르겠다. 미친 듯이 카운터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발로 찼다. 카운터 위에 있는 모조 화분을 집어던졌다. 음료수가 들어있는 냉장고를 발로 차기 시작하자 이제 애원하는 것은 노래방 주인이었다. 다행히 벽돌을 쓸 일은 없었다. 노래방 주인은(역겹게도 여자였다.) ‘자신이 말한 거라고는 절대 말하지 말라’며 내게 드디어 보도방의 주소를 일러주었다. 그러면서도 혹시 사무실 위치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며 그건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사무실 위치가 바뀌었다면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노래방을 나와 시간을 휴대전화를 열었을 때는 오후 6시를 좀 넘긴 시간이었다. 휴대전화에서는 점장으로부터 발신전화가 일곱 통이나 와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만 확인한 채 다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택시를 불렀다. 보도방까지의 거리는 도저히 뛰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날 처음 자리에 앉아 보는 것처럼 택시 좌석에 몸을 뉘었다. 택시기사는 백미러로 내 몰골을 훔쳐보더니 도저히 말을 걸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전철 역 아래를 지날 때 지직 거리던 라디오 소리가 역을 지나면서 맑아졌다.

최근 매춘 및 윤락 여성들을 상대로 한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뉴스 속보였다.


23

노래방 주인이 말한 빌딩의 5층까지 난 계단으로 올라갔다. 도저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었다. 5층 사무실의 철문은 잠겨져 있었지만 난 미친 듯이 주먹과 발길질과 벽돌로 문을 두드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검은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재빠르게 내 멱살을 잡았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두툼한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쳤다.

뺨이 날아간 건 아닌지 만져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뺨은 얼얼한 통증으로 자신의 위치를 쉼 없이 알렸다. 난 멱살을 뿌리치고 문을 열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좁은 사무실 안에는 별다른 가구가 없었고,

다행히 검은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 혼자였다.

남자는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알았는지 몹시 궁금해 했다. 그러나 난 말하지 않았다. 그가 내 뺨을 두어 번 더 갈기고 주먹으로 내 배를 후려쳤음에도. 어쩌면 그가 하도 날 때려대는 통에 어디서 이 위치를 주워들었는지 까먹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렸다.

윙윙 울리던 머리가 가라앉고 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인은 어디에 있어요? 제인, 제인은 어디에 있냐구요.

남자는 화를 냈다. 그렇지만 피투성이가 된 내 얼굴을 보던 남자는 화를 가라앉히더니 큰 책상 뒤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봉투 하나를 내게 던져주었다. 서류로 가득 차있는 봉투였다. 그 봉투에는,

보도 여성들의 사진과 본명, 나이와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연락처 등이 적혀 있었다.

-씨발, 제인이 어떤 년인지 거기서 찾아봐. 닥치고 찾아.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죽여 버릴 거야.

하도 머리를 맞은 터라 남자의 목소리는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것처럼 울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껄일 틈도 없었다. 서류 사이에서 제인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 수 연. 1977년 생.

그러나 그 여자는 최수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인이었다. 내 제인이었다. 제인이 정말 27살이라는 사실에 제인의 본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갑자기 눈물이 돌았다. 두들겨 맞았을 때도 울음이 나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울음이 솟구쳐서 난 그 사진을 붙들고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내 울음에 남자는 당황한 듯이 보였다.

-조용해, 씨발.

등등의 말을 낮게 조아리기는 했지만 날 더 때리지는 않았다. 내가 제인의 서류를 들고 비척비척 일어서자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건 어디에 쓰려고?

“제인이 없어졌어요. 제인이······.”

-씨발.

“어디에, 팔아, 넘겼어요?”

나는 헐떡이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울었던 탓일까, 얼굴과 배가 고통을 호소했다.

-우리가 한 건 아냐.

“그럼 어디 있어요?”

-모르지, 씨발. 우리가 한 건 진짜 아냐. 그 년이 안 나와서 우리도 찾아보려고 했어.

