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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Oct 20. 2023

평생의 집안일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직하면서 독립했다. 부모의 도움을 빌려 집을 얻었으니 완전한 독립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어쨌거나 30년 만에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 혼자 살게 되었다. 그때는 이런저런 생각에 매우 복잡하고 혼란했던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니 세세한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심플하게 느껴진다. 경기도에 있는 본가에서 회사까지는 지하철로 약 1시간 30분. 그리 오래 걸리는 건 아닌데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약 15분 걷고,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서 지하철을 타고 환승을 한 번 해야 회사에 도착한다. 고로 8시 30분까지 출근을 하려면 넉넉잡아 6시 30분에는 집에서 나와야 했다. 처음부터 통근은 생각도 안 했고 독립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엄마는 혼자 살림을 꾸리게 된 나를 걱정했다. 그도 그럴게 나는 집안일이라곤 전혀 하지 않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집안의 맏딸이면 응당 집안일과 친할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집안일과는 거리가 먼 장녀로 자랐다. 애초에 아무도 내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하지 않았다. 팬티 한 장 내 손으로 빨아본 적 없고, 책상은 언제나 난장판이었다. 먼지나 머리카락 같은 건 내 관심 밖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세탁기 작동법도 자취를 시작하며 처음 알았다. 엄마는 나에게 집안일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간혹 내가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기를 밀거나 하는 건 기특한 효도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강요되는 무엇이 아니었다. 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유독 엄마는 나의 집안일을 말렸다. 내가 하겠다고 하면 고무장갑을 뺏어 들며 ‘나중에 많이 할 텐데, 벌써부터 하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나중이란 결혼한 후를 말하는 것이고, 그때 많이 하게 될 거란 말은 내가 결혼해서 집안일을 하며 살아갈 거라는 말이었다. 결혼도 하고 싶지 않고 결혼해도 혼자 집안일을 떠맡을 생각은 없지만 구태여 덧붙이진 않았다.      

 


  나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 그녀는 거의 평생을 아팠다. 엄마는 다섯 살 무렵 병원에 입원한 외할머니를 기억한 댔다. 근데 그건 엄마의 기억이고, 듣기로는 결혼하기 전부터 아팠단다. 그 당시에 아프다고 하니 외할머니의 엄마는 ‘시집가면 낫는다.’고 얼른 시집을 보냈단다. 그러니 외할머니의 몸이 언제부터 고장 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약한 몸으로도 밭일을 다녔고, 아프면 병원에 가느라 집을 자주 비웠다. 큰삼촌과 엄마는 친척집에 맡겨지거나 둘이서만 있는 일이 빈번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엄마가 집안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 그녀의 조그맣고 여린 손에 걸레나 고무장갑 등이 쥐어진 것이. 엄마가 자라는 동안 할머니는 내내 아팠다. 아픈 것은 일상이 되고, 장녀인 엄마가 살림을 돌보는 것도 일상이 됐다. 내 엄마는 어질러진 방이나 쌓여있는 빨랫감을 무시하고 나 몰라라 하는 성정이 못 됐다. 눈에 보이는 더러움은 닦아내고, 심지어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깨끗하게 정돈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거기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충분하게 있었다. 엄마는 그 시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나는 간혹 그려본다. 교복을 입은 엄마가 아침밥을 차리고 동생들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모습이나, 학교가 끝난 후 집에 오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나 빨래를 하는 모습. 몸에 밴 듯 자연스럽고 당연한 매일의 집안일, 엄마 말에 따르면 ‘나중에 많이 하게 될 일’들을 진작부터 많이 해버리며 자란 여자의 모습.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여자아이는 그렇게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며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 집은 내가 없으면 안 돼, 내가 동생들을 챙기지 않으면 안 돼, 엄마가 아프니까 내가 엄마가 되어야 해. 어떤 마음으로 그 시절을 지나왔는지 나는 조금도 헤아릴 수 없지만, 어떤 순간에 나도 장녀로서 느꼈던 책임감인지 압박인지 모를 감정을 그녀는 아마 더 무겁게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치과에서 치위생사로 일하며 동생들을 부지런히 먹이고 입혔다. 오빠도 빼먹지 않고 챙겼으며 엄마의 수술비와 집을 사는데도 돈을 보탰다. 등을 구부려 낯선 이들의 입안을 들여다보고 긁어내고 갈아내며 번 돈은 차곡차곡 집을 위해 쓰였다. 


  결혼은 또 다른 살림으로의 이동일뿐이었다. 직접 돈을 벌며 살림을 꾸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로, 남편의 월급을 쪼개고 쪼개며 세 식구를 먹이고 입혀야 했다. 아이가 더 생기고 커가면서 그녀의 집안일은 몇 배로 불어났다. 내 어린 시절은 대체로 평화로운 기억이지만, 실재했던 매일매일은 그녀에게 치열했을 것이다. 부족한 돈으로 아이 셋을 먹이고 입히며 뒤처지지 않게 키우려 애쓰는 나날들은 쌓인 설거지나 빨랫감만큼이나 고되고 막막했을 것이다. 그녀는 묵묵히 그 모든 일들을 해왔다. 집안일은 회사 일처럼 시간에 맞춰 끝내고 결론지어지는 일이 아니다. 해도 해도 계속해서 생겨나고 끝이 없어서 매일을 쉬지 않고 해야만 한다. 매일 쉬지 않고 하는데도 티는 안 나면서 하루라도 게으르면 금세 티가 난다.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잘한다고 보너스가 떨어지는 일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와의 싸움처럼 외롭고 지겨워도 그냥 해야만 하는 일이다. 혼자 살아보니 집안일은 그런 것이었다. 5평짜리 원룸에 혼자 사는데도 청소기를 하루에 세 번씩 돌린다. 뒤돌아서면 먼지나 머리카락이 눈에 보인다. 엄마 집에 살 땐 몰랐다. 내가 그런 것들을 거슬려하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거슬리기 전에 엄마가 치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의 평생의 시간 동안 이 지루한 과정을 반복해 온 엄마가 새삼 존경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 하나를 먹이고 입히는 것도 버겁다. 가끔은 너무 버거워서 다 놓고 외면하다가도 할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한다. 엄마는 그 모든 일을 나눌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혼자서 해냈다. 본인이 했던 것처럼 자식에게 집안일을 일찍부터 물리지 않겠다는 애처로운 신념이었다. 종종 그런 엄마가 미련하게도 보여 짜증을 냈던 적이 더러 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어떤 사랑은 너무 깊고 커서 미련하게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그런 사랑을 담뿍 받고 공주처럼만 자라서 면목이 없다.      


  요즘 나는 엄마 집에 가면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하려고 한다. 엄마가 빨래를 마치면 같이 빨래를 넌다. 엄마는 내가 빨래 너는 게 어딘지 성에 차지 않는 듯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혼자 하게 두지 않으려 한다. 여전히 엄마가 하는 일에 비해 아주 작은 손길이지만 뻗어보는 것이다. 엄마가 내 나이이던 시절로, 그보다 더 어린 시절로, 그보다 훨씬 어리던 시절로 가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리고 여린 소녀에게서 걸레를 뺏어 들고 고생했다고, 그만하라고 등을 토닥이는 상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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