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누마

무명이 쓰고 GPT가 그리다

by 엽서시

1. 소화 17년

나 히라누마는 아직도 그때를 기억한다.

첫 수업이었다. 나를 비롯한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 아홉 명의 신입생들은 아직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은 교수를 기다렸다. 머리를 파랗게 깎은 교수는 5분이 지나서야 강의실에 들어섰다. 검은 가죽옷을 입은 사내가 강의실 문을 닫았다. 뚜걱, 뚜걱. 우리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교수 역시 부동자세로 교단 앞에 섰다.

교단 앞에는 우리의 명단이 있었다. 교수의 찬 눈빛이 우리를 훑더니, 다시 명단으로 향했다.

“히라누마”

옙. 나는 손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대답은 짧아야 한다. 그런데 한 개의 대답이 덧대다. 덧댄 대답은 강의실 뒤편에서 들렸다. 그러나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교수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교수의 눈은 내 머리통을 넘어 교실 뒤편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히라누마 도쥬”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이 아니기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내리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강의실 뒤편에 훌쩍한 키의 청년이 아직도 손을 들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의 어쩐지 어설픈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가 조선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라누마 도쥬.”

네. 교수가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네는 조선인이지."
강의실에 술렁이는 침묵이 돌았다.
"왜 문학부를 지원했나.”

나를 비롯한 학생들의 눈빛에 요동이 쳤다. 교수는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문이었다. 교수는 교수가 아닌, 소좌처럼 보였다. 그 소좌의 호령 앞에서 청년은, 여전히 어설픈 미소를 지은 채 요지부동으로 아직도 손을 들고 있었다.

“대답하게.”

교수는 늑대가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깔았다.

“저는 시를 배우고자.”

낮지만 결코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저것이 히라누마 도쥬의 목소리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닥쳐!”

교수의 외침은 대답처럼 짧았다. 흡사 비명 같이 들렸다.

“소화 16년 이후 제국은 귀축미영과 싸움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네놈은!”

이제 교수의 분노는 펄펄 끓는 나베처럼, 끓어 넘치고 있었다.

“시라니!”

우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히라누마 도쥬는 아니었다. 나와 같은 성씨를 가진, 그리고 껑충한 키에 어설픈 미소를 가진 그 청년은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자네, 요시찰인물이라더군.”

나는 교수와 함께 강의실에 온 검은 가죽옷을 입은 사내를 떠올렸다. 교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업을 시작했다.

히라누마 도쥬는 조선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교정을 걸어다녔다. 껑충한 그의 키는 너무나 쉽게 눈에 띄었다. 나는 종종 그가 릴케 따위의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릴케는 승리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약하고 병든 정신을 자랑처럼 읊조리는 시대는 끝났다, 교수는 소리 질렀다.

우리는 영미의 ‘나약하고 병든 정신’을 담은 시 대신 절명시를 배웠다. 대부분은 무사들의 것이었다.

몸이여, 이슬에서 와 이슬로 가나니.

부귀영화여, 그대는 꿈 중의 꿈이로다.

소화 17년의 하늘에는 종종 공습경보가 울렸다. 훈련이었다. 우리는 정해진 방공호로 달려갔다. 우리는 좁은 방공호에서 훈련이 종료되기를 기다렸다. 여학생 몇 명이 모여 속닥거렸다. 그녀들은 여느 때처럼 새로 생긴 카페의 파르페라던가, 어느 멋쟁이가 두르고 온 보헤미안 넥타이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히라누마가 쓴 시라니까.

그래? 누가 그러디?

글쎄, 그건 비밀이고.

순간 나는 그녀들이 들고 있는 종이를 낚아챘다. 나는 젊었다. 아니, 어렸다. 어리다는 것은 때로는 무례하다는 것이다. 구겨진 종이에는 한 편의 짧은 시가 적혀있었다. 여자가 쓴 동글동글한 글씨였다. 아마 누군가 그의 공책에 적힌 시를 옮겨 적은 것이 분명했다. 시의 밑에는 히라누마 도쥬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시는 짧고 간결했다. 나는 그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전부는 아니지만.

“이 시를 히라누마가 썼다고?”

내 목소리는 낮고 짧았다. 억눌려있었다. 차마 그 조선인이? 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소화 12년 이래 조선인도 다 같은 황국신민이었다. 같은 황국신민으로서 서로를 차별하는 말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있었다.

