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람하게 자란 소철을 만났다.
미사를 다녀오는데 블러바드 길가 카페 주인이 낑낑거리며 큰 화분을 내다 놓았다.
겨우내 볕을 못 봐서인지 이파리 빛깔이 우중충했다.
짙푸르고 빳빳한 잎새 멋스런 관엽식물 소철을 보자 다시 아버지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미카엘라 자매님이 유년기를 보낸 고향 얘기를 했다.
딸부잣집 자상한 아버지에 대한 회고담이었다.
인천 갑부였던 의사집에 탐스러이 핀 백장미를 보고 한 줄기 얻어 꺾꽂이 하려고 어렵사리 의사부인에게 청을 다 넣었었다는 그녀 아버지.
딸이 많은 집에는 꽃도 많아야 한다며 회사 마치자마자 귀가해, 해마다 마당 가득 꽃을 가꿨다고 한다.
그녀 얘기를 들으며 문득 떠오른 아버지였는데,
오늘 본 소철 굵은 둥치에서도 지독한 화초거름 냄새와 아버지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녀 아버지처럼 가정적이고 살가운 아버지이기보다, 온갖 호사취미나 즐기던 천상 한량인 아버지.
그중의 한 가지가 화초분 모으기였다.
거의가 가난했던 60년대 초, 그것도 군청 소재지인 시골에서 우리집은 꽃집이라 불렸다.
봉봉 사중창단이 부른 '꽃집 아가씨'가 유행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우리집이 그렇다고 꽃가게나 화훼업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개인집 앞마당에 유리온실이 있었다 하면 대부분 반신반의할 만큼 사실 특별 케이스였다.
아버지는 벌목업을 주업으로 하면서 관공서와 학교에 조개탄을 납품하기도 했다.
목재소 일을 하며 동산에 밤나무 단지를 일구던 아버지는 과수재배에 관한 원예서적을 읽다가
꽃에도 관심이 가닿으며 자연스레 화초 수집을 하기에 이르렀다.
볼일이 생겨 대처인 대전이나 서울에 다녀올 적마다, 촌에선 보기 드문 진기한 화분이 하나씩 늘어갔다.
냄새 이상한 제라늄이 화사한 꽃 함빡 달고 가장 먼저 양지쪽에 자리 잡더니, 이후 소철, 고무나무, 군자란, 몬스테라, 팔손이, 종려죽, 남천, 아스파라거스 등 희귀종들이 모여들었다.
아취 고아한 선비풍의 청매 분재나 동양란 종류보다, 주로 남방의 관엽식물을 선호한 것조차 충분히 아버지다웠다.
눈도 많이 오고 겨울이 긴 충청도에서 아열대성 화분을 거두자면 그들을 위한 온실은 필수였다.
첫해는 캐빈 같이 아담스런 온실에 유리가 아닌 비닐 덮개창을 달았으나 영구적이지도 않은 데다, 무엇보다 눈 무게를 감당치 못해 이듬해 봄 덮개공사를 다시 했다.
그 첫겨울 동안 아침마다 대빗자루로 비닐창 위에 덮어둔 멍석에 쌓인 눈 치워내는 일은
키가 큰 언니 몫이었다.
비교적 찬찬한 성격이라 관엽식물 잎새에 얹힌 먼지나 티끌 닦아주는 일은 내게 맡겨졌다.
여름이면 온실 화분마다 각각의 성질에 따라 물주는 일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특히 전지를 하던 아버지 눈에 갑각충이나 진딧물이라도 뜨이는 날은 한바탕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담장 밖 깻묵단지에서 부글부글 익어가는 거름 냄새 그 고약한 악취를 코 막아가며 견뎌냈었다.
지금처럼 화초용 비료가 따로 있던 시절도 응당 아니었다.
꽃거름으로는 닭똥을 부엽토에 섞거나 깻묵을 발효시켜 웃물만 떠서 부어주면, 얼마뒤 화초들 키는 움쑥 커질뿐더러 잎새마다 윤기와 생기가 한결 더해지곤 했다.
날마다 알맞게 물 주고 일일이 잎새 닦아주며 해충 제거해 준 정성 어린 손길 덕에 화분마다 귀태 뽐냈다.
관공서 행사 때면 식장의 단상에 올려지거나 학교 장학시찰 있는 날은 하루 빈객으로 불려 가 괴임 받곤 하던 그들.
어느 해 삼동(三冬) 즈음, 추녀 끝 고드름 길게 늘어진 영하의 밤이었다.
밤잠 설치며 내동 조심성 있게 살피던 연탄불인데 하필이면 그 밤 난로가 꺼져
냉랭하게 실내온도 내려가며
그들 모두는 한꺼번에 허망하게도 무너져 내렸다.
그때 관엽식물의 이파리들은 죄다 까맣게 상해버렸고 다육질 사보텐은 목이 꺾이거나 축 쳐져있었다.
두터운 소철잎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세기에 십 년은 더한 세월 전의 먼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길가의 소철 화분,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다이 각색되는지 그때마저 아름답고도 그립게 되돌아보여진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