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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Dec 09. 2019

일요일 아침, 힘들게 찾아간 두부 집이 문을 닫았다.

힘들 땐 문 닫은 두부 집을 생각하련다.

일요일 아침. 두부가 먹고 싶었다. 아내에게 순두부가 아침으로 적당한지 의견을 물었다. 아내는 들기름에 구워 먹을 모두부까지 갖추어진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주었다. 난 그 의견에 동의했고 두부를 사러 나가기로 했다.


아내는 풀*원 두부나 Cj*부 같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만들어지는 기성품이 아닌 두부가 어떠냐는 추가 의견을 피력했다. 국산 콩을 직접 갈아서 손수 만든 두부라면 우리의 아침은 더욱 풍성해지지 않겠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개성이 넘치는 그 두부집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집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재래시장에 있단다. 아내는 조금은 고단할 수도 있는 당신의 발걸음이 우리의 입맛은 물론 재래시장을 살릴 수 있다는 의견도 잊지 않았다.


 집 옆 마트에 가기 위한 복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츄리닝에 경량 패딩을 걸쳤다. 신발은 크록스 슬리퍼. 양말은 신지 않았다. 아내는 이 추위에 재래시장까지 가기에는 드레스 코드가 맞지 않아 보인단다. 나도 그 의견엔 동의했지만 옷을 갈아 입고 게다가 양말까지 꺼내 신기엔 장이 너무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크록스의 꽉 막힌 비주얼은 내 발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차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복장 그대로 일요일 아침 입맛을 돋워줄 개성 넘치는 두부를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당연히 재래시장을 살린다는 사명감도 가지고. 밖은 추웠다. 경량 패딩을 뚫고 바람이 들어왔다. 나름 오리털이 들어 있었는데 깃털이 대부분이라는 걸 증명했다.


5분 정도 지나자 내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한민국 남성, 특히 종합병원의 의사, 그중 레지던트들이 대부분 신고 있는 크록스. 이 신발은 내 생각과는 달리 기체 통과시켰다. 내 발은 조금씩 굳어가기 시작했다.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감각이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츄리닝이라는 말이 트레이닝복을 멋스럽게 발음한 말이었다는 것 잠시 잊었다. 운동이나 훈련을 위한 옷이라 그런지 통기성이 좋았다. 바람은 내 하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상체는 오리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이 내 하체를 유린했다. 그냥 놔두지 않았다.


특히 양말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양말은 내 발바닥의 땀을 흡수하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양말은 엄청난 보온 효과가 있었다. 꽁꽁 얼어붙고 있는 발을 느끼며 양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이제 꼼지락 거려도 감각이 없는 발을 이끌고 두부 집에 도착했다. 두부집 문은 굳닫혀 있었다. 일요일은 휴무일이라는 빨간색 푯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소한 콩 삶는 냄새와 두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두부집은 나를 받아 주지 않았다.  언 발은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 근데 배가 아프다. 전 날 중국집을 갔는데 너무 많이 먹은 것이 분명하다. 이 느낌은 그거다. 아이들이 나가고 싶다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 아우성을 살살 달래며 잰걸음을 옮겼다. 잠시 멈추기도 했고, 느리게 걷기도 했다. 교회가 보여 교회로 들어가 아이들을 내보낼까 했지만 난 신자도 아닌데 일요일 오전 10시에 교회를 들어가긴 좀... 그랬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터였다. 조금만 더 가면 아파트 상가가 나올 거라 아이들에게 말하며 걸었다.


아파트 상가가 보인다. 이제 30m만 가면 입구다, 그래. 얘들아. 조금만 참으렴. 다 왔단다. 아이들의 참을성이 극도에 달했다. 목적지에 가까이 가면 느껴지면 흥분이랄까? 아이들에게서 그런 종류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흥분을 못 이겨 나올 것만 같은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전에 목적지에 다다랐다. 아이들은 무사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들과 함 하는 그 순간, 난 발이 시리지 않았다. 전혀 춥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서둘러 나간 후, 그제야 시린 발을 느낄 수 있었다. 시린 느낌은 희미했다.


히 머리 아픈 것을 잊는 방법으로 배가 더 아플 것을 권유한다. 어디에 부딪혀 아픔을 느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말도 안 되는 농담이지만 힘든 일을 잊는 방법으로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있다. 어떤 자극으로 힘든 일을 잊을 수만 있다면 시간이 지난 후, 힘든 일이 끝나 있거나 거기에 적응한 자신을 발견 적이 있다. 힘든 일이 있는 데 또 힘든 일을 일부러 만들어 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힘든 일을 잊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좋겠다. 발이 시리지만 똥이 마려웠다. 여기에 집중하느라 발 시린 것을 잊었다. 화장실을 목표로 최대한 안전하게 걷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시린 발은 이미 잊었다. 그리고 어느새 발을 녹일 수 있는 집이 눈 앞에 와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힘든 일을 만난다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상황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은 일단 접어 둔다. 왜 우리 부장은 내가 한 일을 별 것 아닌 걸로 폄하하냐는, 날 승진에서 누락시킨 지금 이 상황은 불합리하다는, 왜 나쁜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냐는 판단도 함께 접어 둔다. 짜증, 화, 분노에 숨겨져 있는 욕구를 찬찬히 찾아본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구, 급여가 올라 가족들이 조금은 편안해졌으면 하는 욕구, 안전한 상태로 조금 쉬고 싶다는 욕구를 찾을 수도 있다. 영 찾아지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러나 숨겨진 욕구에 집중하다 보면 남 탓이 줄어든다. 남 탓이 줄면 화, 짜증, 분노가 줄어든다. 그리고 '나'에 집중하다 보면 시린 발을 잠시 잊었던 것처럼 힘든 순간이 지나가기도 하는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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