남자의 마지막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난 철문으로 돌아섰다. 뒤에서 우렁우렁한 남자의 목소리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솜씨 있게 내 멱살을 잡아채던 그 모습처럼 어느새 남자는 내 등 뒤에 다가와 있었다.

-씨발, 너 어디가려고?

“경찰서요.”

-뭐 이 새꺄?

남자가 날 돌아 세웠다. 그리고

이번엔 주먹이었다. 왼쪽 얼굴 전체가 얼얼했다. 뼈가 울리는 것 같았다.

-뭐 이 새꺄? 경찰?

“제인이······. 제인이 없어졌단······.”

발길질.

“제인이······.”

다시 발길질.

나는 최대한 입을 벌려보았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창자가 꼬인 것처럼 배가 아팠다. 창자가 갈비뼈를 지나 등뼈에 달라붙어버린 건 아닌가 싶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흘렸다. 한참을 있자 입에서 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그래도 비틀비틀 거리며 일어설 수는 있었다.

그때 머리에 문장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제인이······.”

주먹.

씨발, 말은 하게 해줘야 할 거 아냐.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그런 생각은 했다. 그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더니 내 손에 쥔 제인의 신상명세서를 쥐었다. 제인의 본명과 제인의 생년월일이 구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난 입을 열 수 있었다.

“제인이 내 애를 가졌어요.”

정적.

-뭐?

“제인이 내 애를 가졌다구요.”

과연 작가지망생다운 거짓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다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남자에게 맞은 배가 지독하게 아팠다. 옆구리에도 깨진 유리조각이 몸 안에서 발버둥치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배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었다.

-씨발.

남자가 낮게 읊조렸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그 종이를 놓았다.

-왠지 자꾸 2차 뛰더라니······. 조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되는데. 그 썅년.

“제발 가게 해줘요.”

-애 배면 장사 망친다고 했는데, 그 썅년이······.

“제발요.”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은 내 안쪽으로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퉁퉁 부어오른 내장이 허파를 아래에서 위로 짓누르고 있었다. 남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알았어. 보내 줄게. 대신.

네. 제발.

-경찰서는 가지마. 경찰서 가면 알아서 해. 알아들어?

네. 알았습니다.

-씨발, 뭐 네가 경찰서 간다고 해도 우리한테 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린 또 발뺌하면 되니까. 알아들었냐고. 그래도 네가 경찰서 간다는 거 자체가 우리한테는 귀찮은 일이니까. 아무리 몰래 가도 소용없어. 우린 다 아니까. 알아들어?

네. 네. 그러니까 제발.

-왜 대답이 없어.

발길질.

남자의 구두가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순간 무릎이 푹 꺾였지만 그래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무릎을 부여잡고 헐떡거리며 일어 설 수 있었다. 아직 오른손에 종이를 쥐고 있었다.

철문을 열어준 건 남자였다. 꺼지라는 말도 하지 않고 남자는 내 눈앞에서 철문을 닫았다. 내려갈 때는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빌딩을 나와 도로까지 한참을 걸었다. 귀가 찢어진 사실은 아주 늦게 알았다. 귀걸이는 거의 떨어질 듯이 대롱거렸고 귓불도 반이 넘게 찢어져 있었다. 택시를 불렀다.

두 대는 나를 보고 그냥 지나쳤지만 세 번 째 택시는 나를 얼마 지나치더니 서고 말았다. 사실 나를 보고 섰다기 보다는 신호에 걸린 것 같았지만. 난 절뚝거리며 달려갔다. 그리고 재빨리 뒷문을 열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기사는 짜증과 두려움이 반쯤 섞인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난 입을 열었다가, 고통 때문에 다시 입을 닫았고, 신호가 바뀔 때까지 숨을 참고 있었다. 마침내 신호가 바뀌고 차가 움직였다. 나도 입을 열었다.

“경찰서요.”


#24

“실종신고요?”

경찰은 최수연이란 여자보다는 내 얼굴이 더 관심이 가는 듯 했다. 가끔 툭툭 내 얼굴에 대해서 유도 심문을 해댔지만 난 경찰의 어떤 질문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네. 실종신고요.”

