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보름 가까운 듯 유독 둥두렷 높이 떠오른 보름달.
구름 낀 하늘이라 달은 투명하기보다 묵직한 것이 육안으로는 잘 닦아놓은 놋쟁반 색깔에 가까웠다.
보름달이 떴으니 내일은 강정 앞바다에 있는 서건도에 가봐야지, 작정을 했다.
서건도(鋤建島)는 통상 썩은 섬이라 불리는 작은 섬이다.
제주 방언으로 '썩은'이라는 말은 '땅이 너무 척박하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잦은 해무로 습도 높아 살기 궂은 지역이라, 신시가지 일대가 오래전 '썩은 빌레'로 불려 왔던 거나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폭발한 용암이 쏟아져 내리면서 대부분 현무암 층이 되는데 반해 이곳 암석은 응회암으로 형성된 터라 암반이 무르다고 한다.
응회암은 재질이 연해서 무른 바위처럼 푸슬거리며 쉽게 부서져 내려 지명이 썩은섬이라 불렸던가.
육지와의 거리는 고작 300m, 그 서건도는 한 달에 십여 차례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섬이다.
바닷물이 빠지면 누구나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데 특히 사리 때가 되면 더 많이 바다가 갈라진다.
널찍하고 단단하게 자갈길이 드러나기 때문에 남녀노소 아무라도 안전하게 바다 건너 섬에 들 수가 있다.
올레 7코스 길목에 위치한 데다 섬에 들면 사방 전망이 매우 뛰어난 이곳.
전면으로는 범섬, 문섬, 섶섬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강정 해군기지 방파제가, 북쪽으론 한라산과 고근산이 마주 보인다.
더구나 기원전 1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토기 파편과 동물뼈 등이 발견되었다는 섬.
해바르고 바다에 먹거리 넉넉하니 거주할 만한 여건이었겠다.
하지만 규모가 워낙 작아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고학적 사료들이 흥미를 끌어 그 섬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빤히 드러난 바닷길 바라보면서도 서건도로 건너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수 차례 기회를 만들었음에도 여태 못 가본 그 섬.
지난해에도 일부러 찾아갔다가 요동치는 격랑 두려워 건너갈 수 없었던 서건도다.
이번 또한 비슷했다.
바로 눈앞에 소위 '모세의 기적' 바닷길이 훤히 열려있었지만 선뜻 발걸음 옮겨지지 않았다.
서슬 퍼런 태풍이 생각보다 위력 기세등등해 엄청난 파도를 마구마구 후려치고 있어서였다.
쉴새없이 미친 듯 으르렁거리며 포효하는 바다.
어느쩍부터 키워온 홧병일까.
묻지마 폭력 가하면서 무차별로 횡포 부리는 미치광이처럼 날뛰며 거품 물고 산화하는 파도.
미련 없이 달려와 결연하게 자폭하고는 끝내 물보라로 스러져버렸다.
무분별하게 욕심껏 소비하며 욕망 최대한 충족시키려니 자연환경이며 지구촌 미래는 안중에도 없었으니.
그 보복이리라.
자연재해는 갈수록 규모와 피해 정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고 있다.
제6호 태풍의 핵은 방향을 틀어 현재 일본을 거쳐 한국 향해 북상할 것으로 기상대는 예측했다.
그 영향으로 서귀포 앞바다는 엊그제부터 풍랑주의보가 발효 중.
접근금지 깃발처럼 하얀 파도 휘날리는 서건도를 한동안 멀거니 건너다보다가 태풍 지나간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섰다.
조이통물에서 기원한 개울물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이 지역은 너븐물이라 부른다지.
인근 지명은 거의가 발음조차 어려운 사투리, 수모루 서년듸 공물 왕대왓 동병듸 섯가름 허물서 배튼개 선궷네...에렵당!
너븐물 다리를 건너 귀가를 위해 찻길로 올라갔다.
12층에서 내려다본 섶섬 인근, 허옇게 이빨 드러내며 먼바다에서부터 주름져 밀려오는 파도 먼빛으로도 기세등등, 거칠게 없다.
후덥지근한 날씨라 맥주잔 시원스레 기울이며 일찌감치 저녁 때우고 창공에 둔 시선.
그러나 오늘 밤은 보름달 기다려도 허사, 비구름이 하늘을 전수 덮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