나는 다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시는 짧았다. 단어는 많지 않았고 뜻은 분명했다. 따라한 것이 분명하다, 외치고 싶었지만, 누구의 시를 따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놈이 이 시를 일본말로 썼단 말이냐?”

여학생 중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다시 속으로 목소리를 씹어 삼켰다.

령선인 자식.

훈련이 종료되고, 우리는 땀이 범벅이 된 채 방공호를 나왔다. 나는 교정 곳곳을 들쑤시며 돌아다녔다. 곧 문과대학 건물을 돌아나오는 껑충한 키가 보였다.

히라누마.

“이봐, 히라누마.”

히라누마가 나를 돌아보았다. 껑충한 키. 그러나 머리가 박박 밀려있었다. 나는 묻지 않았다.

“너는 조선인이지.”

그때까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던 히라누마가 입을 한 일자로 다물었다.

“조선인들도 신민이야, 어째서 입대하지 않지?”

히라누마는 침묵했다. 나는 그의 박박 깎은 머리통을 노려보았다. 어쩐지 그의 눈을 노려볼 수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황국신민들이 귀축영미에 대항하여 대동아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어. 너는 이 싸움에서 져도 좋다는 말이냐?”

지금도 동남아의 참호 곳곳에서 천황폐하의 욱일기가 펄럭이고 있다. 태양은 지지 않는다. 역사는 오늘날의 싸움을 대동아공영을 위한 싸움으로 기록할 것이다. 나는 외치고 싶었다.

“조선말로 시를 썼다지?”

나는 뇌까렸다. 히라누마는 여전히 침묵했다.

“불량선인.”

입 속에 맴돌던 말을 뱉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네 놈은 네 성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한 마디 말을 덧대었다. 그러자.

“부끄럽다.”

놀랐다. 짐승처럼 순해 빠진 놈으로 알았는데. 히라누마의 목소리는 암팡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게 새어나온 것을 후회했다. 그 대신 나는 히라누마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를 내려보지 마라,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지 마라. 아마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나보다 껑충한 이의 멱살을 쥐고 있는 것이 우스웠다.

“나는 내 이름이 부끄럽다.”

히라누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짧았다. 그 순간.

철썩,

누군가가 히라누마의 뺨을 올려붙였다. 히라누마는 큰 몸을 휘청이며 몇 걸음 비틀거렸다. 히라누마의 뺨을 올려붙인 것은 노구치였다.

“개자식, 다시 한 번 말해봐라.”

히라누마의 어깨 만치의 키의 작달막한 노구치는 멧돼지처럼 식식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도 도장에서 다져진 노구치의 손마디는 굵었다. 히라누마의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우면 다시 돌려내! 너희 조선인들더러 숨으라고 준 이름이 아니야.”

노구치는 마치 교수처럼 윽박질렀다. 우리를 둘러싼 무리 중 조선인 몇몇이 비쓱거리며 히라누마를 데려갔다. 히라누마는 벌 뺨에 손을 대고, 다른 쪽 옆구리에 릴케의 시집을 낀 채, 다른 조선인들과 함께 멀리 사라졌다.

싸움이 끝났다. 돌을 들추면 벌레들이 햇빛에 흩어지듯,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도 흩어졌다.

“겁쟁이 자식.”

나는 침을 뱉었다. 내 속에 가래처럼 남아있는 키가 껑충한, 한없이 순한, 따위의 인상을 내쫓고 싶었다.



2. 소화 20년

소화 19년 4월, 나는 입대하였다.

도쿄에는 매일 같이 공습경보가 울렸다. 이제 훈련은 없었다. 미국의 폭격기는 거리낌 없이 도쿄의 상공을 드나들었다. 나는 방공부대 소속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짓은 나무막대기로 바닷새를 잡으려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의 폭격기는 제국의 총알이 닿지 않는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렸다.

모래로 완전히 덮기 전까지, 불은 꺼지지 않았다. 늘 모래는 부족했고, 불은 곳곳에서 번졌다. 사람들은 불을 끄기보다, 차라리 불이 붙은 집의 옆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울었고, 거리에는 머리에 군데군데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구걸을 다녔다. 선임과 부사관들은 늘 술에 취해있었다. 그들의 오롯한 낙은 후임병들에게 주먹질을 하거나 기합을 주는 것뿐이었다.