“혹시 가족이나 그런 관계세요?”

“아뇨.”

“그럼 어떤 관곈데요?”

씨발,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그렇지만 내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제발 일단 사람 좀 찾아주세요.”

“꼭 이렇게 찾아오시는 분들 많으신데, 저희가 무슨 사람 찾는 사립탐정도 아니고, 이렇게 신고 들어올 때마다 찾아드릴 수도 없어요. 지금 이 여자 찾는 일 보다는 그쪽 얼굴이 더 심각한거 같은 데 어디서 맞았어요?”

“아니, 그게······.”

숨을 골랐다. 배의 통증은 어느 정도 가셨지만 얼굴의 통증은 아직도 왕왕 울리고 있었다. 경찰서 문에 비친 내 얼굴 반쪽은 완전히 퉁퉁 부어있었다.

“이 여자·····. 그러니까 이 여자 노래방 도우미에요.”

“······?”

“요새, 요새 막 이런 여자들 죽이는 미친 새끼 있잖아요!”

제인이 그 미친 새끼한테 죽었을지 모른다구요.

차마 그 말은 입 밖에 내뱉지 못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제인의 사망을 선고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경찰은 의자를 당겼다. 그리고 자판에 손을 올려놓았다.

난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경찰은 내게서 그 구겨진 종이를 빼앗듯이 가로챘다.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지구대 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25

가능성은 있습니다.

가능성이라니 무슨 가능성이라는 거야 씨발.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요. 그렇지만 아직 속단할 때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야, 접때 그거 갖고 와봐. 아, 그거 있잖아. 왜 어제 모텔 방에서 죽은 놈. 그 새끼 졸라 수상하다 그랬잖아. 내가 접때. 그래, 국과수 새끼들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재검 의뢰 했으니까. 그 모텔 숙박 장부 가져와 봐. 어. 어디 보자. 그러니까. 어 있네. 여기 있네.

최. 수. 연.

아직 이 남자가 살인범이라는 확증은 없습니다. 국과수에서 재검 결과도 아직 안나왔는데.

야, 이건 뭐 거의 확실한 거······. 아, 죄송합니다.

아이, 왜 갑자기 나서고 그래요. 박 형사님.

아, 아, 그냥, 아 죄송합니다. 아직 아무 것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가능성일 뿐입니다.

주먹질.

-야이, 씨발 새꺄. 우리 형님이 너 죽인다고 말했지, 이 개······.

새꺄. 그리고 발길질.

죽여라. 죽여. 그냥 죽여 버려. 가능성이라니 무슨 가능성이라는 거야.

-이 개새끼, 방금 뭐라 그랬어? 죽이라 그랬냐? 오냐, 씨발 내가 오늘 살인하나 한다.

왜 모텔에다가는 박영화라고 한거야? 나한텐 아직 네 나이 밖에 말해주지 않았잖아. 그렇게 나한텐 말하기 싫었어? 우린 뭐야. 너랑 난. 제인은 그럼 누구였어. 왜 나한텐 말하지 않은 거야.

-형님, 이 개새끼 죽은 거 아닙니까?

-걱정 마. 이 새꺄, 사시미질 한 것도 아닌데 벌써 뒈지기는.

-형님, 그래도.

-야, 여기 숨 쉬는 거 안보이냐? 씨발 너 때문에 놀랐잖아.

다시 발길질. 발길질. 발길질. 주먹질. 발길질. 주먹질. 주먹질. 발길질.

그리고 그 뒤는 기억나질 않는다. 아니, 기억할 필요도 없다. 비슷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아팠다.

알바를 나가던 도중이었다. 또 무단으로 빠졌으니 점장한테서는 또 전화가 오겠지. 경찰서에선 오늘 전화가 오려나? 아, 상관없겠다. 어차피 휴대전화는 부서졌으니까.

