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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8. 2024

백록, 그대에게 가는 길

남창으로는 서귀포 앞바다가 보이고 현관을 열면 북쪽으로 한라산이 마주 보인다.

거처에서 날마다 전자동으로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일기에 따라 표정 변화무쌍한 바다요 산이지만, 오늘 한라산은 날 기다리고 있기에 더더욱 유정스럽다.

때론 하얀 구름모자를 쓰거나 운무에 가릴 적도 있긴 하나 백록담 언저리며 깊게 팬 물길 계곡까지 선명히 보이는 산.

언제이고 저 봉우리에 올라보리라, 대할 적마다 내심 벼려온 한라산 등정이다.

한 달 전에 한라산국립공원 성판악 코스를 예약해 두었다.

예약된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구름 낀 하늘이지만 일출 고와 이만으로도 반갑고 기꺼웠다.

그간 나름 체력도 비축해 두었으며 사전 준비차 성산이며 군산 오르면서 워밍업을 다져놓았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 떨어 일곱 시 반, 성판악에 닿았다.

오전 다섯 시 반에 입산이 허용되는데 우리 예약 시각은 두 번째 타임이었다.

온데 잔뜩 양털 흩어놓은 듯한 구름으로 하늘 흐리지만 혹시 아나? 한라산 기상도는 수시로 변하니까.

삼대 적선해야 볼 수 있다는 백록담, 만일 이번 기회에 운무로 전모를 만나지 못한다 해도 다음을 기약하면 될 터였다.



모처럼 호흡하는 아침 숲 공기는 너무도 신선하고 청량했다.

찹찹하지만 투명한 바람 스쳐 이내 얇은 점퍼를 꺼내 덧입었다.

어느 결에 여리던 신록은 녹빛 짙게 스며들어 숲 기운 그새 혈기방장해졌다.

곁눈질은커녕 한눈팔지 않고 속밭을 거쳐 백록담을 향해 일로 직진,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12시까지 통과해야 하는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서도 잠깐만 쉬었다.

정각 두시가 되면 백록담 정상에서 하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허위단심 앞만 보고 내처 걷고 또 걸었다.

얼추 올라 산정 이마가 보일 즈음, 푸른 창공까지 드러나자 새로운 힘이 덧보태졌다.

하얗게 백골로 남은 고사목 지대, 구상나무 군락지도 그냥 패스하며 내려올 때를 기약키로 했다.  

그러나 미룰 수 없는 풍경은 신비로이 구름띠 두른 푸른 하계,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창천 아래 햇솜을 가득 깔아놓은 듯해 뛰어내려도 전혀 다칠 리 없는 폭신한 완충지대 같았다.

눈에 익은 범섬과 섶섬이 떠있는 전면의 서귀포 앞바다와 멀리 동쪽 마을 가시리의 풍차도 보였다.

정상 향해 사선으로 휘감아 오르는 동안 몇 번이나 뒤돌아서서 사진을 찍어대지 않을 수 없었다.

시시각각 구름이 바삐 이동하는 터라 자칫 구름장 덮친다면 하산 시 죄다 놓치는 풍경될까 조바심 나서였다.

사진 찍느라 약간 지체하는 바람에 백록담에 올라 머문 시간은 불과 반 시간 남짓.


오, 그대여........


하많은 날들, 오래 그리던 임 만난 자리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랴.

들뜸 가라앉히고 그윽한 시선 주고받노라면 마음과 마음끼리 내밀히 소통 이뤄지게 마련이거늘.

병풍처럼 둘러싼 암벽 자애로우면서도 위엄찼고 그 아래 백록 내려와 물 마시던 굼부리는 병아리마냥 작아 귀여웠다.

주 하나님 지으신 이 경이로운 세상... 내 영혼이 찬양할 뿐, 이란 성가 그대로다.

단 한 번 만에 백록담을 만난 것만으로도 황감스런 일, 축복의 기회 허락해 주신 하늘에 감사드렸다.

칠십도 중반이른 나이임에도 특별한 초대를 받을 수 있다두루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



하산은 한결 수월했다.

긴장감 따위나 시간 같은 경계에도 걸림이 없으니 아주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올라갈 때 놓쳤던 온갖 자연 풍광들, 훤칠한 삼나무며 뿔이 멋진 노루며 엉겅퀴꽃 마음껏 누려가면서 여유롭게 걸었다.

뉘 집 정원이 이처럼 대단하랴, 무상으로 주어진 대정원 자연은 바로 지금 여기서 누리는 자의 몫이다.


여기에서 지금 이리 행복한데 무엇이 부러울 것인가, 더한 만족감을 찾으려 어딘가를 헤맬 이유가 있을까 싶다.


살면서 불평할 일이 뭬이며 화려한 명성 따위 욕심낼 까닭도 없으니 대자유는 나의 것!

말 그대로 주유천하라도 하듯 천천히 내려오는 길, 어둠살 스미자 슬슬 추위가 느껴져 나머지 점퍼를 껴입었다.

허위허위 정상에 올라 잠시 변죽만 울렸을지라도 그럴 수 없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이 행복감이면 충분한 오늘 일정.

그럼에도 생수와 간식거리며 김밥이고 과일 싹 다 비워서 남은 짐도 없건만, 배낭 멘 어깨는 결리고 다리는 묵직했다.

삼만 오천 보 이상을 걸었다니 종일토록 한라산을 두 발로 오르고 내렸다.

성판악에서 백록담까지 왕복 열 시간 넘어 걸린 셈이다.

저녁 일곱 시, 어둠이 진을 친 성판악을 물러 나려니 그래도 아쉬웠다.


한라산 -김순이 시



너에게로 갈 때는

맨발로 간다



가슴속에 가득 찬 것

버리고 간다



세상의 번거로움

벗어놓고 간다



돌아오지 못할 길

 가듯이 간다



그리운 님

만나러 가듯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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