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뜬금없는 고백 하나.
나는 소싯적 부모님 속 꽤나 썩였다.
버리지 않고 키워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정도로..
딱히 '질풍노도'의 시기는 없었지만,
아주 가늘고 길~게 부모님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렸기 때문이다.
10대에 사춘기가 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춘기가 2, 30대에 오면 문제가 있다.
뭐든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배아에도 이 얘기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좋은 배아는 시기적절하게 분화하고 발달한다.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킨 후
대략 26시간이 지나면 2세포기,
다시 39시간쯤 흐르면 4세포기,
그리고 5일째가 되면 마침내 이식하기 좋은 포배기로 거듭난다.
이 기준을 벗어나 너무 늦게 발달하거나, 너무 빨리 발달하는 것은 착상 및 임신에 좋지 못한 징후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상황이다.
많은 난임 여성이 인터넷에서 예쁜 배아 사진을 보고는 자신의 배아 역시 그렇게 발달하리라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참 고마울 텐데, 안타깝게도 모든 배아가 그렇지는 못하다.
예를 들어,
파편화(fragmetation)는 발달 중인 배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는 분열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현상인데, 심하면 배아의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래서 파편화가 심한 배아는 낮은 등급을 부여받는 것이다.
예쁜 배아를 기대했기 때문인지,
처음 자신의 배아를 보면 많이 걱정스러워한다.
그러나 파편이 생기더라도 발달만 해준다면 다행이다.
채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어버리거나(lysis)
수정시킨 후 퇴화해 버리거나 (degeneration)
중간에 발달을 멈춰버리기도 한다 (arrest)
이런 경우에는 살릴 방도가 없다.
채취를 진행한 한 여성이 묻는다.
"난자가 OO 개나 나왔는데 왜 배아 동결을 O 개 밖에 못하나요?"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며 결승선에 도달한 배아가 별로 없는 것이다.
간혹 지연 수정(delayed fertilization)되는 경우가 있다.
정자 난자를 수정시키면 보통 다음 날 아침에는 수정 여부가 확인되는데,
수정이 안 되었다가 뒤늦게 수정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우는 아무래도 좋은 등급을 부여받기는 어렵다.
처음 말했듯이 다 때가 있는 법이라 시기적절하게 발달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뒤늦게 수정이 된 배아가 꾸역꾸역 발달하더니 결국 6일 차에 '포배기'로 동결되었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지지리 공부도 안 하고 부모님 속만 썩이다가 뒤늦게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나를 닮았다.
그래서 끝내 동결에 성공한 그 배아를 보고 기뻤다.
녀석, 꼭 착상에 성공해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