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선릉 근처에 늙은 탁발승이 시주를 받았는데, 잡학에 능하여 문답을 주고받는데 거침이 없었다. 한 유생(儒生)이 승려를 희롱하기위해 일부러 애꿎은 질문을 던졌다.
“상대를 알지 못하면서 사랑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승려가 답하기를,
“사랑과 알아가는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유생이 다시 묻기를,
“내 듣기로, 불가에서 이르기를 부처의 마음과 경지를 알게 되면 즉시 부처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중생(中生) 중에서는 부처의 마음과 경지를 아는 이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노승(老僧)의 말은, 중생 중에 부처를 사랑하는 이가 없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이에 승려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알아가게 되는 것은 자연한 이치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오늘 무엇을 하며 놀았느냐, 누구와 놀았느냐, 무엇을 배웠느냐 하며 아이에게 성가시게 물어보는 까닭은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연인 사이에 물음이 많은 까닭 또한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질문들이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배움에 있어서도 사랑과 앎은 일치하니, 내가 공맹(孔孟:공자와 맹자)의 뜻을 사랑하면 공맹의 뜻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내가 주자(朱子)의 뜻을 사랑하면 주자의 뜻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여, 좀벌레와 곰팡이가 슨 낡은 책을 뒤져서라도 성현의 문장을 찾기 위해 애쓰고, 스승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며 묻고, 동기에게 천치 취급을 받더라도 내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다시 알고자 하며, 알게 되면 마음이 상쾌하고 밝아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완전히 아는 사람은 나(吾)밖에 없다.’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렇기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 묻고, 또 물어,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고 이를 행합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묻지 않고 전에 하던 일을 그저 되풀이하거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니, 결코 스스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공자는 인(仁)에 대해, “자신이 바라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마라.(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이르셨는데,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과 바라는 일을 알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생각하니, 과연 그 말에 옳은 것이 있었다. 옛사람들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나 또한 스스로 한 길의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논하는 이들 중 스스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으랴.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가 또한 어찌 이치를 논하고 사물을 탐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문자답(自問自答: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함.) 또한 수양의 과정이요, 자문(自問: 스스로 물음.)에 자답(自答: 스스로 답함.)하기 전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적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