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해한 구조, 내가 맞닥뜨린 현실
업무 환경의 자율성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은, 백지 위에 연필 하나만 쥐여주고 무엇이든 그려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스로 정한 목표량을 마치고 얻는 자율성과, 아무 일도 주어지지 않은 채 떠넘겨진 시간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구덩이에 점점 빠지기 시작했던 시점은 입사 첫날의 근로계약서, 이게 나를 얼마나 곤혹스럽게 만들게 될지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올 즈음, 고영희 과장이 우리에게 근로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는 읽고 쓰는 게 아니라, 따지고 써야 한다'는 말을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너무나도 안일하게 계약서를 작성했다. 충분히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계약서의 일부 조항은 당시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당시의 분개함과 나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처음 의문이 든 건 계약서에 기재된 ‘대표자 이름’ 때문이었다. 내가 면접을 보았고, 모두가 '대표님'이라고 불렀던 그는 계약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름이 달랐다. 의아했지만, 그땐 '가족 경영인가 보다' 하고 넘겼다. 이름은 여성으로 보였고, 가족 경영의 경우 배우자를 법인 명의자로 등록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아내 분의 이름이신가 보다 생각했다. 그건 내 순진한 착각이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후, 회사의 전 직원들이 참여하는 메세지창에 초대되었다. 수많은 메시지 속, 나는 또 한 번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창 전체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진두지휘를 하며 지시를 내리는 인물의 이름이었다. 나의 의아함은 혼란으로 바뀌었다. 내가 아는 대표와도, 계약서의 명의자와도 다른 사람이었다.
‘이게 누구지? 왜 이 사람이 전체 지시를 내리는 거지?'
머릿속이 매우 복잡해졌다. 그제야 막연하던 의문은 구체적인 구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 사람을 보고 들어온 줄 알았는데, 그 안에는 이름이 셋, 얼굴이 셋, 권한이 셋 따로였다. 나는 대체 누구의 지시로 누구와 일하게 되는 걸까. 이 조직은 단순한 ‘회사’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겹겹의 구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적당히 일하기 좋은 회사라고 생각했는데, 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