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프레젠테이션은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세련미의 극치는 단순함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회사에서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다 보면 정체성이 혼란이 올 때가 많다. 프레젠테이션을 할 자료인지 보고서를 제출할 것인지 알 수 없는 작업을 매일 한다. 회사에서 정해놓은 템플릿에 말머리 기호를 무엇으로 할지 결정하고는 글자를 처넣고 있다.
"이 자료는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건가요? 아니면 보고를 위한 건가요?"
상사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고 나면 돌아오는 답변은 생각보다 훨씬 명쾌하다.
"둘 다!"
ㅣ내가 회사에서 파워포인트를 다루는 방법
회사에서 정해 놓은 템플릿이 있다. 우측 상단에 회사의 로고가 찍혀 있다. 상단엔 회사의 색으로 줄이 하나 그어져 있다. 그 위로 나눔 고딕이나 나눔 바른 고딕 24포인트로 제목을 넣어야 한다. 그 밑엔 말머리 표를 달고 내용을 글자로 채워 나간다. 3~4줄 정도의 글을 채워 넣고 나면 그래프나 프로세스를 그럴듯하게 함축해 놓은 도형을 넣는다.
여백 하나 없이 빽빽하게 채워 넣고 나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래프에 도형까지 넣었으니 잘 만들었다는 칭찬을 받을 것만 같다. 이런 식으로 만든 자료 37페이지를 출력해서 빨간펜 선생님에게 가져간다. 그 빨간펜 선생님은 내 말머리 표를 동그라미에서 사각형으로 바꾸라 지시한다. 쳐 넣은 글의 조사를 빼라고 한다. '하여'를 '되어'로 바꾸라고 한다. 어떤 문장은 빼고 어떤 문장은 넣는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휘자가 된 것처럼 일관적이지 않은 수정을 해댄다.
그리고는 그래프와 도형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잘 안 맞아. 느낌이 조금 아닌데..."
무엇이 안 맞는지 왜 느낌이 아닌지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내가 알아내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 난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여긴 미장원이 아닙니다. 정확히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말해주세요"
ㅣ말을 들으며 동시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초인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르 레이놀즈는 책을 시작하며 이렇게 질문한다. 그는 슬라이드를 시각자료로 활용하지 못하는 바보 같음을 힐난하고 싶었을 거다. 그러나 회사에는 이런 초인들이 넘쳐난다. 아니. 이런 초인이 되어야만 한다. 모든 발표자료는 가르가 말한 말머리 기호로 가득하니까. 그리고 "나 전문가요!"라고 외치는 듯한 그래프와 수치들이 빼곡하게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초인이 되지 않으면 회의에 참석할 수 조차 없다.
회사에서는 다른 초인의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발표자료와 보고서를 동시에 충족하는 자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회사에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 때 중요한 건 하나의 파일로 보고서의 역할도, 프레젠테이션 자료의 역할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당히 시각을 자극할 만한 요소도 있어야 하고, 읽을 수 있는 글자도 필요하다.
글자가 많으면 발표 자료로의 기능은 떨어진다. 시각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많아지면 보고서로서의 기능이 떨어진다. 보고서가 암호의 해독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인정받고 능력 있는 직장인이 될 수 있다.
가르 레이놀즈는 최고의 마케팅 전문가인 세스 고딘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하게 되면 형식이 내용을 압도해서 커뮤니케이션이 방해를 받고 내용이 희화화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래서 그런지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발표는 시끄럽고 지루하며 단조로운 학예회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슬라이드 쇼의 고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한 꼭지의 글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전에 프레젠테이션을 중단하라'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한다.
