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언니와 함께한 벨기에 문화권의 프랑스 북부도시 릴
릴은 정말 특이한 도시다.
프랑스 전국의 큰 도시 중 하나인 릴은, 벨기에 국경에 인접해 있다.
그래서인지 릴은 다른 프랑스 지역과는 사뭇 다른 정취를 풍긴다.
나는 기차를 타고 릴로 갈 때마다 기차역 뒤에 붙는 이 플랑드르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다.
동화 <플랑드르의 개>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곳이 바로 벨기의 북부의 플란데런 지역이다.
옛날에는 플란데런 백국이 있었는데, 플란데런 백국은 벨기에와 릴, 그
리고 덩케르크 등 일부 프랑스 북부 지역을 포함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플랑드르는 그때의 지역에서 따온 말이다.
그래서 릴은 벨기에의 문화권에 가깝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짙은 회색과 브릭색의 칙칙한 색의 벽돌. 그리고 벨기에의 대표음식인 와플 모양을 닮은 건물.
(빌딩 창문과 지붕모양이 네모난 와플이랑 똑 닮지 않았는가)
내가 이제껏 보았던 남부의 화려한 외관과 컬러풀한 색의 집과는 다른 분위기다.
상앗빛이고 세로로 창이 길게 나 있는 파리 시내의 집들과 비교해봐도 한 눈에 큰 차이가 난다.
게다가 릴의 날씨는 파리보다 더 춥고, 칙칙하다.
오죽하면 10월이 되자 초겨울의 차디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릴에는 역사가 오래 된 유명 제과점이 하나 있다. 바로, Méert. 메에르로 불리는 이 제과점은 1677년에 시작되어 거의 400여년 진화하며 발전한 가게다.
처음에는 릴에 쇼콜라티에 가게로 시작했다가, 바닐라를 넣은 와플로 유명해진 메에르. 메에르는 1900년대가 되자 티룸을 만들어 차를 팔기 시작한다. 지금은 제과만큼이나 각종 다양한 차로도 유명하다. 메에르가 얼마나 유명하냐면, 투어가이드가 도시를 소개할 때 메에르 앞을 들러 이 가게의 역사를 소개할 정도다.
게다가 19세기에 폼페이안 오리엔탈리스트 풍의 화려한 외관을 만들어 지금의 메에르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파리에도 메에르 지점이 있지만, 이 역사가 살아있는 특징적인 외관의 가게는 이 도시, 릴 지점에서만 볼 수 있다.
나는 특히 메에르의 차가 마음에 든다. 차만 모아두고 파는 티룸 섹션으로 들어가면, 차만 수십 종류가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틴캔이 든 차는 20유로대지만, 그냥 말린 차만 든 페이퍼백을 구매할 경우 100그램의 차를 10유로(15000원) 정도면 구매할 수 있다. 차이 티, 우롱 티, 볶은 차, 여러 차 종류를 블렌딩한 차 등 모두 뚜껑을 열어 향을 맡을 수 있다. 틴 캔에 그려진 그림도 다 너무 아름다워서, 맛이 고민된다면 그림으로 골라도 좋다.
나는 언니의 동료가 언니에게 선물한 메에르 차를 마셔보고는, 내 것과 엄마 것도 샀다. 원래도 차를 좋아했지만 이 브랜드 차를 마시면서부터 매일 차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메에르 차는 여러 종류를 섞은 조합이 참 잘 되어 있다. 마셔보면 향이나 풍미가 좋아 차가 절로 좋아진다. 그래서 나는 릴이라는 도시를 생각하면 이 메에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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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벨기에의 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릴에 도착했을 때, 언니는 퇴근을 하고 나를 데리러 왔다.
그리고는 언니는 곧장 언니와 친한 프랑스 친구네 저녁 식사 자리로 향했다. 그녀의 차 트렁크에 캐리어와 보스턴백, 배낭을 싣고 옆 자리에는 어리벙벙한 여행자를 실은 채.