히라누마, 이 자식, 문학부를 나왔다지.

어디 미국말 좀 해 보거라.

아냐, 어디 시를 한 번 읊어봐. 흥 나는 걸로.

선임들은 굶주린 두억시니 같은 몰골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온통 재투성이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두들겨 맞겠지. 나는 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온통 부옇게 물 들었을 때,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쪽빛이었다.

구름도, 비행기도 없었다. 오로지 한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부끄럽다, 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 시를 읋지 않았고, 선임들은 부러진 삽자루로 내 허벅지 안쪽을 후려갈겼다. 두들겨 맞으면서, 나는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이를 물어야 했다.

우리는 방공부대였지만, 소방대나 다름없었다. 우리의 적은 미군이 아닌, 미군의 불이었다. 내가 받은 보병총은 국화 무늬가 없었다. 미얀마에서 온 선임 하나는 불을 두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른팔 한쪽이 온통 화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결국 불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는 물에 빠져 죽었다.

어느 날 미군의 비행기가 추락했다.

미군 파일럿은 돌에 맞아 죽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죽창을 쥔 어린 것들이 시체의 옆구리를 찔렀다. 시체는 끌려 다니면서 벌겋고 검은 자국을 남겼다. 나도 돌을 쥐고 있었다.

이봐, 히라누마, 어째서 던지지 않나.

이와다 조장이 물었다.

글쎄요,

속에서 말이 굴렀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서 연기가 나고 있었고, 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어째서 돌을 던지지 않았지,

글쎄요.

삽으로 모래를 치고, 도끼로 나무 기둥을 찍어내면서 나는 속으로 물었다.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지.

누군가 속에서 답했다.

누구냐. 누구지. 너는.

내 목소리를 모르는가, 히라누마.

너는,

무언가 말을 하려 할 때 잠에서 깨었다.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낮이었다. 사람들이 온통 라디오에 붙어있었다. 히로시마에 미국의 신식 폭탄이 떨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은 술렁였다. 신형 소이탄 같은 것인가, 아니면 그냥 폭탄인 것인가.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히로시마에 내 친정이 있어요, 새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새댁도 있었다.

아흐레 후,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3. 소화 48년

“우에스기 씨는 아직도 지금이 대동아시대인줄 안다니까. 지금 이 시대에 무사정신이 웬 말인가.”

언제나 그렇듯 다카모토 부장은 왼손에 든 술잔을 돌리며 사장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열두 시 오십 분이 넘었다. 나는 입술에 술잔을 붙였다가, 다시 떼었다.

“저번에 들으니까 사실 사장님 입대도 안하셨다고 하던데.”

“그래? 만주에서 근무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 대체 누가 그러던가?”

“코지씨가 그러던데요. 사장님이랑 술 먹다가 총 얘기가 나왔는데, 99식 보병총에 대해서 우물쭈물 하더라고.”

“그 사람, 알고보면 전부 말뿐이라니까.”

“그러고 보니 9월에 사내 낭독회가 있다면서?”

“예, 그러게요. 사장님이 심사를 한다고 하던데.”

“또 무사도겠군.”

“그렇죠. 어떠한 위기도 무사의 정신으로 나가고자 하면 못 벨 것이 없다.”

“아마 또 무사시가 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겠지.”

“천 번의 연습을 단이라 하고, 만 번의 연습을 련이라 한다, 세일즈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케다가 목소리를 깔고 사장 목소리를 흉내냈다. 모두 깔깔거리고 웃었다. 나도 입술을 씰룩였다.

영업부는 회식이 잦았다. 회식은 서로 꼬리를 문 뱀과 뱀처럼 잇달아 맞물려 있었다.

“어이, 히라누마, 너 문학부 출신 아니었나?”

부장의 눈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갑상선이 좋지 않은 부장의 눈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부장은 그런 제 눈마저 영업의 장기로 삼았다. 그 툭 튀어나온 눈은 때로는 비굴했고, 때로는 근엄했다. 나는 히죽 웃는 수밖에 없었다.

“재미없게스리, 이봐, 히라누마. 회사가 왜 자넬 뽑았는지 아나.”

술집에서 시나 읊으라고? 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억눌렀다. 다케다가 부장의 말에 꼬리를 이었다.

