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가 또...

by 취생몽사

"아재라는 말이 싫지 않아."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아재는 대부분 그렇게 거짓말을 합니다. 특히 캠퍼스의 예비 아재들, 복학한 예비역부터 곧 졸업을 앞두고 있는 화석을 아우르는 아재들은 그렇게 거짓말합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들은 아재라는 단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끝없이 발버둥칩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분홍색 셔츠를 입어보거나, '넘나 기분이 조크든요.' 같은 말을 써보려고 애를 씁니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애잔한 발버둥이 꼭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라는 법은 없습니다. 대부분은 얼마 못 가 체념하고 안주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공대생, #예비역, #화석 등등의 해쉬태그를 달고 있는 한 아재가 페미니즘 잡지 발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별 걸 다 하네"하고 말해줬습니다. 흠, 차라리 분홍색 셔츠를 입는 것이 나으려나요.


차가운 젤라또에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끼얹어 내는 이 양가적 디저트로 잡지의 이름을 정한 날, 또 동시에 "뜨거운 주제에 차가운 이성을 끼얹다."라는 다소 거창한 슬로건이 정해지던 날,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일상에 뜨거운 실천을 끼얹어보자고 말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미 냉소와 염세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굳어진 아재의 일상에 다시금 열정과 긍정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저는 "This is what a feminist looks like"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이것을 보고 "명석씨,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저는 대답하지 못 할 것입니다. 저는 페미니즘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도 정체성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도 궁금합니다. 그래서 알아보려 합니다."


라는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잡지 <아포가또>에 참여하고 있으며 나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부아르를 읽으며 그녀의 신경질적인 문장에 짜증을 냈다가도, 세미나에선 공감과 찬사를 보내는 팀원들에게 멍해지곤 했습니다. 정해진 분량만 읽고 나릉 열심히 발제문을 썼는데, 바로 그 다음주에는 지난주에 썼던 글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도중에 덮어버린 적이 다섯 번은 넘었고, 저마다의 피해서사를 이야기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오갈 곳을 모르던 자신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의 고통과 불편에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고, 딱 그만큼 더 부끄러웠습니다. 이제껏 당연시해왔던 가치들을 전복시키고 스스로를 더욱 검열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쓰니 짜증만 부린 것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뿌듯한 날들입니다. 식은 지 오랜 에스프레소에도 향기는 남기 마련이니까요.


앞서 아재들의 발버둥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점점 목에는 힘이 들어가 뻣뻣해지고 자주 핏대를 세웁니다. 정작 늘어나는 뱃살은 무기력하게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잡지 <아포가또>는 목에 힘을 풀고 배에 힘을 주려는 발버둥입니다. 때론 헛발질이 될 지도 모릅니다. 의도하지 않은 방향 속에서 누군가를 걷어찰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주어진 시간만큼은 체념하고 안주하지 않으렵니다.


이번 호를 준비하며 보부아르에 관련된 조사를 하다가 그녀가 남긴 문장 하나를 찾았습니다.


"Live with no time out."


"잠시도 쉬지 말고 살아가라."는 직역 대신 "아재들이여 발버둥쳐라."하고 나름의 번역을 해봤습니다. 제 발버둥이 어떤 결말을 맺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끊임없는 자기초월로 자신을 지켜내는 것, 다시 말해 이러한 발버둥으로 아재가 되는 순간을 최대한 미루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그것이 고독한 편도 아닙니다. 운이 억세게 좋았는지 평생 모르고 살 수 있었던 친구들도 생겼으니까요. 이 자리를 빌어 나머지 팀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전 아직 아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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