언니 친구 이름은 페린. 페린은 한국을 너무 좋아해 한국어를 전공했다. 지금은 소르본 대학교에서 한국어 전공 석사를 온라인으로 이수하면서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언니는 페린의 가족들과도 연이 생겨 그 가족들인 부모님과 언니의 저녁에 초대받은 거였다.
나는 그 때 친구네 집에서 하는 파티에 간다는 말만을 들은 상태라서 진짜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시끌벅적한 파티에 가는 건가 생각했다. 그동안 빨랫감이 쌓여 꾀죄죄한 상태에다 고단했지만 이런 나도 받아주겠거니 하고 철판을 깔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 페린이의 부모님께 막 포르투에서 출발하기 하루 전에 사 둔 에그파이를 내밀었다. 비행으로 인해 상자가 눌려 있어 살짝 부끄러웠지만 가족들은 고맙게 받아주셨다.
페린의 부모님은 따뜻한 분들이셨다. 저녁은 각종 치즈 종류의 전식으로 시작해서 가지와 감자, 당근을 비롯한 각종 채소가 들어간 슴슴한 맛의 오일베이스 파스타, 얇게 썰려 있는 햄과 바게트, 초콜릿 케이크와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후식까지. 우리는 맛있고 대화로 가득한 프랑스 가정식으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언니는 영어가 아직 서툰 페린의 가족과 프랑스어가 서툰 나 사이에서 멋지게 통역을 해주었다.
아마 그 다음 날이었을까. 언니가 나에게 릴을 소개시켜 준 날이.
나를 집에서 재워주기 시작한 주말, 어제의 늦은 귀가로 늦게까지 널브러져 있다 언니가 말했다.
이왕 온 거 주변 구경 시켜주면 좋을 것 같아. 우리 릴로 가자!
차로 30분 정도 달리니 생소한 도시가 보였다.
주차를 하고 골목을 걸어나오니 우울한 중세시대 같은 잿빛 도시가 나왔다.
‘릴은 여기가 다야. 진짜 쬐그매.’
릴 자체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도시지만 중심 번화가는 딱 정해져 있다.
그 중 분수대가 있는 그렁 플라스 (Grand Place)가 달걀 노른자와도 같은 중심부로 대부분의 큰 상점과 음식점이 이 부근에 몰려있다.
릴은 중심부에 오페라 극장, 원형 시계탑, 5층 높이의 서점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는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프랑스 북부의 도시다.
우리는 아담한 릴 시내를 구경하고, 성당에 들어가 마침 열린 음악회를 잠깐 들었다.
성당 특유의 높은 천장과 은은한 조명, 성스러운 느낌은 그냥 언제나 좋다.
성당을 나오자 저녁 무렵. 왠만한 카페가 다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고민하다 들어간 곳은 노팅힐 카페.
가게마다 다르지만 보통 프랑스의 카페는 5-7시면 마감이다. 반면 노팅힐 카페는 9시까지 문을 열었다.
노팅힐은 영화로 유명한 그 노팅힐과 같은 이름이다.
노팅힐 카페는 체인점 카페로 파리를 포함한 다른 지역에는 없지만 릴에는 도시 곳곳에 퍼져 있다.
이것만 봐도 릴은 마치 독립된 도시같다.
내 음료는 내가 사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기어이 내 음료를 사 주었다. 그리고 아직 스페인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에게 단호한 조언까지 해주었다.
‘이제는 더 생각할 것도 없는 모르는 사람인거야.’
딱.정.너. 딱 정해주는 너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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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은 동기 언니와 함께한 몇 달 간의 기억이 얽혀있는 소중한 도시다.
언니가 지내는 동네가 아주 작아서 우리는 외식을 하러, 놀러, 쇼핑을 하러 릴을 찾았다.
한 번은 언니의 동료와 만나 각자 할 일을 하러 릴의 카페에 갔다. 나무 테이블과 따뜻한 노란 조명이 있는 모던한 유럽 스타일의 카페 였다.
