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코로나로 다니던 요가원이 잠시 문을 닫았다. 제대로 된 수련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씩 마음이 조급해졌다. 유튜브를 보면서도 해보려고 몇 번 시도를 했다. 분명 땀은 났지만, 빠져들지는 못했다. 귀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으며 영상을 보지 않고 수련하려고 애써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아사나들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그 분의 시퀀스에 익숙하지 않아서. 자꾸만 눈으로 확인하다보니 집중이 분산되었고, 시퀀스를 따라가는 데에 급급한 모양새가 되었다.
내 안으로 한없이 깊이 빠져드는 시간이 그리웠다. 그러자 아쉬탕가가 떠올랐다. 셀프 수련을 해보기로 했다. 왜 진작 안 했을까. 이제 매일매일 해야지, 이 좋은 걸.
수련 전에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개운하게 감아냈다. 보송보송한 상태로 시작하는 게 좋아서. 방 청소를 하고 가네샤 요가 매트를 깔았다. 수련 기록을 남기기 위해 타이머와 타임슬립 영상을 켜두고서. 땀 닦는 수건 한 장과 달달거리는 오래된 선풍기 하나를 옆에 두고 그렇게 수련을 시작했다.
내가 요가원에서 회원님들한테 안내하던대로 아사나를 이어가보기로 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추가시켜서. 그래서 수리야A를 5번, B도 5번을 했다. 아, 딱 좋다. 지난 날들이 생각났다. 수리야A, B 각각 4세트 하기도 힘들어 매번 아쉬탕가 수련 가는 날엔 두려움반 설렘반에 떨었던. 이제 어느 정도 근력과 체력이 생겼나보다. 이전보다 덜 힘들고 심화동작도 더 도전해볼 욕심이 든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아쉬탕가를 오늘 하기로 한 것은 내 안에 깊게 빠져들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고 동작을 하는 동안 마음 속에서 내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수업하면서 사용하던 멘트들이었다. 귓가가 소란스러웠다. 습관처럼 익숙한 멘트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강박적인 면도 있었다. 수업을 쉬는 동안 혹시 감을 잃지 않을까, 호흡 안내를 놓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지금 기저에 깔려있었다. 자꾸만 수업 준비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멘트를 외치고 있었다. 카운트를 세고 있었다.
아, 안돼, 집중하자, 지금은 나한테만 집중하자. 의식적으로 목소리들을 차단하기 위해 애썼다. 조금더 내 호흡에 집중하고 내 몸의 부위부위를 의식하려고 했다. 다행이 줄기차던 목소리는 그쳤지만, 어쩔 수 없이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목소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우티타트리코나아사나에서는 회원들의 자세를 교정할 때 안내했던 멘트를 떠올리며 내 자세를 잡아나갔다. 파르쉬보타나아사나에서 평소에 뒷발의 뒷꿈치까지 꾹 누르라고 안내하곤 했는데, 그 누르는 감각이 의외로 잘 느껴지기 힘든 자세임을 깨달았다. 대신에 앞 발바닥을 꾹 밀어올리는 힘으로 엉덩이를 위로 끌어올리게 하고, 허벅지를 중앙으로 모으는 힘을 사용하라고 해드려야겠다, 라는 생각. 아르다밧다파드모타나아사나에서는 꼭 무릎을 구부리면서 내려가 손을 바닥에 짚도록 안내해드려야지. 배와 허벅지를 가깝게 해서 요추에 부담이 가지 않게! 아아, 푸르보타나아사나가 생각보다 더 힘들구나, 카운팅할 때 느리게 하지 않도록 신경써야지. 이렇게 자세에서 힘겨움이 느껴질 때마다 그 느낌을 기억해서 회원들한테 보다 잘 안내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자꾸 생각을 이어갔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사바아사나 때도 깊게 빠져들지 못했다. 생각이 자꾸 외부로 향하거나 허공에 흩날렸다. 내 의식을 바라보고 호흡을 관찰하고 매트에 닿아있는 몸의 감각과 창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를 느끼며 현재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명상의 시간이 아닌 명상하기 위한 애씀의 시간이었다.
사실, 강사로서 첫발을 내딛고 내 수업을 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수련을 할 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힘들어졌음을 알고 있었다. 자꾸 전달자로서의 시각을 꺼내며 내면에 빠져들려는 내 주의를 환기시켰다. 초보자니까, 아직 초보강사니까, 알아야할 것도 느껴야할 것도 많으니까 어쩔 수 없는 관문이라고 생각은 한다. 그래도 조금 아쉬울 뿐. 침잠하던 느낌이 그리울 뿐이다. 조금 더 내공이 쌓이고 수련 동안 굳이 감각을 연구하지 않아도 이미 그 지식들이 머리에 있다면 그 때에는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겠지.
그래도 지금 시기에서도 틈틈이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빠져듦의 시간은 곧 성장의 길이기도 하니까. 오늘 아쉬탕가 수련을 통해 확실히 더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이미 수도 없이 한 동작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자꾸 안내자로서의 시선을 꺼내어들던 것. 그로 인해 내 수련 자체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은 것. 안내자로서의 나와 요가수련자로서의 나를 분리시켜야겠구나. 적어도 내 수련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들을 나에게 줘야겠구나. 모든 생각을 비우고 조급함과 욕심을 내려두며 언어 이전의 감각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겠구나.
예를 들면 심리상담가가 상태가 염려스러운 환자를 만나도 퇴근 후에는 그 환자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워야하듯이, 그래야 삶이 영위되듯이, 나 또한 어쩌면 일과 삶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더 알고 싶고 빨리 배우고 싶고 하나라도 더욱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많으니까, 완벽한 분리는 어려우며 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40% 정도만 내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질릴 때까지, 그리고 완전히 감각해낼 때까지 해야지. 그리고 틈틈이 피크포즈도 연습하고, 내 시퀀스로도 수련 해야지. 코로나 2.5단계가 이번주 일요일까지라고는 했는데, 왠지 더 연장될 것 같고. 그럼 난 또 일주일 더 백수인 건가. 흐흐. 그 시간 동안 많이 읽고, 쓰고, 만들고, 수련하고, 생각하고, 명상해야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