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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엽서시

은행나무를 생각하며

by 엽서시

동료가 아침부터, 말로 툭, 나를 긁고 지나갈 때에

상사가 뭘 잘못 먹었나, 싶게 이유도 없이 지랄맞게 구는 때에

발주를 넣은 물건이 옆 건물로 잘못 배송되었다는 말을 하며 히히 웃는 거래처 직원과,

고객사에서 유독 전화가 잦을 때,


나는 은행나무를 생각한다.


나는 은행나무다,

길고양이들이 발톱으로 긁어대도,

똥강아지가 다리를 들고 오줌을 갈겨대고, 지나가던 누렁개가 킁킁 냄새를 맡고 저도 오줌을 갈겨대고, 이제는 웬 취객까지 앞에서 바지춤을 추슬러대도,

누군가 입에 물고 가던 종이컵을 툭 던지고, 누구는 빨랫줄을 허리에 묶어대고 이불을 건다 담요를 턴다 못살게 흔들어대도,

경비가 못을 가지고 와서는, 재활용 똑바로 하라는 안내문을 내 옆구리에 박아넣어도,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은행나무다.


누구는 내게 열매가 구린내가 난다며 흘겨보고, 누구는 내게 이 가을에 지랄맞게 낙엽만 많다고 투덜거린다.

그래도 나는 은행나무, 파란 하늘에 대고 노란 웃음을 낱낱이 포개어 비춘다, 어느 누구는 내 빛깔을 알아 줄지도 몰라, 하는 생각도 없이,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마냥 하늘만 바라보는, 나는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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