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십자고상 기다리는 고색창연한 멜리데

카미노 스토리

가난한 농가의 오레오인 카바세이라/곡물 저장고이자 행운의 상징물인 초가

갈리시아 지방 특유의 조림이 잘 된 유칼립투스 숲길을 벗어났다.https://brunch.co.kr/@muryanghwa/313

신선한 숲 향기가 전신에 배어든 데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아 심신 한껏 가벼웠다.

어느 마을이나 초입에는 돌이끼 낀 우물가와 공동 빨래터가 있고 니초(Nicho)라는 묘실이 생몰연대를 새긴 대리석과 숱한 십자가 거느리고 기다렸다.

도성 안에 이르기 전 으레 해자처럼 둘러친 강이 마중 나와 있고 통과의례이듯 중후한 석조다리를 지나게 된다.

갈리시아 지방다이 곳곳에서 수시로 오레오를 만났다.https://brunch.co.kr/@muryanghwa/193

고색창연한 돌다리와 돌로 지은 작은 성당을 지나 멜리데(Melide) 안으로 들어섰다.

오후 시간은 넉넉하게 비어있었고 하늘엔 뭉게구름 한유로웠다.

알베르게에 붙박여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도 좋아 담황색 지붕 이마 맞댄 동네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높이 솟아있는 십자가만 바라보고 걸어가면 틀림없이 중심거리인 광장이 나온다.

중세도시의 역사와 전통이 녹아있는 콘벤토 광장, 주변을 둘러싼 오래된 건물들로  번화한 편이었다.

푸레로스 산 주앙 교회(Igrexa de San Xoan de Furelos)를 중심으로 시청사가 서있고 그 건너 박물관은 마침 문도 열려있었다.

보통 시에스타에 걸려 박물관 관람을 거의 못했는데 웬 떡이냐 싶어 얼른 들어섰다.https://brunch.co.kr/@muryanghwa/658

입장료는 없었고 자그만 규모에 비해 4층까지 자연스레 연결된 박물관은 알차게 짜여 있었다.

각 층마다 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 유물이며 중세 기독교 흔적에서 근대 기계문명에 이르기까지 선대들의 생활상을 일목요연하게 재현시켜 놓았다.

정겨이 다가와 안기는 토기 조각과 돌멩이를 이용해 사냥하는 도구며 돗자리 짤 때 사용하는 발을 엮는 틀 등은 동서양 어디나 별다를 거 없어 과히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황금으로 만들어진 갖가지 제구와 성물에 이르니 제국주의 냄새가 물씬,

우리네 소박한 정화수 그릇이 오히려 신 가까이 닿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중후하고 튼실한 석조 성당들.  

스페인 어딜 가나 질리다 못해 물릴 정도로 흔하게 눈에 띄는 풍경이다.

해양대국으로 영국보다 앞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스페인.

약체 영국과의 해전에서 태풍으로 완패, 제국의 패권을 고스란히 영국에 물려주고 내리막을 걸어온 나라.

그들의 무자비한 침탈로 역사에서 지워진 왕국이 무릇 그 얼마였나.

죄는 지은 대로 간다, 자연스레 뒤따르는 인과응보라는 단어가 이에 대입된다.

허나 최고점에서 급전직하, 바닥을 확실히 찍고 나면 비상의 깃 다듬어 치고 오를 일만 남는다.

고난으로 점철된 오랜 보속의 시간을 지나 이제 서서히 재기를 도모하기에 이른 스페인이다.

조상들이 남긴 눈부신 문화유산 헤아릴 수 없이 많아 후대들 한 세기는 거뜬히 살아낼 정도인 나라가 스페인이었다.

박물관을 나오면 바로 눈앞에 산 페드로 대성당 (Iglesia de San Pedro)의 웅자가 기다린다.

미사를 마친 다음 금빛 찬란한 제대와 중세의 파이프 오르간을 올려다본다.

빙빙 어지러울 정도로 많고 많은 조각품과 그림들 대충 훑고는 밖에 나왔으나 해는 아직 중천에서 낮잠 잔다.

이곳 푸레로스 산 주앙 교회(Igrexa de San Xoan de Furelos)엔 마누엘 카이데(Manuel Cajide)의 조각인 십자고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이 아래로 내려져 있는 독특한 형태의 십자고상.

십자가 상에 양손이 못 박혔는데 오른팔이 축 내려져있는 기적의 십자고상에 얽힌 이야기는 이러하다.

오래전 죄 많은 한 순례자가 고해소에 들어가 죄를 고백했으나 사죄경을 받지 못했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성당을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순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순례자 이마에 십자 성호를 그어주셨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천상의 음성도 동시에 들렸을 것이다.

종교란, 신앙이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일이건 조직이거나 간에 바탕은 영성이다.

 그럼에도 나약한 인간인지라 흔들리는 믿음은 특별한 신비체험을 통해 한층 공고해진다.

예수님의 늘어진 그 팔을 조용히 올려다 보노라니 문득, 세파에 짓눌려 쓰러져있는 우리 손을 잡아 주려는 위로의 손길로 느껴졌다.

너나없이 신산스러운 한 세상 살아내면서 우여곡절도 겪고 더러는 선을 행하기도 하지만 더 많이 악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죄성에 짓눌린 순례자들에게 죄 사함과 위로의 손길 내밀어 희망을 안겨주는 십자가상은 다른 성당에도 또 있을듯.

고단한 인생행로 걷다 보면 때때로 그런 십자가의 위무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