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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trict Code Jan 04. 2024

미국에서 처음으로 생일파티에 가본 날

친구 문제 상담 기술

아직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날이 있다. 그날을 이야기해보자고 한다. 3살 딸이 다니는 프리스쿨은 아마도 생일파티를 하려면 반 전체에게 초대장을 돌려야 하는 규칙이 있었나 보다.(나중에 안 사실) 미국생활 초기에는 들뜨고 설렜다. 여행과 모험, 그 사이에 있는 기분이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적극성이 마구 샘솟는다. 그래서였을까? 아이 프리스쿨에서 처음으로 받은 생일파티 초대장은 새로운 사교 세계로 가는 입문 같았다.


우선 그 당시 상황을 정리하자면 1. 생일파티 주인공의 얼굴을 모른다. 2. 파티 주인공의 부모님 얼굴도 모른다. 3. 아이생일 주인공인 아이를 언급한 일이 없다. 솔직히 '모르는 사람'의 생일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처음엔 갈지 말지 약간 고민이 됐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원래' 미국 생일파티는 그냥 다 가는 거고 거기서 서로를 알아가는 거라고 한다. '좋, 가보자!' 용기를 냈다. (다른 후기 글을 더 찾았어야 했다...)


매너를 지키기 위해 인터넷 글과 유튜브 영상을 뒤져서 미국 생일파티의 에티켓을 알아봤다.


1. 선물은 30달러에서 50달러 사이가 적당

2. 선물 포장은 무조건 하고, 봉투도 화려할수록 좋으며, 종이 완충제(구김 종이)를 봉투에 넣어 최대한 풍성하게 보여야

3. 생일 카드도 쓸 것

4. 생일 파티 가기 전 초대장의 연락처로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 물어보는 센스를 발휘할 것

+생일 파티에 갈 인원을 정리해서 알려 줄 것(ex. 아이 1, 성인 2)


위의 에티켓을 모두 지켜서 첫 생일파티 장소로 갔다. 생일 파티 장소는 키즈카페였다. 파티 주인공의 부모님이 우리를 맞이해 주며 (키즈카페에서) 재밌게 아이와 놀면 된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상태라서 영어가 조금, 아니 많이 걸려서 생일 파티에 오기 전부터 미국인들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스몰톡 주제로 뭐가 좋을지 공부했다.(스크립트도 만들 뻔...) 한 영어 강사가 날씨, 옷차림, 여행계획, 주말계획을 이야기하란다. 이 뻔한 주제들은 오히려 어색해서 결국 써먹지 못했다.


키즈카페를 돌아다니며 아이와 놀아줬다. 한 30분 정도 지나고 주위를 보니 약 5명의 아이와 그들의 부모가 생일파티에 참석한 것 같다. 파티 주인공 아버지는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파티에 참석한 부모님과 스몰톡을 하고 감사인사를 하러 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뭐라 말해야 하나 멘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언제 우리 가족에게 오나, 곧 오나?, 우리 바로 앞 부모님에게 말 거네, 이제 우리 차례인가?... 마음속으로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초조하게 기다렸다.


헌데... 파티 주인공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끝끝내 오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돌아서서 가버렸다. 순간 이방인이 느낄만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다.


우리 가족은 그야말로 꿔다 논 보릿자루 같았다. 병풍처럼 그들의 파티에서 소외된 것 같았다. 불편하고 껄끄러웠다. 파티가 시작된다는 안내가 들렸다. 작은 룸에는 뷔페식으로 파티음식이 있었다. 생일 파티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다. 간단하게 음식을 함께  생일 축하노래를 불러다. 주인공이 케이크 불을 끄고 받은 선물 중 한두 개를 펴 본다. 마지막으로 호스트가 손님들에게 구디백(답례품)을 나눠준다.


음식을 접시에 담은 후 일부러 파티 주인공인 아이 옆에 앉았다. 남편과 내 아이도 앉았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그들 부부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해도 무시할래?라는 오기가 발동했다. 안 되는 영어지만 '이곳 너무 좋다, 미국에서 생일 파티는 처음다, 이걸 다 준비하시느라 고생하셨겠다' 등 말을 붙였다. 그러자 그 부부는 우리에게 한국사람이냐면서 근처에 한국노래방(가라오케)에 가본 적 있다며 대화를 이었다.



