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포근한 나라

이불 속

by 머머씨


이불 속은 작고 포근한 나라다.

근데 하루 3번쯤은 그 나라에서 추방당한다.


배고프다고, 화장실 간다고, 리모컨 찾는다고.


다시 입국할 땐 여권 필요 없다.

이불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게 함정이다.




아침 햇살이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도

나는 이불 속 나라의 왕이다.




와룡(臥龍)

누워있는 용이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스레드 팔로워 중 문창과 교수님 한 분은

내 일상 글을 읽고 늘 흐뭇해하셨다.


(그 분의 프라이버시로 닉네임은 가립니다.)


"평범한 일상의 표현력이 좋아요."

"이렇게 꾸준히 써보면 나중에 좋은 콘텐츠가 될 거예요."

"10여 년 전에도 이렇게 일상 이야기 쓰던 블로거가 있었어요."


그러곤 농담처럼 던지셨다.


"누워있는 용, 와룡. 잠재력이 있어요."


이렇게 내 별명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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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밖은
각자의 전쟁터지만
이불 속은 나만의 왕국

교수님의 응원으로

나는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회사를 퇴사하고 맞이한 아침들.

뭔가는 쓰고 싶고, 쓸 내용은 많지 않고.


구질구질하게 전 직장 험담은 나 스스로가 불편하고

남들에게 나의 약한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다들 출근할 시간에

나는 침대에서 SNS에 아침 인사를 올렸다.




✍️ 와룡의 아침 일기


눈을 떠보니 창문 밖으로 출근길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침대 속에서 결심했다.

"저들의 노력까지 내가 대신 쉬어주겠어."

힘내세요! 제가 오늘도 대표로 쉬겠습니다.



창문을 열었더니 고요한 주말 아침이 날 반겼다.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결심했다.

"오늘은 주말의 고요를 방해하지 않기로."

주말은 천천히 즐기는 거예요.

저도 이불 속에서 평화를 유지 중입니다.



남편이 설 준비하러 나가면서 말했다.

"나만 고생하는 거냐?"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대답했다.

"남편 고생이 빛나려면 내가 쉬어줘야지."

오늘도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들 해요.

저는 침대 대표로 누워 있을게요!



창밖을 보니 추운 날씨에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있었다.

"지금 내가 나간다면… 감기 걸릴 확률 99%."

건강을 위해 오늘도 침대에 남기로 했다.

면역력 챙기세요!

저는 예방 차원에서 눕겠습니다.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출근하는 사람들도 멋있고

침대에서 꿈을 꾸는 나도 멋있다.

결론: 우리는 다 멋있다.

오늘도 멋지게 보내세요!

저는 이불 속에서 멋짐을 유지할게요.



운동하려고 옷까지 갈아입었는데

거울 보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오늘의 운동은 이불 무게 견디기로 대체합니다."



이른 아침 산에 상쾌하게 올라가서

산 정상에서 숨 돌리며 경치 보면 인생 좀 달라질 것 같지?

근데 내려올 땐 무릎 나감. 그리고 다음날 침대 못 일어남.

그게 나야. (등산 사진 올린 날)




이렇게 매일 아침 침대에서 SNS를 채웠다.


처음엔 그저 장난이었는데

어느새 내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


모두가 바쁠 때 나만 느긋한 척하는 그 작은 반항.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작은 장난이 나를 살렸다.


번아웃과 야간 근무로 무너진 몸과 마음.

우울함에 잠식된 일상이 조금씩 웃음을 되찾았다.


내가 밝은 모습만 글로 표현하다 보니

정말로 내 마음도 밝아지는 신기한 경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잔잔한 장난글로 사람들과 소통을 자주 하게 되었다.


침대는 때론 도피처였고

때론 치유의 공간이었다.


이불 속에서 SNS로 세상과 만나는 동안

나는 조금씩 세상 밖으로 다시 나갈 용기를 얻었다.


한 달 동안 매일 아침 침대에서의 독백은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긁힘)을 선사했다.


어쩌면 그들도 회색빛 일상 속에서

작은 위안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나의 게으름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었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더 이상은 매일 아침 글을 올리진 않지만

여전히 이불과의 사랑은 계속된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잠시 망설인다.

일어날까, 더 누워있을까.


와룡의 하루가 또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작고 포근한 반란.


가끔은 그때가 그립다.


매일 아침 SNS를 통해 낯선 이들과 나눴던 웃음.

침대에서 쓴 글이 누군가의 하루를 밝게 했던 시간.


침대 위 철학자

이불 속 나라의 왕.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이불 밖 현생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아니, 5분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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