지난주 개발이 완료되어 곧 출시 예정 한 상품에 대한 미팅이 있었다. 예전에 한 번 그 회의에 들어갔다가 1시간 동안 졸음과 사투를 벌였던 기억 때문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회의에 앉아 있는 내내 여백 없이 '나 전문가야!'라는 말을 뿜어 내고 있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보며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전에 프레젠테이션을 중단하라'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ㅣ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 컴퓨터는 켜지 말아라
프레젠테이션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조직을 남과 차별화하고 자신만의 대의명분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다. 전달하려는 내용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실컷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런 생각으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드는 사람이 회사에 있을까? 아마 아래와 같은 생각으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드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전에는 어떻게 했었지? 이렇게 했었군... 비슷하게 해야 위험이 없겠지? 그래프를 이렇게 넣어줘야 팀장님이 좋아하겠지. 아... 아무 문제없이 발표가 넘어가야 할 텐데 말이야. 지적만 당하지 말자.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은 예전의 것을 답습하게 만든다. 당연히 새로운 발상이나 아이디어는 꿈도 꿀 수 없다. 발전은 요원한 것이 되어버리고 지적당하지 않고 조용히 발표가 끝나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어 버린다. 대부분의 회사원은 이러한 목표를 지상 최대의 목표로 파워포인트 파일을 더블클릭하고 있을 거다.
가르는 프레젠테이션의 준비 단계를 아날로그 식으로 준비하라고 한다. 발표 자료를 만들기 전 절대 파일을 열지 말라고 한다. 파워포인트를 실행하지 않는다. 종이를 준비하고 펜을 준비한다. 브레인스토밍을 해서 아이디어를 쏟아 낸다. 화이트보드를 사용해도 좋고 포스트 잍을 사용하여도 좋다. 아이디어를 쏟아 내고 그룹화한다. 그리곤 기획하고 구성한다. 스토리를 짠다. 이 과정에 디자인이 꼭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파워포인트 파일을 열고 텍스트를 욱여넣고 나서 디자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토리를 짜는 과정에서 디자인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컴퓨터를 켠다. 파워포인트를 켜고 1번 슬라이드부터 발표자료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렇게라도 하면 다행이다. 대부분 예전에 했던 파워포인트 파일을 열심히 찾는다. 3~4개의 파일을 찾아내고 실행한다. 그리고 짜깁기를 시작한다.
ㅣ핵심 메시지를 찾아라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완벽히 해 냈다면 프레젠테이션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회사 프레젠테이션에는 이 두 가지가 없다. 그저 내용을 설명하고 설명하고 설명한다. 왜 설명하는지, 자신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에 대하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백과사전에서 따온 듯한 설명을 그저 늘어놓기만 한다.
가르 레이놀즈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곧잘 이 점에서 실수를 한다. 발표자는 자신의 발표 내용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기에 그 주제가 중요한 이유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야 말로 청중들이 간절히 듣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ㅣ신뢰성에 대한 오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발표에 대한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거나, 통계 수치를 말하곤 한다. 회사의 프레젠테이션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서는 통계자료를 찾아내서 끼워 맞추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수치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결과를 만들어 놓고 뒤어서부터 수치나 분석자료를 맞춰 나가는 거다.
그러나 통계 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맥과 의미라고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건전지의 지속시간이 5시간"
vs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는 동안 좋아하는 TV 드라마를 볼 수 있을 정도의 건전지 파워"
어느 쪽이 더 와 닿는가?
무언가 전문적이라 여겨지는 설명들을 그저 늘어놓는 것보다는 적절한 문맥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러한 비유가 훨씬 감정을 터치할 수 있다.
ㅣ프레젠테이션 디자인
너무 사소한 일에 집착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단순하게 살아라. 단순하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가르 레이놀즈는 좋은 디자인은 단순한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더욱 명확하고 의미 있는 발표 자료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노력한 결과로써 얻어지는 것이 단순함'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을 시각화하려 애쓰다가는 조잡한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완성될 수 있다. 그저 이미지와 몇 가지 단어들을 통해 청중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해야 한다. 그것이 프레젠테이션 디자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 요소이다.
'고집불통 상사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정상적인 파워포인트'처럼 보일 때까지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있잖은가. '전문가스러운' 파워포인트 말이다.