놈들은 둘 뿐이었다. 자기 패거리가 모두 몰려올 것처럼 말하던 남자의 표정을 떠올리고 나는 조금 웃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 둘 중에 한 명만 오더라도 내가 상대할 수 있는 덩치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놈들이 날 때린 시간은 삼십분도 채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따지고 보면 내 몸 어디에 삼십분을 넘게 때릴 만한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되자 내 몸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빨리 부서지기 시작했다. 이미 그 놈들이 날 때리기 전에도 내가 이미 부서져있었기 때문이다. 놈들이 치기 시작하자 나는 더 빨리 부서졌다.

부. 서. 졌. 다.


#26

손에 쥔 사진을 폈다. 사람을 찾습니다.

최수연. 나이 27세. 키 170Cm. 실종 당시에는 사진과 달리 염색한 긴 생머리로 추정. 평소 화려한 옷차림을 즐겨 입음. 본 여성을 목격하신 분께서는······.

아냐. 이건 제인이야.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건 제인이야. 다시 손에 든 종이를 구겼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바람이 불자 귀가 몸서리처질 만큼 아파왔다. 상처가 다시 찢어진 모양이다. 고개를 흔들었다. 길바닥에 부서진 핸드폰을 보았지만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면 다시 통증이 솟구칠게 분명했다.

침을 뱉었다. 피가 섞인 침이 길바닥에 동그랗게 퍼졌다.

역으로 걸었다. 사람들이 쳐다봤다. 제인과 함께 이 거리를 걸을 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날 쳐다봤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남자.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남자가 혼자 걷고 있었다.

그 남자는 역에 올랐고, 지하철을 탔다. 사람들이 슬그머니 비켜섰다. 심지어 내 앞에 앉아있던 고등학생 녀석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 앉았다. 앉는 순간 허벅지의 근육과 배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를 악물어야 했다. 흔들거리면서 지하철이 출발했다.


#27

강바람은 찼다. 다리 위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제 봄이 다 왔는데도 바람에 머리가 쉴 새 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녹색 물의 표면이 바람에 스르르 떨렸다. 사람이 바람에 몸을 떠는 것처럼. 강물이 꼭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은 깊을까. 깊겠지. 바닥도 보이지 않는데 그럼.

난간에 기대어 머리를 늘어뜨렸다. 꼭 강바닥이 천장처럼 보였다. 머리가 흔들릴 때 마다 천장은 오르내렸다. 천장은 단두대의 칼날처럼 퍼렇고, 또 차가워 보였다. 한 번 떨어지면 돌이킬 수 없겠지.

일 년에 한강에 빠져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중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자살하려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중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몰랐던 사람을 얼마나 될까.

사랑하는 사람이 미친 살인자한테 살해당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랑하는 사람한테 거짓말을 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나 하나겠지.

그러고도 살아있는 사람도 아마 나 하나겠지.

그러니까······.


#28

풍덩.

강물은 더 찼다.

강물에 뛰어내리면 심장마비로 죽는 다고 했던 새끼가 누구였나. 아마 한 번도 한강에 뛰어내려 본 적 없는 새끼겠지. 한강 물은 욕이 나오게 찼다. 옷에서 공기방울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허우적거렸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입을 벌렸다. 그렇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손이 저려왔다. 발끝에는 감각이 없었다. 물을 삼켰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말들이 터져 나왔다.

“미안해, 미안해. 살아야 되는데, 미안해.”

“아팠지, 너무 아팠지. 추웠지. 이 것보다도 더 추웠지.”

코와 입에 물이 들어왔다.

“미안해. 그렇지만, 작가지망생으로, 너 없이 살아갈 수 없어.”

“무서웠지. 지금 나보다도. 무서웠지. 너무나 외로웠지.”

물을 뱉어내고 싶었지만 더 많은 물이 들어왔다.

“살 수 없어. 너 없인. 제인 너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무 것도 쓸 수 없어. 아무 것도 기다릴 수 없어.”

“날 원망했지. 내가 없어서. 항상 넌 날 찾았는데도. 맨날 자길 데려가 달라고 전화했는데도.”

“돌아와, 제발 돌아와. 날 구해줘. 제발. 제발. 날 구해줘.”