프랑스어 시험인 델프 책을 고르러 간 날도 릴에 갔다. 그렁 플라스 앞 포레 뒤 노드라는 대형 서점은 무려 5층의 높이다. 서점은 우리나라의 대형 서점처럼 각종 프랑스어 책을 비롯해 영어 책들과 중고서적, 필기구까지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종종 들렀던 약국도 기억이 난다. 프랑스에서 아벤느나 꼬달리, 라슈라포제 등 화장품과 영양제를 구할 때는 약국이 필수다. 릴 중심부에 위치한 대형 약국은 가격도 저렴한 편이고 다양한 제품이 구비되어 있다. 나는 나중에 언니가 한국에 가 있을 때도 혼자 이 약국을 찾았다.
평소에는 언니가 사는 작은 시골 동네에서 산책하고 밥이나 해먹는 재미로 살다보니 우리는 릴에만 오면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언니는 여기서 내가 먹고 싶다고 조른 쌀국수를 릴에 와 같이 먹어주고,
내가 두 달 여간의 동거 생활을 마치고 짐을 모두 싸서 툴롱으로 내려가기 전 날 인기 많은 맛집에 데려가서 피자와 라비올리 파스타, 그리고 후식까지 사 주었다.
내가 사려고 했는데…! 카드로 결제를 외치기 전에 언니는 이미 큐알코드로 계산을 해 두었다.
‘됐어, 나중에 돈이나 벌면 사. 지금은 아니야.’
언니는 성격이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 주로 긴 시간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책읽기나 공부를 즐겨하며 하루의 평온함을 즐거움으로 삼는 나와 달리, 언니는 저녁이면 쇼츠로 (주로 레시피) 요리와 웃긴 영상들을 찾아보며 깔깔대다가, 친구나 가족과 여행 스케줄을 만들고 여행 다니는 재미로 살았다. 그리고 원래의 언니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성격이어서 매번 갈팡질팡하는 나에게 더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해줬다.
언니는 말은 투박하게 툭툭 던지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에 정이 많은 사람이다. 이 정도는 내가 내도 괜찮을텐데도 장을 보러갈 때마다 내 카드를 기사처럼 휘어 막고 언니의 카드를 검처럼 내밀었다. 휙휙. 터치. 띡- 결제 되었습니다.
나는 언니와 성격이 많이 달라서 대학생 때는 언니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굉장히 직선적이고 낯선 사람. 우리는 대학생 때 같은 과 동기로 적당히 친하고 적당히 잘 지내는 그런 사이었다. 그러다가 언니는 내가 프랑스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나에게 연락해왔다. 나는 오랜만에 걸려온 연락에 의아 했었는데, 만나고 보니 우리는 성격이 그동안 둥글어졌다. 십 년 전에 비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나는 언니 덕분에 처음 파리에 올 때 예매한 숙소가 우범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언니가 가진 여러 고민들을 듣고 내가 직접 딛고 일어나 성장한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일 때문에 프랑스의 시골 동네에 지내느라 우울해진 마음에 한 줄기 웃음도 장착해주려고 했다. 유우머하면 또 제가 아니겠습니까.
언니는 내가 여행을 끝내야 하나 생각할 와중 나를 재워주고 먹여주고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프랑스 엄마 같이 말이다. 나는 동기 언니가 아니었으면 뒤에 올 여행을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마 프랑스 정착에 실패하고 일찍이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 같다.
그러니 프랑스에 6개월째 정착해 있는 것은 동기 언니 덕분이다.
하루는 릴의 합한 가게에서 피스타치오 잼을 고르는 언니를 보며 ‘피스타치오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곧 있을 유럽 가족 여행에 가기 하루 전 언니는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거 챙겨가서 가족들이랑 먹어.
이건 언니가 외출할 때마다 조금씩 샀던 게 아니던가. 개인적으로 쓰려고 사는 줄 알았는데 이때까지 나를 주려고 모아둔 거다.
나는 일순간 아주 큰 고마움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감동을 느꼈다.
그 때 느낀 마음은 황송하다는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릴에 갈 때마다 칙칙한 빛깔의 벽돌집과 쌀쌀한 날씨에 놀라곤 한다.
하지만 알고보면 릴은 오밀조밀 즐길 것이 모두 있는 다채로우며 콤팩트한 도시다.
나는 릴을 동기 언니와 닮은 도시라고 감히 칭하고 싶다.