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난 취미가 없다 보니 통상 취미란에 산행이라 적곤 했다. 산행 자체도 즐기지만 그보다 나는 휘적휘적 걸으며 오만 거 구경하길 좋아하는 편. 사철 다른 모습으로 치장하는 산은 예사 멋쟁이가 아니다. 싱푸른 잎새를 비벼대는 나무들도 살갑거니와 산에 오르며 둘러보는 아기자기한 야생초들 참으로 정겹다. 계절마다 제각각인 산빛이며 산세는 산세대로 또 얼마나 매력적이던가. 특히 안개 스멀거리는 날이면 신비 그 자체인 산.
하지만 뉴저지에 온 이후, 즐기던 도락을 놓아버려야 했다. 인근에 산다운 산이 없어서였다. 하다못해 동산 같은 둔덕조차 없는 널펀펀한 평지의 연속뿐. 그럼에도 마을 이름은 마운 할리니 마운 로렐이다. 산 비슷한 것이 어디 있다고... 주위보다 높이 솟아 있어야 산이다. 언덕조차 없이 무진장 펼쳐진 평원에 단풍나무 산딸나무 자작나무 참나무 느릅나무 같은 잡목에 소나무 무성히 자라 큰 숲을 이룬 이곳. 기암괴석 사이로 여울져 흐르는 계류까지는 욕심내지 않는다. 그저 숲 오솔길 갖춘 마을 뒷산 정도의 자주 오를 수 있는 산이 있다면 이곳 생활이 덜 팍팍하련만.
Garden State인 뉴저지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근 지리나 정보에 어두웠던 나.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평원인지라 등산지가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못 했는데 아니었다. 한 시간 거리인 펜실베니아 쪽에 꽤 근사한 산이 있다고 했다. 취향이 각각인 요셉은 바다낚시에 흠뻑 빠져있었으니 산에 관심 가질 리 없었다. 해서 주말이면 교우들과 호수며 공원을 찾거나 팜 또는 랜치로 구경 가는 게 고작이었다. 가을 깊어지자 내심 별러왔던 산행 기회가 생겼다. 기존에 형성된 산행팀이 있다면서 미사 마친 다음 펜실베니아 페어 마운틴을 간다기에 두말없이 합류하기로 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던 시월이었다. 건강이 썩 좋은 편이 못 되는 교우도 무리 없이 등산할 수 있는 페어 마운틴을 그렇게 가게 됐다. 필라델피아에서 단체로 김밥 도시락을 사고 간식도 골고루 준비했다. 처음 보는 전원 풍경을 슥슥 스쳐 지나갔다. 띄엄띄엄 고풍스러운 시골마을이 나타났다. 누렇게 시들어 서걱대는 옥수수밭도 한참이나 이어졌고 푹 고개 숙인 해바라기 밭도 지나쳤다. 빈 들판 여기저기 뒹구는 둥그런 사일리지도 보였다. 주차장 아닌 공터에 차를 부려놓았다. 산행은 낡은 오두막이 선 삼거리에서부터 시작됐다. 초입에 마중 나온 색색 단풍빛이 눈부셔 우린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밑둥치에 두터이 이끼 낀 고목 늘어선 플라타너스 길 따라 한참을 걸었다. 성가대인 글라라와 로사가 은혜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곁으로 너른 폭의 맑은 계류가 따라왔다. 메디슨 카운티 영화처럼 지붕 달린 나무다리를 건너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강폭 조붓해지자 돌다리도 걸려있었다. 계곡 떨구고 비탈진 산길로 접어들었다. 약간 숨이 찰 정도의 경사지였다. 연세 높으신 분들 고려해 쉬엄쉬엄 걷다가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땀을 들였다. 가을 단풍은 더한층 그윽해졌다. 전혀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길이 불친절하기는커녕 정녕 본받아 마땅한 환경보호 현장이었다. 다시 완만해진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언덕 끝에 우주의 기가 모여있다는 기묘한 바위가 눈길 끌었다. 그 곁을 지나자마자 돌로 계단 만들어 놓은 내리막길이 열렸다. 어느새 석양빛 내려 저마다의 긴 그림자 이끌고 썰렁해진 숲을 빠져나왔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필라델피아 한식당에서 돌솥 순두부를 기다리는 중 비슷한 이름의 공원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페어 마운트 공원은 거대한 스퀼킬 강과 새하얀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감싸고 있는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공원. 수백만 그루의 나무와 수많은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는 크고 작은 공원들이 즐비하단다. 드라이브 코스로도 훌륭한데 이곳 출신인 그레이스 켈리 이름을 딴 켈리 로드를 달리노라면 숲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고. 페어 마운트 공원은 1876년 미국의 독립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세계인들의 입소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다음 주말 계획은 미술관도 들림 겸 겸사겸사 무조건 필라델피아행으로 결정했다. 미술관 옆 은행나무가 한창 눈부실 것이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