단순함의 길은 멀기만 하다. 이런 상사를 넘어서야 한다. 굳은 의지를 가지라고 말한다. '단순화를 통한 증폭'이란 개념에 열린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이 책을 팀장님 책상 위에 몰래 가져다 놓을까도 생각 중이다.
이 책은 프레젠테이션 디자인의 핵심 원리 6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파워포인트 기술에 관련한 내용이라 생각했지만 전혀 달랐다.
1. 신호 대 잡음비의 원리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한다. 시각적인 난잡함을 없앤다. 입체 효과를 피한다. 그래프를 넣을 때 쓸데없는 선이나 배경 사진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3차원 입체 효과를 넣어서 촌스럽게 만들어서도 안된다. 데이터가 너무 많다면 꼭 필요한 5개 정도의 요소로 막대그래프를 구성하는 것이 좋다.
2. 그림 우위 효과의 원리
글보다는 그림이다. 이미지는 강력하다. 효율적이고 단도직입적이다. 메시지를 기억하기 쉽게 하는 암기 도구다. 커다란 사진을 배경으로 하고 텍스트를 넣는 것이 좋다. 배경 사진이 문구와 잘 어울려 하 하고 여백이 충분해 넉넉하게 배치될 수 있어야 한다.
3. 여백의 원리
여백은 우아함과 명확함을 상징한다. 고급스러움, 세련미, 기품 등의 느낌을 전달한다. 여백이 있기 때문에 다른 요소들이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슬라이드 한 장에 이것저것 집어넣는 대신 제목을 빼고 모두 지운다. 이미지와 여백으로 슬라이드를 채운다.
4. 균형
작가는 슬라이드 디자인에 역동적인 느낌과 흥미를 더욱 부여하고 싶다면 비대칭형 디자인을 사용해 보라고 한다. 비 대칭형 디자인은 여백을 활성화하고 디자인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5. 격자선과 삼등분 법칙
개인적으로 가장 동의한 법칙이었다. 작가는 피사체가 화면 정중앙에 위치할 경우 따분해진다고 한다. 9개의 사각형을 만들고 우측 하단의 4개의 사각형, 좌측 상단의 4개의 사각형 같은 위치에 피사체나 텍스트를 위치시키라고 한다. 그러면 훨씬 역동적이고 따분하지 않은 장표가 완성된다.
6. 대비, 반복, 정렬, 근접의 원리
하나의 포인트에 분명하게 차이가 나도록 대비하면 강조할 수 있다. 색상, 배치, 서체를 통해 이러한 대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각 슬라이드마다 유사한 요소를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같은 주제에 대한 일체감을 청중들에게 줄 수 있다. 개별 슬라이드를 동일한 선에 정렬하는 작업을 통해 슬라이드가 정돈된 느낌을 줄 수 있다. 미세한 차이가 당신을 비 전문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근접의 원리를 통해 연관성이 강한 요소들을 한 그룹으로 묶는 것이 좋다.
ㅣ발표
이렇게 자료를 만들었다면 이제 발표가 남았다. 저자는 발표하는 순간에 몰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발표를 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것 만이 최고의 발표로 당신을 이끈다.
당신을 몰입으로 이끌고 발표에 진정성을 담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바로 연습이다. 연습 없이 좋은 발표는 나올 수 없다. 혼자 연습을 하고 리허설을 하는 과정을 통해 좋은 발표가 나온다. 슬라이드는 당신의 발표를 돕는 보조 자료일 뿐이다.
난 많은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임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가벼운 설명회부터, 평가 위원 앞에서 하는 200억짜리 경쟁 프레젠테이션까지 100번은 넘는 발표를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느꼈던 대부분의 이야기가 <프리젠테이션 젠>에 담겨 있었다. 내 생각과 너무 같아 놀라는 순간도 많았다.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던 부분들을 절묘한 비유와 예시를 통해 정리해 놓은 이 책에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사진과 함께 보려면>
프레젠테이션 젠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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