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 민들레 포식자를 보며
바람이 순해졌다. 생각 없이 집어 입고 나온 옷의 소매 끝단이 무겁다고 느껴지는 걸 보니 진짜 봄인가 보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는 아이를 민들레 꽃씨 불기로 살살 달래어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곳곳에 핀 민들레 꽃씨를 찾아 후~ 후~ 부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는 어떻게 민들레 씨를 잘 찾아?"
아이의 칭찬에 기분 좋아져 줄기가 싱싱한 것들을 열성적으로 찾아낸다.
저렇게나 좋을까.
더 아가였을 때 얼굴 표정이 나온다.
볼 한가득 바람을 넣어 갓 구운 찐빵이 된 얼굴이 귀여워 아침 댓바람부터 사진을 찍어댄다.
"내가 후~ 불면 눈이 오는 것 같아서 좋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더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일까.
매일 행복하지 않아도 행복한 일은 언제든 있다는 듯이.
아이를 등원시키고 한 손으로 킥보드를 잡고 덜덜덜 길의 무늬를 따라 걷는다.
문득, 민들레는 홑씨인가 홀씨일까?
홀씨는 꽃을 피우지 못하는 식물이 생식을 하기 위해 만드는 세포, 포자를 의미한다.
꽃을 피우는 민들레는 씨앗으로 번식하므로 홀씨가 아니라 '꽃씨'.
혹은 ‘한 겹으로 된’ 하나인, 혼자인 뜻을 더하는 홑을 써서 '홑씨'라 부르는 것이 맞단다.
이제 꽃을 피우게 될 아이의 마음엔 만발한 봄꽃처럼 꽃씨가 가득하겠지.
아이가 탄 셔틀버스 창문에 하트와 뽀뽀를 민망할 정도로 날린 후 돌아서면서 말한다.
'사실 나는 지금 홑씨가 아닌 홀씨였어.'
혼자 피지 않는 꽃은 그런대로 행복한 것 같다. 자신이 꽃을 피우는 걸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요즘의 나는
느슨한 봄바람처럼 놓아야 할 것과 잡아야 할 것들이 바뀌어 있지 않을까?
킥보드를 문 앞에 놓고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봄볕이 뜨거워진다. 나의 얼굴은 이미 기미에 지배당한 지 오래.
남편은 연애 때부터 이름에 '미'가 들어가는 것들과 나를 동일시하는 버릇이 있는데
어느 날 내 얼굴을 보고
"자기도 얼굴에 뭐도 많이 나고, 기미에~ 할미네 이제.
(애도의 뜻으로 합장하며) 나무아미~"
내 손 한번 잡으려 덜덜 떨던 귀여운 소개팅남은 어디에 가고
(아름다운 할머니들도 많지만 단순한 노화로 보자면) 할미로 가는 길목의 아내에게 합장을 하다니.
시들해진 꽃처럼 반격할 기운도 없는 거 보니
이렇게 늙나 보다 내 마음으로 서서히 놓고 있었다.
순간 '놓지 않아야 할 것을 이렇게 놓아버리고 사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내가 잡아야 할 것은 의외로 명확하다. 아이와 놀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 일. 단정하게 보낼 수 있도록 살림 루틴을 지키는 것. 조금이라도 읽고 쓰는 것. 그리고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도록 공부하고 부지런해지는 것.
잘 해내고 싶은데 능동적으로 하기 쉽지 않은 홀씨이다.
반면에 아이와 남편이 잠든 사이에 홀린 듯 보는 드라마와 야식. 도전할 만한 일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도망치는 것. 풀어야 할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누구보다 규칙적으로 행하고 있으니 꽃은 커녕 싹이라도 돋을 수 있을지 홀씨는 조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