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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에 다녀왔다네

by 무량화


어쩌면 북구 백야의 숲을 꿈꾸듯 헤맸거나 비밀스러운 집회에 몽롱히 빠졌던 걸까.


한편의 자연 다큐에 넋 놓고 심취해 있었던 것도 같아라.


마치, 순간 이동 빠르게 이뤄진 애니메이션 영상 같아라.


설경에 초대된 그 잠시가 아무래도 꿈만 같아라.


아니 아니, 아무래도 현실의 일이기보다 가상세계에 펼쳐진 몽유설경도였지 싶다.



토요일 오전 내내 빗발 눈발 오락가락하다 해가 쨍하기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였다.

아침엔 한라산에 무지개도 걸렸었다.

하여튼 변화무쌍한 기상도를 접한 오늘 하루였다.

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중문 로터리에서 천백 도로를 타고 한라산 어깨짬으로 향했다.

눈과 비가 교차되는 날씨라 천백 고지에 잔설이라도 남았을까 혹시나 기대하면서.

서귀포 다이 도로변 곳곳마다 비에 젖은 금빛 감귤이며 먼나무 빨간 열매가 유난히 때롱때롱 고왔다.

중산간서로가 지나는 회수 사거리를 통과해 위호텔 앞길 스친 다음 천문과학문화원이 있는 하원마을 삼거리에 이르렀다.

천백 도로 초입에서부터 버스 외의 승용차 진입이 교통경찰에 의해 차단됐다.

매년 겨울 눈이 쌓이면 이 자리에 바리케이드가 쳐지면서 엄중하게 교통통제를 해왔다.

하지만 당시야 해가 떠있는 멀쩡한 날씨인지라, 렌터카에 탄 젊은이가 항의를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량 통행을 단속하는 경찰이 과하다 싶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통제가 되기 전 올라왔다가 눈에 갇힌 승용차들이 도로에 뻘쭘하니 서있는 게 보였다.



거린사슴 전망대를 지나 서귀포 자연휴양림을 스쳐갈 때까지는 사실 도로 통제를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차가 점점 한라산 깊숙이 들어서자 하늘이 흐려지면서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영실 입구에 다다를 즈음 비는 진눈깨비로 변했다.

버스가 영실 매표소로 커브를 틀자마자 거기서부터 진눈깨비가 삽시에 싸락눈으로, 싸락눈은 함박눈 송이로 바뀌었다.

점점 눈발이 굵어졌다.

와이퍼가 바쁘게 움직였다.

영실에서는 아무도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었고 눈보라만 갈수록 심해졌다.

기사 양반이 차에서 내려 눈발 하얗게 덮어쓴 채 스노 체인을 바퀴마다 감았다.

영실 매표소를 돌아 나오자 그새 길가에 눈이 제법 쌓였다.

차는 느릿느릿, 그럼에도 꾸역꾸역 산길을 올라갔다.

천백 고지에서 승객 세 사람 전원이 하차했다.

눈은 고래질 치며 거칠게 퍼부어댔다.

강풍까지 몰아쳐 우산은 소용없었고 대신 우비를 덧입었다.

눈사태라도 난 듯 허공에서 춤추며 자욱하게 쏟아지는 눈발.

누리가 온통 뿌옇다.

설경 어우러졌건만 눈 구경할 계제가 아니었다.

눈보라로 시야가 흐려져 농무 속을 걷 듯 가까운 풍경마저 희미하게 보였다.

대설경보를 싹 무시하고 나섰다가 그 보란 듯이 이런 폭설을 만나다니...

마른침 꿀꺽 삼켜졌다.



팔각정에서 잠시 행장을 가다듬은 뒤 바로 옆 백록상을 지나 고상돈 기념비부터 만나봤다.

엄청스런 눈보라와 맞서서 오늘도 백록담 바라보며 서있는 고상돈 동상과 기념비를 우러렀다.

무거운 등짐 지고 높디높은 눈산 두 발로 섭렵해 온 삶의 여정, 충만한 환희였을까, 고독한 투쟁이었을까.

에베레스트 8,848m 여기는 최고봉, 더 이상 오를 곳 없다며 팔 번쩍 뻗어 펼친 태극 깃발 든 산악인의 동상은 말한다.

한창나이에 떠났지만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밟았으니 고독한 투쟁이되 충만한 환희였다고.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혹독한 자연과 맞서 치열하게 살다가 불꽃처럼 스러진 산악인 고상돈은 그래서 영원히 살게 됐다고.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를 한국인으로는 처음 올랐으나 하산 도중 사고로 추락해 숨졌지만 천백고지에서 영영 세세 산다고.

같은 시대를 산 비슷한 연배라서 인지, 눈 푸덕지게 내리는 산중이라서 인지, 그의 동상 앞에서 꽤 한참을 맴돌았다.

그 자리를 떠나 천백 고지 습지 데크길에 올랐지만 여느 때처럼 한바퀴 빙 도는 대신 입구에서만 머물다 서둘러 돌아섰다.

예측불허 급변하는 한라산 기상도가 어찌 바뀔지 몰라서였다.

설경 한가운데서 머문 시간은 한 시간 남짓, 맘만 먹으면 하시라도 짬을 내 색다른 풍광 접할 수 있는 이 축복.

생각사록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을 온통 은세계로 장식하려 함인지 여전히 눈발 하염없이 난분분 흩날렸다.

우박까지 더러 후다닥 떨어지고 설한풍 세차게 휘몰아치나 기분 흐뭇하니 별로 추운 줄도 모르겠다.

적설량 제법 되자 계속 제설차 오갔고 염화칼륨 뿌리는 차도 천천히 눈보라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경찰차 경광등 불빛만 번쩍대던 천백 도로에 드디어 아래 동네로 데려다줄 초록색 버스 번호판 불빛이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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