파티 음식 (치킨은 동났다)
파티가 열린 미국 키즈카페
생일 축하 선물들
정성스러운 구디백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초대해 줘서 너무 고맙다고 마지막 인사를 한 후 생일 파티장을 나다. 확실하게 알다.


안 친한 아이 친구의 생일 파티는 굳이 갈 필요가 없다는 을. 

(모두가 아는 사실: 이 세상 모든 생일파티 참석은 사실상 의무는 아니다.)


아이의 반에는 약 18명의 원아가 있다. 그중 절반도 참석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만 온 것이다.


우리 부부는 토요일 오전에 간 그 생일파티 때문에 기가 다 빨려서 오후 내내 평소와 다르게 긴 낮잠을 잤다. 초대장은 받았으나 사실 초대받지 않은 남의 생일을 구경하러 간 꼴이었다. 그 낯 뜨거운 경험 때문에 미국에서의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물 흐르는 대로 인간관계를 두는 편이다. 미국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었다. 내 마음이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인간관계를 자연스럽게 하자고 생각했다. 아이 때문에, 혹은 인맥을 과시하고 싶은 허세(초반에 아주 잠깐 있었다)때문에 일부러 맞지 않는 틈을 조급하게 비집고 들어가상처받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외국에 산다고 저자세로 원어민들에게 이쁨(?) 받으려고 혹은 친해지려고 애쓰는 행동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연스럽지도 않고 그런 식의 인간관계는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이 사건 이후로 매달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받아도 아이의 '친한 친구(아이와 자주 놀고, 나도 아이의 부모님과 인사하며 안면이 있는 경우)' 생일 파티만 간다. 그러면 아이도 파티를 기다리며 좋아하고 우리 부부도 파티에서 환영받는 진짜 손님이 된다. 친한 친구가 생일 파티를 하지 않 경우는 생일을 기억해서 카드를 적어서 줬다. 그러면 다들 정성스러운 답장을 준다. 참고로 이 생일 파티 주인공과 내 아이는 생일 파티 이후 반이 달라졌는데 그 이후 프리스쿨 복도에서 그 부모를 보면 날 기억도 못하는 눈치다. 어떻게 알았냐고? 허공에 멈춘 민망한 내 인사들이 증거다. 이 상황이 오히려 코미디 같아서 생각할수록 씁쓸하지만 웃기다.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타인에게 놀라울 만큼 관심을 두지 않는다.





중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친구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을 많이 본다. 특히 여학생의 경우 친구문제는 곧 학교 내에서 생존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근에 B에게 들었는데 A가 친구들에게 제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거예요. A랑 진짜 친하다고 생각했거든요..."


"C가 자꾸 저에게 막말해서 힘들어요. 최근에는 저에게 갑자기 000이라고 하는 거예요. 생각할수록 너무 화나고..."


"D는 저랑 진짜 안 맞아요. D 때문에 학교 나오기 싫어요."


"E가 노는 무리에서 저를 빼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왜 E는 저를 싫어할까요?"


"F가 말하는 방식이 싫어서 제가 진짜 좋게 F에게 조언해 줬거든요. 근데 그게 맘에 안 들었나 봐요..."


학교폭력으로 분류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위의 내용과 같이 특정 친구와 맞지 않아서 괴롭다는 내용이다. 내가 건넨 말 중 가장 효과가 좋았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친구와 꼭 안 친해도 돼"


그러면 아이들은 눈이 커지면서 '선생님이 저런 말을 한다고?'라는 놀라움과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라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얻는다. 유치원 시절부터 아이들은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늘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산다. 그래서 친구와 친하게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생소한 것이다.


"그 친구 때문에 너무 괴롭고 그래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면, 그 친구와의 인연을 너 스스로 끊어도 된다는 말이야."


"어떻게요?"


"반 친구니까 만나 인사정도만 하고 굳이 모든 걸 같이 한다든가 따로 약속을 잡아서 논다든가 하는 거 있잖아. 그렇게 애쓰지 말라고. 한마디로 '친한 친구'가 되려는 노력을 하지 마. 그냥 별로 안 친한데 반에 있는 친구 있지? 그 정도 사이로 지내봐."


"인사도 안 해요, 요즘."


