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법정 필수 교육 과정'일 뿐인데 말이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금융소비자보호 강화 교육
그러나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은 열심히 듣는다. 점심시간을 이용하기도 하고 근무 시간에 조금 눈치 보이지만 이어폰을 꽂고 듣는다. 강의를 들으며 메모도 한다. 잠시 멈추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에 대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그 누구도 보지 않는 교육 게시판에 글도 올린다.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방금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희롱 예방 교육을 듣고 있습니다.
퀄리티의 차이가 어마어마합니다. 같은 곳에서 만들었다고 느껴지지 않는군요.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은 아마 그 누구도 듣지 않고 틀어 놓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희롱 예방 교육도 틀어놓고만 있을 사람이 많겠지요.
그러나 성희롱 예방 교육은 도입부터 눈길을 잡아 끕니다.
콘텐츠의 퀄리티나 내용이 많이 차이 나네요.
아마 조금 더 많은 사람이 교육을 듣지 않을까 합니다.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에 더욱 많은 고민과 투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답변도 달렸다.
안녕하세요. 000님.
휴** 고객행복센터 학습매니저 이**입니다.
교육과정에 관심 가져주시고 개선 요청 의견까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담당부서에 내용 전달드렸으며, 추후 콘텐츠 제작 시 좀 더 퀄리티 있고 질 좋은 내용으로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추후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지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담당자로 잠시 빙의해 본다.
'아... **귀찮게 뭐 이런 의견을 올리고 그러는 거야!'
물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진심으로 '추후 콘텐츠 제작 시 좀 더 퀄리티 있고 질 좋은 내용으로 보답'하려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감히 조심스레 강력히 말해보면, '거의' 그럴 리 없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둘째 때문이다.
우리 둘째는 세상 귀여운 얼굴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한다. 그 일이 지금 상황 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예의범절을 따져 보았을 때 적절치 않으며, 그 일을 당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피해가 가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일을 못하게 되면 둘째는 화가 난다. 울며 떼를 쓴다. 둘째의 머릿속에는 왜 자신이 그 일을 하지 못하는지, 지금 당장 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듯하다.
우리 둘째는 7살이지만 아직 말을 하지 못한다. 1~2살 수준의 말만 되풀이 할 뿐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언어는 5~6세 정도는 되어 보인다. 병원이야기만 나와도 울며 안 간다고 하니까. 혹은 병원의 병자도 꺼내지 않고 그저 초음파 검사나 예방주사 이야기만 나와도 울며 자기는 안 간다고 표현을 하니까.
둘째는 아직 말을 못하지만 말 하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 아빠, 하비, 할미, 삐삐, 비해이, 오오바이, 기하, 쭈쭈쭈, 음마와 같은 표현들을 즐겨 한다. 손짓과 발짓은 아빠를 닮아서인지 엄청 크다.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를 해독하듯이 아이의 말을 듣는다. 함께 경험한 내용이 아니라면 알아 들을 가능성은 10~20% 남짓이다. 많은 집중력을 요하며, 꽤나 지루한 작업이다.
말은 하고 싶으나 말을 할 수 없다. 내가 말을 하고 있으나 상대편은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 의사를 전하고 싶어 상대를 건드린다. 가끔 조금 과하게 건드리기도 한다. 그러면 상대는 불쾌함을 표시한다.
둘째의 말을 듣는 건 지루한 작업이지만, 둘째는 자신의 말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답답하고, 속상하다. (자신이 친구하고 생각하는)아이들이 자신을 무시한다. 이상하다고 말한다.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서 웃어 본다. 누군가 자신을 혼내고 이상하다 말하더라도 한 번 웃어 본다. 그래도 안 될까? 이러면 날 좋아해 주지 않을까?
그래서 난 둘째의 말을 들을 때면 경건하다. 최대한의 집중과 관심을 보인다. 난 단지 지루하지만 아이는 매우 속상하니까. 난 단지 답답할 뿐이지만 아이는 상처가 나니까. 나라도 아이의 말에 집중한다. 나라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관심을 아이에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난 그저 내 삶이 힘들었다. 지금 내 상황이, 신이, 남들이, 세상이, 가족이 날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겨우겨우 이 생각을 떨쳐 냈더니 둘째가 살아나가야할 세상이 보였다. 혹시라도 내가 없이 살아갈 세상이 보였다. 내가 있더라도 앞쪽에 펼쳐진 가시밭길이 보였다.
우리 둘째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난 발달장애 아동의 아빠다. 내가 그 누구도 듣지 않는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을 듣는 이유다. 그리고 그 누구도 보지 않을 의견을 게시판에 남긴 이유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을 알지만 의견을 내고 답변을 바랐던 이유다.
우리 가족이 살아갈 세상을 조금 더 바라보려 한다. '내 세상'과 '우리 가족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 보고 싶다. 내가 바뀌든, 세상이 바뀌든, 아니면 운이 좋아서 둘다 바뀌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고 있는 퇴사하려는 척은 더 의미있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