“히라누마, 미국 시라도 읊어 봐. 배운 게 하나쯤 있을 거 아냐.”

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도록 머리를 휘젓는 것들이 있었다. 갑자기 욕지기 같은 것이, 어떤 단어들이 치밀었다. 단어들은 부옇고, 또 또렸했다.
그러나 차마 내가 그 단어들을 짜 문장을 만들고 의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히라누마여, 그래서는 안된다.
부장은 여전히 나를 두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부장이 입을 열고, 다케다가 말을 덧붙이면 정해진 규칙처럼 깔깔 웃었다.

시.

릴케. 도연명.

절명시.

머리가 아프다. 술 때문인가. 아니다. 아직, 그럴 만큼 많이 마시지 않았다. 술도 력이다. 영업은 모든 것이 실력이다. 문학을 배웠다고? 문학은 아무 쓸모가 없네. 그래도 영어는 좀 할 줄 알겠군. 그래, 영어면 됐지. 영업은 팔 수 있는 것과, 살 수 있는 사람만 알면 된다고. 영어는 쓸모 있지. 앞으로 우리 회사는 세계로 뻗어나갈 회사임을 명심, 또 명심해두게. 뼈를 묻을 각오로 업무에 임하도록 하게. 영업의 현장은 전쟁터나 다름 없으니.

영업. 전쟁터.

그리고 시.

“절명의 날까지 창공을 우러르매!”

놀라 나를 올려다보는 부장의 눈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일편의 치욕도 없기를.”

낱말을 뱉어내는 것은 머리가 아니었다. 밥을 씹다 돌을 뱉고, 재채기를 하며 침을 뱉어내듯. 흡사 몸속을 돌아다니는 종양을 뱉어내듯 나는 마구 말을 지껄였다.

“뭐라고?”

“히라누마, 다시 말해보게.”

다케다는 어느새 손에 펜과 종이를 쥐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갈가마귀처럼 머릿속을 맴도는 낱말들이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우짖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두려웠다. 입을 벌리는 순간, 폭포수처럼 낱말이 쏟아질 것이, 그리고 그 순간 이 모든 장난이 끝날 것이.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달리는 호랑이의 잔등’을 타고 있었다. 입을 여는 수밖에 없다. 문득 내 눈앞 에 한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한 일자로 입술을 굳게 다문. 청년의 눈은 크고 한없이 순했다. 머리를 박박 깎은 두상은 결코 죄인이나, 혹은 군졸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선말이다.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욕설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기도에 가까운 것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 절명(絶命)의 날까지 창천(蒼天)을 우러르매

일편(一片)의 치욕(恥辱)도 없기를,

잎사귀를 스치는 바람도 나는 괴로웁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입술이 멎었다. 다음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 이봐, 다음!

나는 애타게 청년을 향해 부르짖었다. 어째서 다음 구절이 기억나지 않지. 아냐, 나는 다음 구절을 알고 있다. 너도 알고 있지 않은가. 이봐, 말해줘. 말해 달라고.

청년의 얼굴이 미소했다. 그러더니 빙글 돌아 사라졌다.

그래, 그럼 마지막 구절이라도.

그리고,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것이다.

오늘 밤에도 별은 바람에 스치우나니."


짝.

짝,짝,짝, 짝, 짝, 짝짝짝짝짝!

귀가 따갑다. 군화발 소리 같은 그것이 박수소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히라누마씨, 다시 봤어.”

다케다의 목소리다. 그가 ‘씨’를 붙여 나를 부르는 일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일어나 있었던가.

“히라누마, 자네의 시인가.”

부장이 물었다. 부장의 눈에는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아닙니다.”

부장이 따르는 술을 받았다.

“음, 그렇군. 아쉬워. 자네가 쓴 것이었다면…….”

달라고 했겠지. 나는 부장이 줄인 말을 짐작하며 술을 삼켰다. 씁쓸했다.

“아마 어느 무사가 쓴 시인가?”

나는 침묵했다. 머릿속에 웬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그 얼굴을 설명하고자 애썼다. 또다시 머릿속에 낱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조용한, 과묵한, 유순한, 수줍음 많은, 눈이 큰, 입을 굳게 다문, 강마른, 어쩐지 어설픈, 부끄러운, 겸손한, 조선의, 고개를 숙인, 별,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랑시스 잠, 침전(沈澱).

침전하는, 침전하는.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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