"그럼 너도 인사하지 마, 그러다가 네가 좀 기분 좋은 날에는 먼저 인사정도는 하고."


"그래도 될까요?"


"그럼, 이 기회에 다른 친구랑도 친해져 보고, 혼자 노는 연습도 해보고 좋지."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는 (허울뿐인) 친한 친구와 멀어져도 된다는 단순한 사실에 아이들을 꽤 홀가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아이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관계를 놓아버림으로써 그렇게 해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경험한다. 그리고 두 가지 이유로 건강한 자아를 찾게 되는데 1. 잠시 소외감을 느끼더라도 자신을 괴롭히던 관계에서 벗어나니 살만해지고 2. 생각보다 다른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 과정에서 사회성도 기를 수 있다. 


"지금 A가 1년 지나고, 3년 지나도, 5년이 지나도... 어른이 돼도 네 곁에 남을 진짜 친구인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왜 네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거야? 겨우 몇 개월 유지될 인연인데 너무 힘쓰지 마. 그 친구와의 관계보다 네 인생에게 중요한 게 너무 많아. 너 자신, 미래, 가족, 00(친한 다른 친구)..."


아이가 친구 문제로 고생하고 있다면 부모의 역할은 먼저 친구와 있었던 사건을 잘 들어보고 객관적으로 시시비비를 파악하는 일이 먼저다. 그래서 아이가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면 고칠 수 있도록 잘 지도해줘야 한다. 예를 들면 아이가 지각을 자주 해서 친구들에게 미움을 샀다거나, 친구의 비밀이나 험담을 다른 친구에게 전달했다면 아이게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 지혜' 등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별 시답지 않은 이유도 있다. 예를 들면 아이가 시기질투를 받거나 성향상 너무 다른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거나, 혹은 근거 없이 그냥 아이가 미움을 받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럴 경우는 내가 상담한 방식처럼 아이 그 관계를 놓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그런 관계로 쩔쩔매는 건 구린 똥봉투를 쥐는 것과 마찬가지다. 똥봉투를 곁에 두면서 계속 괴로워하는 것보단 과감히 버리고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1. 당사자와는 거리를 두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도록 한다. 2. 반에 다른 친구를 만들도록 격려한다. 참고로 10대 또래와 친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보는 것이다. 3.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시간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자립심을 기를 수 있다. 그리고 4. 설령 반에 당장 친한 친구가 없더라도 문제없이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사회생활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사실 어른이 되면 대부분의 사회생활이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5. 다만 아직 청소년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아이가 정서적으로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부모)나 (다른 반 혹은 같은 반의 다른) 친한 친구가 필요하다. 아이가 편하게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통의 창구는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상담을 해도 어떤 아이는 뭔가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준다.


"마음이 불편하구나. 걔랑 평생 갈 친구가 되고 싶어? 그러면 그 친구에게 솔직하게 네 감정을 털어놓고 서운한 것도 다 말해. 그리고 그 친구한테도 너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물어봐. 그래서 서로 맞춰가는 가보는 거야. 그런 에너지를 다 쏟아서라도 그 친구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봐야지. 그 모든 시간을 기꺼이 견디면, 네가 인내할 일이 많겠지... 여하튼 그런 과정을 겪으면 걔는 너와 평생 갈 친구로 남을 확률이 높을 거야. 그런데 네가 생각했을 때 이 관계가 그런 노력을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면, 힘들게 지속할 이유는 없지."






미국에서 생판 모르는 누군가의 생일 파티에서 갔던 건 미국 사회에 스며들고 싶던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제되지 않고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서요.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보죠. 인간관계도 결국은 일종의 집착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회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는 기본이지만 어느새 '많은 친구(인싸)', '친한 친구', '좋은 사람(사랑받는 사람)'집착하게 되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콘서트를 하면 몇 분만에 티켓을 매진시키는 유명한 가수도, 선행으로 유명한 국민 MC도, 대통령도, 심지어 공자와 소크라테스에게도 안티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나'를 좋아합니다. 사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누군가를 싫어하고 싶으면 그 이유를 만들고, 좋아하고 싶어도 그 이유를 스스로 만들죠. 그러니 결국 모든 인간관계에서 본질은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 아닐까요. 오락가락하는 외부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잘 붙잡고 있는 일. 이래저래 좀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랑해야 하는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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