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어느 시점부터 사물을 볼 때 한가지 색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저 눈에 띄는 자동차의 색이 무엇인지, 낡은 아파트 벽에 새로 칠해지는 시멘트 색이 무엇인지, 그리고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셔츠의 색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멈췄다. 이미 그것들은 하나의 색 이름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방 안에 있을 때 누르스름한 색을 띠는 내 손등은 햇살이 기가 막힌 아침 8시에는 더 하얗고 더 노래졌다. 그러다가 저녁 어스름이 깔린 후에 온통 푸른빛이 도는 세상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내려앉고는 했다.
왜 그 당연한 사실을 몰랐을까. 지금은 손이 녹슬어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지만 한 때 아주 어릴 적 꿈이 화가였던 어린 나조차도 그 사실을 몰랐다. 아니, 아마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 그렸던 담쟁이덩쿨로 가득찼던 돌담에 회색보다 노란색 물감이 더 들어갔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막연히 감각하던 사실을 머리로 또렷이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시야가 트이고 이전에 늘상 보던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다. 같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모든 사물들이 같은 빛과 색을 얇게 입고 있다. 아주 묽게 한 방울의 물감을 물에 타서 세상에 쏟아버린 것처럼 부드럽고 촘촘하게 모두 같은 빛에 담겨 있다. 현재 저녁 7시, 어둑한 푸른 하늘 밑으로 내 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맞은편 아파트도, 그 너머 멀리 있는 산도 하늘과 색이 같다. 그 푸르스름한 빛이 내 방까지 스며들어와있다. 내 손등도 조금은 푸른 것 같다.
계획을 세우거나 일을 진행시킬 때 확실하고 명확한 상태를 좋아한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애매모호한 것들을 사랑한다. 음악도 미술도 영화도 책도 사람도 여행도 하나의 특성이 강한 것보다는 다양한 것들을 잔잔한 파도처럼 연이어 느낄 수 있을 때 영감을 얻는다. 그래서 프랑스 영화가 좋고, 인디밴드가 좋고, 클래식이 좋고, 창극이 좋고, 현대무용이 좋다. 패키지보다 자유여행이 좋고, 유적지나 자연보다 오래된 골목 구경이 더 좋다. 시가 좋고 단단한 사람이 좋고 겸손한 사람이 좋다.
어느 순간 사물의 색을 생각해내는 것이 무의미한 일임을 느꼈다. 인간들이 규정한 언어로 볼 때, 지금 내 눈 앞의 공책은 살구색이겠지만, 형광등 아래가 아닌 푸른 바깥으로 나갔을 땐 분명 살구색이 아니게 될 것이다. 어우러진다. 단지 그 하나만을 따로 두고 볼 수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단지 그 사람의 말과 태도와 그 당시의 상황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어떤 색깔들을 뭍혀왔는지 모든 걸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그나마 그 사람을 조금 이해한다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물의 색을 규정지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난 뒤 더욱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 공통된 색깔들로 캔버스를 채워보고 싶다. 다양한 사물과 사람들 위해 옅게 혹은 짙게 내려앉은 하나의 색, 그것을 그려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