“날 살게 해줘.”

팔이 무거웠다. 패딩이 물을 머금으면서 강바닥 아래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제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몸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강한 모터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풍덩.


#29

경찰인지 구조대일지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건져냈다. 두 번인가 세 번 쯤 그 보트에서 다시 뛰어 내렸다. 그 사람들이 마구 내 뺨을 쳤고 내 팔을 틀어잡았다.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팠다. 난 미친 듯이 욕설을 퍼붓고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가 다시 내 뺨을 쳤다.


#30

중앙대병원에서 두 시간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33만원을 냈다. 자살은 의료보험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해주었다. 어차피 의료보험에 들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다. 그렇게 물 안팎을 드나들며 발버둥을 쳤는데도 지갑이 강바닥으로 가라앉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다행이었다. 체온이 회복되고 옷이 마를 때까지 여기저기 다친 곳을 꿰맸다.

웃기게도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상처에 붕대를 덕지덕지 바르고 온몸에서 물비린내와 소독약 냄새를 풍기는 채로. 역시나 누군가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몹시 피곤했다.

아직 해가지지 않았는데 집에 들어온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마치 처음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옷을 벗었다. 몸에서 냄새가 심했지만 샤워를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눈을 감았다.

잠을 잤다.

어쩌면 며칠동안 잠을 잤는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꿈과 삶 중간의 어딘가에서 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잠에서 깬 이유는 놀랍게도 배가 고파서였다. 일어났을 때는 낮이었다. 아버지는 일을 나갈 시간이었다. 집안은 아무도 없었다.

냉장고 안도 텅 비어 있었다.

라면을 끓였다. 허겁지겁 라면을 먹었고 곧 토했다. 편의점에 전화를 걸었다. 놀랍게도 점장이 전화를 받았다. 점장은 무뚝뚝하게 날 해고했다. 보름치 일을 한 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냥 전화를 끊었다.

TV를 켰다.

다시 TV를 껐다. 이따가 나가서 우유라도 사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굽혀펴기를 해보았다. 몇 번 하기도 전에 팔이 후들거렸다. 그만 두었다. 다시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토한 것 때문인지 오히려 속이 더 불편했다. 일어나서 컴퓨터를 켰다.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마우스를 쥐고 바탕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그러다가 워드프로세서를 실행했다. 예의 그 숨 막힐 정도로 텅 빈 화면이 나타났다. 처음 타자를 배우는 사람처럼 양 손을 자판에 올려놓았다. 오른손가락이 씰룩거렸다.

잠깐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나려했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처럼 가까이 다가온 천장이 나를 덮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천장은, 남쪽 어딘가의 하늘처럼 높게 떠 있었다.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제인의 입김, 같은.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미지근한 것과 뜨거운 것 중간의 눈물이 볼에 툭 떨어졌다. 눈물에 어린 눈동자에 실오라기 같은 살구 빛 공기가 자판을 스쳐 지나는 것이 비췄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살구 빛은 사라졌다. 손을 자판에 얹었다.

그 순간 따뜻한 바람은 사라졌다. 대신 입 안에는 고약한 공기가 감돌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자판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그렇지만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 그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온몸을 멍멍하게 울리던 통증이 잊혀졌다. 그 사실도 난 모르고 있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살아남았다.


#31 「길」2005. 03. 07 완성. 2006. 08. 21 최종 수정

···중략···

길잡이는 내게 그 모래언덕을 보여주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닿는 경계에서 모래 언덕은 큰 몸을 숙이고 있었다. 길잡이는 내게 그 모래언덕이 이야기꾼이 변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모래언덕이 바람을 막는 탓에 그 언덕 뒤에는 작은 오아시스가 피어있었다. 연분홍색의 깃털을 부풀리는 비둘기들이 나래를 접고 있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야자를 따는 사막의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국의 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꽃잎을 펼치고 있었다. 그 풍경은 내게 지독한 거짓말처럼 와 닿았다.

이야기꾼이 마지막으로 공주에게 꾸며낸 이야기만큼이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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